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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밍

미셸 오바마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미셸 오바마의 성장 과정과 오바마를 만나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퇴임까지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백악관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미셸 오바마의 가식적이지 않은 가치관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바마 정부에서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동성 커플 결혼의 합법화를 추진하고 미셀 오바마 또한 인권 운동의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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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다
우리는 부모님이 담뱃불을 붙이면 일부러 콜록거렸고, 종종 담배 심부름에 반항했다. 아주 어렸을 때 한 번은 선반에 놓인 새 뉴포트 담뱃갑을 뜯어서 그 속의 담배들을 줄기콩 분지르듯이 싱크대에서 똑똑 분질렀다. 담배 끄트머리에 일일이 핫소스를 묻혀서 도로 넣어두기도 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폐암에 대해 설교하면서, 학교 보건 시간에 시청한 영상 속 끔찍한 장면을 중계했다. 흡연자의 폐는 숯처럼 메마르고 새카맸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의 죽음이요, 몸속에 죽음을 품고 사는 셈이었다. 반면 담배 연기에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폐는 발그레한 분홍색이었다. 이토록 명백한 대비가 또 어딨나 싶어서, 우리는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연은 좋고, 흡연은 나쁘다. 금연은 건강이고, 흡연은 질병이다.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바가 바로 그런 것이었는데도, 부모님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담배를 끊었다.


우리가 되다
사우스사이드에서 흑인으로 자란 탓에, 정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정치는 전통적으로 흑인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정치는 내내 흑인을 고립시키고 배제했고, 흑인이 교육과 고용과 고소득을 누리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막았다. 나의 두 할아버지는 끔찍한 짐 크로 법과 굴욕적인 주거 차별의 시대를 살았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모든 권위를 불신했다(앞에서 말했듯이 외할아버지는 치과 의사조차 자신을 박해하려 든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인생의 대부분을 공무원으로 살면서 사실상 반강제로 동원되어 민주당 선거구 관리자로 일했는데, 승진을 꿈이라도 꾸려면 그래야 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좋아했지만 시청의 족벌주의는 늘 못마땅해했다.
시카고로 돌아온 버락은 나를 달래는 해독제가 되어주었다. 그는 내 걱정을 들어주었고, 돈 문제를 들어주었고, 자신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도 우리가 둘 다 안락하고 예측 가능한 변호사 생활에 안주할 의향이 없으니 정확히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는 알 수 없다고 인정했지만, 이것저것 다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전혀 가난하지 않으며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어쩌면 쉽게 계획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 밝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한번 해보라고 말해주는 사람, 걱정을 지우고 행복할 것 같은 방향으로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버락뿐이었다. 그는 내게 미지의 세계로 도약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왜냐하면—그리고 이 주장은 나의 두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친척에게는 충격적인 소리로 들릴 말이었다—사람이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다고 해서 꼭 죽는다는 법은 없으니까.
걱정마, 우리는 할 수 있어, 어떻게든 해날 거야, 이것이 버락의 생각이었다.

몸소 체험하기 전에는 남들로부터 아무 이야기도 들을 수 없는 일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첫 항목은 유산으로 하겠다. 유산은 외롭고, 괴롭고, 거의 세포 수준에서 상심하게 되는 일이다. 유산을 겪은 여성은 그것을 개인적 실패로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혹은 비극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 순간에는 물론 비참하겠지만 그 또한 오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사실 유산은 늘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여자들이 유산을 겪는다. 다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주제일 뿐이다. 나 역시 친구 두어 명에게 유산 사실을 털어놓고서야 알았다. 친구들은 애정과 지지를 보내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유산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렇다고 내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같은 괴로움을 겪었다는 친구들 이야기 덕에 조금은 더 잘 견딜 수 있었다. 이때 비로소 유산은 생물학적 딸꾹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타당한 이유에서 수정란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편이 좋겠기에 벌어지는 정상적인 일이었다.

