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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를 배회하는 목소리
1. 이름과 존재
표제작이기도 한「훌」에서 친구 ‘훌’과 동료 ‘훌’이 등장한다.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화자는 이름은 같지만 철저하게 대비되는 두 존재 사이를 배회한다. 혼란을 가중시킬 것 같은 관계와 이름의 설정이지만 구도는 매우 단순하다. ‘친구 훌’은 철저히 개인적인 사람이다. 노동절로 설정된 휴일에는 ‘세제의 향기와 커피 냄새, 도시의 봄바람, 밀폐되지 않은 자유로운 공간, 적당한 오월의 안개…이런 한가운데서 잠들고 싶어’(P.60.) 한다. 반면, ‘동료 훌’은 선동과 연속극을 싫어하고, 권투 경기를 관람하러 가며, 남들이 기피하는 사람인 몽고 여자와 어울려 다니고 게으름을 용납하지 못하며 특히 휴일에 집에 박혀 있는 것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대비되는 두 존재처럼 화자가 집작하는 (고장난)텔레비전에서는 두 개의 채널만 나온다. 통신강좌와 연속극이 나오는 채널이다. 하지만 화자가 원하는 <미인에게 청혼하다>라는 연속극 대신, <보리스 고두노프>라는 연극이 방영된다. 휴일을 함께 보내기로 한 친구 ‘훌’에게 화자는 밖에 나가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친구 ‘훌’이 잠든 사이 화자는 음식 재료를 장만하기 위해 광장을 가로지르게 되고, 그곳에서 직장 동료인 (중국여자로 알고 있던)몽고여자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음 날 화자는 ‘동료 훌’로부터 ‘과격한 행동주의자’(p.91.)라며 광장에 나간 것이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화자는 ‘친구 훌’을 위해 식료품을 사러 나가는 길에 광장을 지나쳤을 뿐이고, 그 사이 ‘친구 훌’은 떠났다. 결국 화자는 어느 ‘훌’의 세계에도 스며들지 못한 채 지친 몸을 이끌고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배회하는 자의 이미지는 ‘싫증이 나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앉은 자리를 옮기듯이 그 도시를 떠나는’(p.103.) 화자가 등장하는「양곤에서 온 편지」에도 등장한다. 시 낭송과 좋아하는 책과 편지를 꺼내 읽다가 빛을 향해 걸어 나왔을 때 화자가 도착한 곳은 ‘극장의 무대’이다. 관객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된 듯 하지만 화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잠든 남자일까? ‘책을 읽는 것처럼’(p.121.) 그 남자를 바라보는 사람일까? ‘1994년 노동절’에 감옥에 간 사람일까? 골방에서 편지를 쓰고 책을 읽던 화자가 ‘무대’위에서 만난 세계는 ‘광장’의 세계와도 닮아있다. 각기 다른 모든 존재는 하나의 ‘나’일수도 있을 것이다.
「마짠 방향으로」에서는 ‘빈 건물이 더 많은 정도로 공동의 지역’에 위치한 곳에 거주하게 된 화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렀던 ‘개별적 존재’들의 흔적을 추적한다. ‘펜으로 글을 쓰는’ 마지막 거주자, ‘늘 여행을 하고 외로움을 타는’ 젊은 사람, ‘혼자 파티를 열고 즐기는’ 이웃, 동성 커플까지. 제목에 언급된 ‘마짠’이라는 곳은 ‘사회주의적 통일성과 효율성을 자랑하는 똑같은 모양’(p.144.)의 건물들이 ‘일정하게 같은 높이로 지어진’채 공실이 즐비한 도시이다. 그런 거리를 걸을 때 ‘이름’에 대해 인식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나는 말이지. 언제나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왜냐하면 너무 흔한 이름이어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었거든(…) 거리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어. 그래서 뒤돌아보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야.(p.152.)
이름은 존재의 개별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소설에서 계속 언급되는 노래 속 가사에는 ‘동성애자 소녀’라는 소수성을 가진 존재들이 ‘거리’를 향해 걸어 나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존재들을 쳐다본다. 배수아의 소설에 등장하는 ‘소수성’을 획득하고 있는 ‘개별자’가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계와 단절되어 있지 않고 ‘광장’, ‘무대’, ‘거리’등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구태의연한 인습을 거부하기 위해서 머리를 자른 거야.”(p.69.)