처음에 버락은 부부 상담을 내키지 않아 했다. 그는 복잡한 문제를 맞닥뜨리면 직접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낯선 사람 앞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좀 드라마 같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불편한 일이었다.
상담사는—우드처치 박사라고 부르자—부드러운 말투의 백인 남성으로, 좋은 대학을 나왔고 늘 면바지를 입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버락과 내 이야기를 다 들어본 뒤 즉각 내 불만이 모두 타당하다고 인정해줄 거라 예상했다. 내 입장에서야 내 불만은 전부 절대적으로 타당했으니까. 모르면 몰라도 버락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겪어보니, 상담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드처치 박사는 누구의 불만도 승인해주지 않았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대목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표를 던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감하며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고, 우리가 각자 감정의 미로에서 헤어나도록 도왔으며, 개인의 상처 때문에 자동으로 상대에게 무기를 휘두르지 않도록 타일렀다. 우리가 너무 변호사처럼 따지고 들면 주의를 주었고, 세심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이유를 생각해보도록 이끌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이야기하다 보니 서서히 매듭이 풀렸다. 상담실을 나설 때마다 버락과 나는 서로에게 좀 더 연결된 기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같은 반 남자아이 하나가 나를 때렸다. 그 아이의 주먹은 혜성처럼, 난데없이, 온 힘으로 내 얼굴에 날아들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려고 줄을 서서, 예닐곱 살짜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가 가장 빨리 달리는지, 크레용 색깔의 이름들은 왜 그렇게 이상한지. 그런데 그때, 퍽 하고 주먹이 날아왔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 아이의 이름도 잊었다. 하지만 아픈 데다가 어안이 벙벙해서, 벌써 붓기 시작한 아랫입술과 뜨거운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멍하니 그 아이를 보았던 것은 기억난다. 나는 너무 놀라서 화도 못 내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 아이는 담임선생님에게 야단맞았다. 우리 어머니도 학교로 가서 직접 그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가 내게 가한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가늠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그날 우리 집에 와 있었던 외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답게 발끈하여 자신도 학교에 따라가겠다고 우겼다. 나는 내막을 전해 듣지 못했지만, 어른들끼리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고 모종의 처벌이 내려졌다. 그 아이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내게 사과했고, 어른들은 또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 아이는 너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다른 일 때문에 겁먹고 화났던 거야.” 나중에 어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지으면서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내게는 말해줄 수 없지만 속사정이 다 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아이는 자기만의 어려운 문제를 겪고 있단다.”

우리는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그렇게 대처했다. 어릴 때는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웠다.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는 사실 자신이 겁나기 때문에 남을 겁주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의 터프한 여자아이 디디가 그런 경우였다. 아내에게까지 무례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던 우리 친할아버지도 그런 경우였다. 그런 사람이 남을 휘갈기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했다. 아마도 묘비에 “인생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는 것” 같은 말을 새기고 싶어 할 어머니에 따르면, 그런 상황에서 유념할 점은 상대의 모욕이나 공격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면, 그때는 정말 상처가 된다.
내가 이 문제를 진지한 숙제로 맞닥뜨린 것은 훨씬 뒷날이었다. 40대 초반이 되어 남편의 대선 선거운동을 돕는 처지가 되어서야,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급식 줄에서 얼굴을 맞았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난데없는 공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아무 경고 없이 얼굴을 강타당한 것이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났다.
나는 2008년의 대부분을 그런 주먹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보냈다.


그 이상이 되다
백악관에 텃밭을 일구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더 큰 활동의 시작이 되기를 바랐다. 버락의 행정부는 더 많은 미국인이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에 집중했는데, 텃밭은 그것과 연관된 건강한 생활 방식에 관해서도 메시지를 줄 수 있었다. 또한 텃밭은 내가 퍼스트레이디로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볼 시운전 격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텃밭은 일종의 야외 교실, 아이들이 먹거리를 기르는 일에 관해서 배울 수 있는 장소였다. 게다가 자연에 관한 일일뿐 정치와는 무관해 보였고, 내가 부삽을 쥔 여성의 모습으로 수행하는 무해하고 순수한 활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우리의 행동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까 염려하여 노상 대중의 ‘시선’을 들먹이는 웨스트윙 고문들도 달가워할 것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텃밭을 통해서 사람들과, 특히 각급 학교 및 부모들과 영양에 관한 대화를 나눠볼 계획이었다. 그 대화가 더 나아가서 오늘날 식품의 생산방식, 성분표 기입 방식, 마케팅 방식을 살펴보고 그 현실이 사람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진행되면 좋을 듯했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그런 주제를 언급하는 것은 거대 식품 및 음료 회사들이 수십 년간 추구해온 사업 방식에 암묵적으로 도전하는 셈일 터였다.

2011년 겨울, TV 리얼리티쇼 진행자이자 뉴욕의 부동산 개발업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버락이 재선에 나설 201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예비선거에 도전하겠다는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전반적인 인상으로, 그냥 소음만 빚어내다가 말 것 같았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서 버락의 대외 정책에 대하여 전문적이지도 않은 비판을 늘어놓았고, 버락의 시민권에 공공연히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이른바 ‘벌서birth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버락의 하와이 출생증명서가 위조된 것이고 그는 사실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을 퍼뜨렸는데, 트럼프가 그 주장을 되살리려고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그는 방송에 나와서 갈수록 허황된 주장을 펼쳤다. 1961년 호놀룰루 신문에 버락의 출생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는 이야기는 사기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버락이 다녔다는 유치원의 급우들이 아무도 버락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는 거짓 주장도 펼쳤다. 조회수와 시청률에 목매는 뉴스 매체들은—특히 보수적인 매체들은—그런 근거 없는 주장을 희희낙락 부채질하기에 바빴다.

물론 그것은 야비하고 정신 나간 소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속에 담긴 편견과 외국인 혐오는 누가 봐도 뚜렷했다. 하지만 그래도 위험했다. 그것은 극우파나 정신 나간 사람들을 자극하려는 고의적 발언이었다. 사람들 반응이 두려웠다. 가끔 심각한 위협이 인지될 때면 비밀경호국이 내게도 알려주었는데, 세상에는 정말로 그런 소리에 선동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놀랐다. 걱정하지 않으려 해도 걱정될 때가 있었다. 웬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이 총을 갖고 워싱턴으로 들이닥치면 어쩌나? 그 사람이 우리 딸들을 찾아가면 어쩌나? 도널드 트럼프는 무모한 암시가 담긴 시끄러운 발언으로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협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영원히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걱정을 접어두고, 여러 보호조치를 믿으면서 그냥 살아가야 했다. 우리를 ‘타자’로 규정하려는 이들은 몇 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버락과 나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방식을 본다면 진실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런 이들의 거짓말과 왜곡을 초월하려고 애써왔다. 일찍이 버락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 때부터, 많은 사람이 진심과 선의로 우리의 안전을 걱정하는 말을 건네왔다. 사람들은 유세장에서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도록 늘 기도한답니다.” 모든 인종, 모든 배경,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당신과 가족을 위해서 매일 기도한답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가슴에 품고 지냈다. 우리의 안전을 기도해주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느꼈다. 버락과 나는 각자의 신앙심에도 기댔다. 이제 우리가 교회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예배하러 걸어 들어가는 우리에게 기자들이 고래고래 질문을 던지는 등 야단법석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대선 기간 중 제러마이아 라이트 목사에 대한 사상 검증으로 한바탕 소란을 겪고 정적들이 신앙을 무기 삼아—그들은 버락이 ‘은밀한 무슬림’이라고 주장했다—공격하는 것을 본 후 종교 활동은 집에서 사적으로만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매일 저녁 식사 전에 기도를 올렸고, 딸들을 위해 백악관에서 몇 차례 교리 강습을 열기도 했다. 워싱턴의 특정 교회에 적을 두지는 않았다. 우리가 시카고에서 다녔던 트리니티 교회의 신자들이 우리 때문에 겪었던 부당한 공격을 다른 교회의 신자들에게 또 겪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결정에는 희생이 따랐다. 나는 영적 공동체의 온기가 그리웠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리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기도하는 버락이 보였다.

찰스턴에서 장례식이 열린 2015년 6월 26일, 연방대법원이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렸다. 미국 50개 주 모두에서 동성 커플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판결이었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여러 주와 여러 법정에서 차례차례 체계적으로 법적 싸움을 벌여온 결과였으며, 모든 인권운동이 그렇듯이 많은 사람의 끈기와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그날 나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간간이 미국인들이 그 소식에 기뻐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환희에 찬 군중이 연방대법원 앞 계단에서 “사랑이 이겼다!”라고 외쳤다. 동성 커플들이 전국의 시청과 지방법원에 밀려들어서 이제 헌법이 인정하는 권리를 행사했다. 게이 바들은 일찍부터 문을 열었다. 전국의 길거리에서 무지개색 프라이드 깃발들이 펄럭였다.

이 일은 같은 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슬픔을 겪었던 버락과 나를 조금은 기운 내게 해주었다. 백악관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장례식 복장을 벗고 아이들과 얼른 저녁을 먹었다. 그 후 버락은 ESPN을 켜놓고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트리티룸으로 사라졌다. 나는 드레스룸으로 가다가, 관저의 북면 창문들 중 하나가 보라색으로 빛나는 걸 보았다. 그제야 우리 직원들이 백악관 전면에 프라이드 깃발의 무지갯빛 조명을 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일이 기억났다.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단호히 맞서야 하지만 그러느라고 나까지 그 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인즉, 우리는 이제 그런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약자를 비하하고 전쟁 포로를 조롱하는 사람, 내뱉는 거의 모든 말이 국가의 품위를 해치는 사람. 나는 미국인들이 말의 중요성을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TV에서 들리는 혐오의 언어가 미국의 진정한 정신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그에 반대하여 투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주기를 바랐다. 내가 사람들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품위였다. 품위는 내 가족이 여러 세대 동안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이었고, 우리가 나라 전체로도 그 중요한 가치에 의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품위는 늘 우리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것은 선택이고, 늘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지만, 내가 살면서 만난 존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매일매일 몇 번이고 그런 선택을 내렸다. 그 문제에 관해서 버락과 내가 지키려고 애쓰는 모토가 있었는데, 그 말을 나는 그날 밤 무대에서 들려주었다. 상대가 수준 낮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이고 선거일로부터 불과 몇 주 전, 도널드 트럼프가 2005년에 어느 TV 프로그램 진행자와 무대 뒤에서 대화하던 중 자신이 여성들을 성추행해온 일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그가 쓴 단어들은 너무 외설적이고 저질이어서, 매체들은 어떻게 하면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언론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다 결국에는 그냥 기준을 낮춰버렸다. 대통령 후보자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실어주기 위해서.