애인과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광장을 가로질러 가던 ‘훌’은 시위 중인 직장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여성 시위 참가자 중 한명은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이 인습을 거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반면 노동절을 집에서 보내기로 한 화자 ‘훌’과 친구 ‘훌’은 티비가 고장 나서 드라마를 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자기만의 취향을 늘어놓지만 다수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즐겨보는 것이다. 보통 소수성을 가진, 개별자로 존중받고 싶은 존재들이 인습을 거부한다는 편견이 깨지는 장면이다. 통념적으로 다수를 상징하는 ‘광장’의 세계에 있는 ‘훌’과 개인의 시간을 ‘방’의 세계에서 즐기는 ‘훌’ 그리고 그 두 세계를 배회하는 ‘훌’은 이름만으로 구분되지 않고, 사회적 통념으로도 완벽하게 수렴되지 않는 존재들인 것이다.
2. 타인
「회색 時」에서는 ‘수미’, 「시취」에서는 ‘P’라는 과거의 인연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재회하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개인의 역사 중에서 타인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타인은 과연 실재적인 것의 이름인가’(p.34.) 라는 사유를 하는 화자는 현재 채식주의자와 살면서 과거에 몰입하던 여자 ‘수미’와 재회한다. 비행기 격추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수미는 시간이 지난 뒤 화자 앞에 나타난다. 하지만 화자는 ‘나는 왜 수미에게 집중했던가’ 자신을 의아해 하고, ‘나는 바로 나 자신이 타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에 이른다.
「시취」에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그는 ‘P는 젊은 시절의 그가 미숙하게 판단한 것보다는 우둔한 여성이어서,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접어든, 오직 시취의 시간을’(p.253.) 이라고 하며 P가 뿌리고 나온 천박한 향수를 경멸한다. 이미 P의 편지에서 ‘고독하다’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부터 상대를 부정한다. 하지만 그는 어느샌가 쓸쓸하다는 감정을 토로하게 되는데, 그것은 과잉되거나 부조리하거나 철면피한 것일 뿐이라고 자책한다. 그는 과거 결혼에서 ‘공동의 공간에서 친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 상태에 대해 숨이 막힌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두 작품 속 과거의 인연들은 고유한 내밀함을 가지고 있던 존재에서 변질되어 있다. 그것은 과거와 다른 가치판단을 갖게 된 주체에 의해서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거나 왜곡된 대상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는 소녀란, 단지 나이가 어린 여자를 말하는 일반적인 명사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존재만이 획득할 수 있는 고귀한 육체와 정신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p.243.)
화자가 매혹되는 인물은 일반적 명사의 의미 속에 갇힌 상태가 아니다. 시간이 지난 후 그 대상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더라도 ‘매혹 됐던 순간’은 계속 기억 속에서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현재의 시간 속에 놓여 타인을 매개로 과거 나의 시선과 시간과 가치의 의미 변화들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그것을 타인의 가능성이라고 하자. 화자의 의미부여를 통해 특별한 존재가 되는 타인을 모습을 통해 화자도 존재증명을 하는 셈이다.
3. 세계
배수아의 소설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가치 안에 수렴되지 않는 개별자로 느껴지는 인물들은 거리로 나가기도 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사실과 다르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과거의 시간들이 왜곡되기도 한다. 하지만 도시를 ‘배회’하는 인물의 감각이 차갑지만은 않다. 배회 중에 성사되는 ‘만남’은 비록 실패했다는 회의적인 감정이 들게도 하지만, 개별자의 심정을 토로하게 만들고 귀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독하지만 무력함에서 빠져나와 운동성까지 느껴지는 인물들의 온도는 작가 배수아의 사람,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느껴졌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일관성, 사회적 통념, 질서를 파괴시킨다. 공간의 경계(양곤에서 온 편지), 시간의 일관성(회색 시), 이름, 호명의 일관성(훌), 인물까지 해체(마짠 방향으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개인은 타인 세계와 분리된 시공간에 있더라도 TV, 연극, 편지, 무대, 책 등의 매체를 통해 연결되기도 한다. 타인과 세계와 마주치면서 끊임없이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의미로 결정지을 수 있는가’라는 충돌 앞에서 개별자의 존재 가치가 생성되는 것이다.
“나이나 다른 조건은 상관없고 서로 마음이 통하고 진정으로 따뜻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 친구를 만난다면 함께 살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오래오래 말입니다.”(p.159.)
배수아의 인물과 소설의 세계는 ‘조건’없이 ‘마음’이 통하는 친구(타인)를 찾기 위해 서성이고, 기다리고, 나아가고, 배회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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