그 발언을 들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영상에 담긴 위협과 남자들끼리의 농담에는 내게도 고통스러우리만치 익숙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너를 해치고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어. 그런 혐오 표현은 점잖은 공론의 장에서는 대체로 사라진 상태였지만, 문명화되었다고들 하는 우리 사회에도 골수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자가 그런 표현을 태연하게 내뱉고도 무사할 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고 널리 받아들여졌다. 내가 아는 모든 여성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타자’로 치부되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우리가 아이들만은 결코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아이들도 아마 겪을 것이었다.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아가 그러겠다는 암시조차도, 상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다. 그것은 가장 추악한 형태의 힘이다.

온몸이 분노로 떨렸다. 다가오는 주에 예정된 힐러리 클린턴을 위한 유세 연설에서는 평이하게 그녀의 능력을 알리는 데 그칠 게 아니라 트럼프의 말에 직접적으로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소리로 그의 목소리에 반격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받느라 입원한 월터 리드 육군병원의 병실에 앉아서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궁리해보았다.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조롱과 위협을 받아보았다. 흑인이고 여성이고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비하되기도 했다. 그래서 트럼프의 조롱은 내 몸을, 말 그대로 내가 세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직접 겨냥한 것처럼 느껴졌다. 토론회 도중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뒤쫒는 사람처럼 곁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녀가 말할 때 주변을 맴돌았고, 너무 가까이 다가섰고, 자신의 존재로 그녀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했다. 나는 너를 해치고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어. 여성들은 평생 그런 모욕을 겪는다. 길거리에서 듣는 성희롱, 더듬는 손길, 성폭력, 억압 행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우리의 힘을 앗아간다. 어떤 상처는 간신히 눈에 보일 만큼 사소하다. 반면 어떤 상처

어느 쪽이든 상처는 누적된다. 여성들은 학교나 직장을 오갈 때도,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도, 종교 활동을 하러 갈 때도, 한 발 전진하려고 애쓰는 모든 순간에 그런 상처를 품고 다닌다.

내게 트럼프의 발언은 또 한 번의 일격이었다. 그의 메시지가 이기도록 가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2008년부터 함께 일해온 유능한 연설문 작성자 세라 허위츠와 함께 내 분노를 말로 바꿔냈고, 곧이어—어머니가 수술에서 회복한 뒤—10월 어느 날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그 말을 청중에게 들려주었다. 한껏 고조된 청중 앞에서 내 감정을 똑똑히 밝혔다.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정치가 아닙니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참아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을 전했고, 미국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두 선택지의 본질을 잘 알고 있음을 이번 선거가 보여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연설에 내 모든 진심을 담았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렸기를 기도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은 총득표에서 상대보다 300만 표 가까이 더 얻었지만, 총 8만도 안 되는 표 차로 펜실베이니아와 위스콘신과 미시간 주에서 지는 바람에 선거인단 득표에서 트럼프가 앞섰다. 나는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므로, 이 결과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겠다. 누구의 책임이고 어떤 점이 부당했는가에 대한 의견을 내지도 않겠다. 그저 그날 더 많은 사람이 투표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특히 여성들이 유례없이 자격이 출중한 여성 후보자를 놔두고 여성 혐오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을까 하는 의아함을 평생 간직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결과는 나왔고,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고 살아가야 했다.


에필로그
이양이란 곧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성경에 손이 올라가고, 선서가 복창된다. 한 대통령의 가구가 실려 나오고, 다른 대통령의 가구가 들어간다. 옷장이 비워지고, 새로 채워진다. 그렇게 간단히, 이제 새 베개에 새 머리가 눕는다. 새 성품과 새 꿈이 눕는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백악관을 떠난 사람은 여러 가지로 스스로를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나는 이제 인생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시점에 섰다. 정말로 오랜만에, 정치인 배우자로서의 의무에서 자유롭고 사람들의 기대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황에 있다. 거의 다 자란 두 딸에게는 내 손길이 예전만큼 필요하지 않다. 남편은 더 이상 국가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다. 내가 느꼈던 책임감이—사샤와 말리아와 버락에게, 내 경력과 나라에 느꼈던 책임감이—살짝 달라지니,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도 살짝 달라졌다. 이제 생각할 시간이 더 많고, 자연스러운 나 자신으로 있을 시간이 더 많다. 쉰네 살인 나는 아직도 발전하는 중이다. 바라건대 앞으로도 늘 그러면 좋겠다.

내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 여정에는 끝이 없다. 나는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아이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고 줄 것도 많다. 나는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인생을 함께하는 일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이며 때로 그 어려움 앞에서 겸허해진다. 나는 어떻게 보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도 때때로 불안하고 내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다. 인내와 수고가 둘 다 필요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

버락이 물러난 뒤로, 나는 속이 뒤집히는 뉴스를 너무 많이 접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리면 분통이 터져서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곤 한다. 현 대통령의 행동과 정치적 의제 때문에 많은 미국인이 자신을 의심하고 나아가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너무 괴로웠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담아 세심하게 설계된 정책들이 역행하는 모습, 미국이 가까운 우방들과 멀어지는 모습,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모습, 그런 것들을 지켜보기도 괴로웠다. 가끔은 대체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에게 결코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냉소다. 너무 걱정되는 순간이면, 심호흡을 하면서 내가 평생 만나온 많은 사람이 보여준 품위와 우리가 이미 극복해낸 많은 장애물들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나처럼 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에게는 민주주의 세상에서 각자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우리는 모든 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어쩌다 그만 평범하지 않은 여정을 밟게 된 평범한 여성이다. 그런 내가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바라는 바는 이로써 다른 이야기와 다른 목소리가 들릴 공간이 더 넓어졌으면,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2020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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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바

@1b7mgtbsu2je

돈의 수입과 지출에서 심리적으로 착각하는 부분까지 잘 지적하여 돈을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돈으로 얻으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하고, 돈의 노예기 되지 않고,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돈에는 이름이 없다
사람들은 돈을 구분해서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분은 아주 직관적이고 본능적이어서, 평생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마음속 회계장부라는 뜻으로 심적 회계 또는 심리계좌라고 부른다.
현금으로 구매하면 소비할 때 돈이 없어지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고 이것은 심리계좌에 즉각적으로 '손해'로 인식된다. 따라서 단지 카드만 긁으면 되는 신용카드가 아니라, 내 지갑에서 10만 원이 빠져나가는 걸 목격하는 상황에서 훨씬 신중한 소비를 하게 된다. 반대로 신용카드는 같은 물건이라도 더 쉽게 사게 만든다. 실제 돈을 지불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돈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돈도 안 썼는데 물건을 주니 소비가 공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신용카드를 쓰면 소비에 대한 경계심이 적어지고, 자연스럽게 소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심리계좌 때문에 생기는 착각의 결과다.

얼마나 버는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가장 많이 번 달만 기억하는 심리계좌의 착각은 당연히 지출 문제를 발생시킨다. 최고 소득 기준으로 지출 기준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소득이 불규칙해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돈 관리를 포기하면, 결국 잘못된 소득 기준과 지출 기준으로 인해 차후에 심각한 돈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득은 안정적이지 않고,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소득이 중단되면 실제 소득이 중단되는 것과 똑같이 재무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득에도 소득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통장에 찍히는 소득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득까지를 '우리 집 소득'이라는 심리계좌에 넣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최소한 얼마 이상을 벌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저축은 많이 할수록 좋은 거 아닌가요?
저축에서는 이자가 아닌 원금이 훨씬 더 중요하다. 원금이 1억 원이면 연 4퍼센트 이자가 400만 원이지만, 원금이 100만 원이면 연 4퍼센트 이자는 4만 원이다. 이자를 1퍼센트 더 받아도 1년에 5만 원이고 1퍼센트 덜 받아도 3만 원이다. 원금이 적다면 1~2퍼센트의 이자 차이가 돈을 불리는 데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금리 0.1퍼센트를 더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때로는 먼 곳에 있는 은행을 찾아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남들보다 조금 더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우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원금을 생각하면 0.1퍼센트의 금리 차이가 주는 이익은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너무 미미한 수준이다.
저축의 목적은 단지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쓸 돈을 준비하는 것이다. 즉 '쓰기 위한 저축'이다.
그리고 저축은 원금이 중요하다. 원금을 키우려면 쓰지 않고 계속 모아야 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저축은 쓰기 위한 것이다.
이자가 물가상승률에 못 미친다고 할지라도 그 손해는 미미하고, 돈이 필요할 때 저축해 놓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걸로 저축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이다.

도대체 왜, 아껴 써도 늘 쪼들릴까요?
마음속 심리계좌는 내가 직접 쓴 것만 지출로 기억한다. 그것만 따지면 '많이 쓰고 사는 것도 아니다'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다.
고정지출은 지출 과정이 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심리계좌는 돈을 썼다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 결과 심리계좌가 파악하는 지출과 실제 소비액 사이에 큰 차이가 나고, "도대체 쓴 것도 얼마 없는데 왜 남는 돈이 없지."라는 푸념을 늘상 달고 살아가게 된다.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적자가계부를 흑자로 돌리기 위해서는 수시 생활비가 아니라 고정지출을 구조 조정해야 한다.
연봉 1억 원이면 모자람 없이 쓰고 저축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면 예외 없이 소득이 늘어난 만큼 많이 써야만 하는 구조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남들의 시선이나 생각을 무시하고 17평 아파트로 이사할 정도의 결단을 내려야만 고정지출을 줄일 수 있다. 지금의 지출 구조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막연히 아껴 써서 재무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고정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결단이 필요하다. 사교육비, 주거비, 보험료, 차 유지비 등 다 포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결국 편리함과 욕망에 이끌려 살 것이냐 불편함을 감수하고 실속을 챙길 것이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막연히 쓰는 것도 없는데 돈에 쪼들린다는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면 내 돈이 없어지는 모습이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을 쓰니 돈 쓰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진다. 돈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물건을 주니 심지어 소비가 공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신용카드를 쓰면 자연스럽게 소비가 늘어나는 것이다.
신용카드 세대는 내 돈이 아니라 빚으로 사는 삶이고,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일하는 삶이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닌 소비자이고, 소비를 할 때 올바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물건을 구매하는 첫 번째 조건은 '필요'해서여야만 한다. 그러나 세일과 할인은 구매의 첫 번째 조건을 '필요'에서 '가격'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린다. 구매라는 행위에는 사람들의 이성이 아닌 심리적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세일 때 샀으니 다른 사람은 받지 못한 할인을 받았다, 그래서 거래에 승리했다고 느끼는 만족감은 우리를 더 많이 소비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더 많이 후회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당장 쓸 돈은 있으신가요?
'집값 상승=자산 증식'이 착각이라는 것,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심리계좌에 들어 있는 심리적 자산일 뿐 내 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집값이 오른다 한들 내 마음속 심리계좌만 불렸을 뿐 정작 나에게는 '하우스 푸어'라는 달갑지 않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료가 비싸지면 더불어서 보험사가 가져가는 사업비도 그와 비례해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보험설계사나 보험사라면 고객들에게 어떤 보험을 권유하겠는가? 당연히 사업비가 많이 나오는 만기환급형이지 않을까? 그러나 보험사는 "보장도 받으실 수 있고, 만기에 내신 보험금을 그대로 돌려드려요."라는 말로 우리를 유혹한다. 물론 여기에 만기환급형 보험료가 순수보장형의 두 배라는 점은 항상 빠져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순수보장형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한다. 심리계좌의 손실회피 성향 때문이다. 보험료를 열심히 냈는데 아프지 않아 단 한 번도 보험금을 못 탈 수도 있다. 순수보장형은 이런 경우에 만기 시점에 돈을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다. 열심히 보험료를 냈는데 아무것도 돌려받는 것이 없으니 사람들은 이것을 손해라고 생각하고 가능한 회피하려고 한다
저축성 보험은 가입자가 무조건 손해 보는 저축이다. 10만 원짜리 교육보험에 가입하면 실제 저축되는 돈, 즉 적립보험료는 10만 원보다 적다. 보험사의 사업비와 위험보험료를 제하고 난 나머지 돈만 적립되기 때문이다. 저축성 보험의 사업비 비율은 10~15퍼센트 정도로 10만 원짜리 저축성 보험이라면 한 달에 8만 5000원만 저축하는 것이며 이자도 8만 5000원에 한해서만 붙는다. 그래서 대부분 저축성 보험은 7년 정도가 지나야 겨우 원금에 도달하게 된다. 7년 동안 이자 한 푼 못 받고 저축하는 셈이다.
연금보험, 교육보험 등 모든 저축성 보험이 다 같은 원리로 운영된다. 10년 동안 보험료 냈다고 보험사가 고객들에게 감사하다고 뭔가를 더 얹어주지 않는다. 그냥 내가 낸 돈, 그것도 다가 아니라 사업비를 제하고 난 나머지 돈을 모아 놓고 있다가 만기에 주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커다란 혜택이나 특혜는 숨어 있지 않다. 굳이 장점을 찾자면 장기간 꾸준히 돈을 모았기에 목돈을 쥘 수 있다는 정도다.

당신도 혹시 채무노예 아닌가요?
빚이 있지만 잘 갚고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위험이 닥친다면?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해진다면? 부채는 언젠가 생길 수도 있는 돈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고, 악순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빚으로 하는 투자는 자산 가격이 다시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빚으로 투자하는 경우 자산 가격이 오른다고 해도 반드시 이익을 본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정해 놓은 원칙보다는 주변 상황에 더 휘둘리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벌어야 돈 걱정이 없을까?
가처분소득은 세금이나 이자 같은 금융비용을 제외하고 언제든 자유롭게 소비나 저축에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범위를 좀더 좁혀 자유롭게 저축할 수 있는 돈을 가처분소득이라 규정짓겠다. 소득이 늘지 않더라도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면 결과적으로 돈을 더 버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가처분소득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매월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
어떤 물건들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매월 고정지출을 발생시킨다. 자동차는 소유하는 순간 주유비와 세금이라는 고정지출을, 더 큰 냉장고는 더 많은 전기세를, 5평 넓은 집은 그만큼의 관리비 부담을 선물한다. 뭔가를 새롭게 소유하기 전에 매달 고정지출이 추가로 발생하지는 않을지, 그 지출을 내가 부담할 수 있을지 따져보아야 한다.
"노후준비를 해야 한다, 노후 생활비로 20억 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하고 조바심을 불러일으킨다.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수입의 10퍼센트는 노후준비에 써야 한다고 힘주어 권유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혹시 노후대비용 금융상품 판매를 노린 공포마케팅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어떻게 써야 후회가 없을까?
소비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소비주의는 정서적·사회적 욕구를 쇼핑으로 충족하려 하고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규정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합리적인 소비자는 비슷한 물건이라면 더 싼 것을 선택하고, 세 배 비싼 물건이 있다면 세 배만큼의 효용이 있어야만 그 물건을 산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그 물건이 나에게 주는 효용이나 가치보다는, 그 물건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남들과 비교할수록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더 많이 소비하려면 더 많이 벌어야 하기에 시간과 건강을 희생해야 하고, 그나마 있는 여가 시간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TV 보기로 때운다. 자신이 '일하고→TV 보고→소비하고→더 일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소비를 참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어렵고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자제하면 할수록 오히려 충동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에 무작정 참는 것보다는 당장의 소비욕구를 지금 적절하게 실현하는 것이 소비에 대한 건강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무조건 아끼고 절약하는 것도, 그렇다고 나중 생각은 하지 않고 다 써버리는 것도 모두 옳지 못하다. 물 샐 틈 없는 돈 관리란 '나와 내 가족의 욕구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우선 순위에 맞게 가장 효과적인 비율로 돈을 배분하여 욕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쓸 돈만 모으면 된다
가장 먼저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사람은 가정에서 소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보험은 이 사람에게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가장이 보험가입 1순위가 된다. 어떤 집은 아이들을 위한다며 부모 보험이 아닌아이들 보험만 잔뜩 들어 놓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투자 안 하고 살아도 된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일단 투자를 하면 까먹을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고 주식시장의 오르내림에 나의 하루하루 기분이 좌우된다. 투자를 하겠다고 결정하기 전에 그런 삶이 과연 나에게 행복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돈을 잘 불리는 것은 내 돈을 손해 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한다. 맘 편하게 필요한 돈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투자만큼 화려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행복지수는 훨씬 더 높을 것이다.

돈이 아닌 행복을 관리하라
특히 사람들이 잘 적응하는 것, 즉 쉽게 질려서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소득과 소비다. 월급이 10퍼센트 오르면 처음에는 기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그 감정은 사라진다. 자동차나 TV, 심지어 집을 새로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사람들이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바로 사랑, 우정, 좋은 인간관계, 건강, 행복한 결혼 같은 것이다. 이것들은 쉽게 질리지 않고, 지속적인 만족감을 준다. 그래서 돈을 모으고 불리는 것보다 사람 노릇 제대로 하는 것이 더 행복하기도 하다. 내 용돈을 줄여서라도 부모님 생활비를 보내는 것이, 여행을 포기하고 동생 등록금을 대는 것이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노력 이전에 내가 잘 적응하지 않는 것들, 질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찾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 나와 내 가족이 지속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에 돈을 쓸 수 있고, 결과적으로 돈으로 욕망만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사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질적인 것만을 기준으로 남들과 비교하며 살면, 그 삶에는 주체성이 없고 자신감도 없어진다. 진정한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돈과 사회적 지위를 중요시하는 물질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두통이나 우울증을 호소하는 비율이 더 높다고 한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끊는 것, 그리고 나만의 가치 있는 삶의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고, 많이 쓰고 살면서도 늘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만약 돈을 많이 벌어 미래 불안이 해소된다면 돈 잘 버는 사람들은 미래 불안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이런 사람들을 만나보면 누구 못지 않게 미래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한다.
소득이 높은 사람은 삶의 기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높은 기준을 10년이 아니라 평생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하다. 지금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은퇴하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보니, 미래에 지금 생활 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은 늘 이들을 짓누른다.
'꼭 내 집을 가지지 않더라도 빚 지고는 살지 않겠다. 아이들 영어유치원은 안 보내지만 대학 등록금은 적어도 절반이라도 해주겠다. 나이 들면 부부가 15평 집에서 살겠다. 네 식구뿐이니 차는 중형차만 갖겠다. 매년은 아니지만 10년에 한 번은 해외로 여행을 가겠다. 자녀 결혼 때 집은 못 사줘도 노후병원비는 내 힘으로 마련하겠다. 마흔 살까지는 기타를 꼭 배우겠다.'는 식으로 가족구성원들의 필요 욕구를 구체화하고 관리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만들어진 필요 욕구가 크다면 당연히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소박한 욕구로도 만족스럽게 살 수 있다면 돈벌이 외에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미래 불안은 이렇게 필요한 것을 구체화한 후, 능력의 한도 내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욕구를 선택하면서 해소되는 것이지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심리계좌

이지영 지음
살림Biz 펴냄

2021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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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바

@1b7mgtbsu2je

자녀 교육의 바이블이라고 할까... 여러 책을 읽어봤지만, 이 책은 손꼽을만하다. 내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 최고의 양육법임을 깨닫게 해준다.




서문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여 다 훌륭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근원은 오늘날 교육을 비롯한 사회의 전 분야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인본주의라는 사상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자녀 양육, 어떻게 할까?

자녀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즉 복된 선물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부모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최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본능뿐 아니라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인간은 피동적으로 사랑을 받을 때보다도 사랑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 사람은 행복감에 젖을뿐 아니라 삶이 풍요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아이가 독립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자라도록 하기보다 엄마의 치마폭에 언제까지나 보호하고 싶어하고 자기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자녀가 사랑스러운 나머지 어렵고 힘든 일뿐 아니라 해야 할 일까지도 대신해 주는 부모들이 문제다.

이 시대는 참으로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의 영혼과 삶을 악한 자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양육해야 할 때이다.

이 세대는 존경심과 권위를 상실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겉치레의 존경심과 억압적인 권위는 배격되어야 할 것이지만 마땅히 가져야 할 존경심과 올바른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는 교육을 능가하게 하는 내적인 영향력을 지닌 힘이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특기교육이나 지능개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이에게 어떤 습관을 길러주고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게 해 주며 어떤 가치관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 인생의 참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자녀에게서 바람직하지 못한 면을 발견하고 크게 낙담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일수록 염려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잘못을 고쳐주고 바르게 인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동시에 소망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속적 인본주의에 근거한 인본주의 교육의 문제는 바로 이처럼 인간이 가진 능력을 최대로 계발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할 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 지적 능력 발달과 아이가 느끼는 감정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지는 못한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행동이라면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부모의 가치관을 자녀에게 강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비롯한 일체의 가치를 자녀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인본주의란 본래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한 것인데 사회와 인간의 사고가 세속화되면서 하나님을 배격하고 모든 일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이 되었다.

종래의 교육이 억압과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율과 자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위험한 일이다. 인간은 이끌어줌이 없이 자율에만 맡기어도 될 만큼 선하지 않으며, 자율 없이 이끌고 지시하는 것에만 의존하는 기계적이고 피동적인 존재가 되어서도 안된다.





2/ 그리스도인의 자녀 교육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자녀의 생명과 생애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 즉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양육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또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관리하는 자이므로 주인의 소유에 대하여 함부로 취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함부로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자녀를 이용해서도 안되고 부당한 짐을 지워서도 안된다.

유대인들은 세계적으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교육에 있어서 도덕, 즉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첫 번째 목적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흔히 가정교육은 어머니의 책임이고 지식 교육은 학교의 책임이며 신앙교육은 교회가 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발달해 가는 학문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학교나 책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신앙은 삶 자체이기 때문에 자녀들과 삶을 같이 하는 부모를 통해 이루어질 때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자녀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

자녀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잠언 1장 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며 이를 멸시하는 자를 가리켜 미련하다고 한다. 다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외해야 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세 번째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





3/ 사랑을 느끼게 하라

에베소서 6장 4절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삶의 모범과 인내하고 관용하는 사랑이라고 요약될 것이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마음과 삶을 읽을 수 있는 이성과 감성이 있으므로 그것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가끔 “엄마는 너를 사랑해.”라고 속삭여 주거나 “아빠에게 가장 귀중한 보물은 바로 너희들이다.”라고 말해준다면 자녀들이 더없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의 행복감이 물질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이 느끼는 진정한 행복감은 욕구 만족으로 인해 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느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희생적인 사랑이란 자녀의 복되고 보람 있는 사람을 위해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지 부모의 야심이나 욕구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이 부모 자신의 일로 지나치게 바쁠 때 그들이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비록 자기들과 충분한 시간을 같이 있어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모가 자기들의 교육과 가정을 위해 애쓰는 것을 아는 자녀들은 결코 부모의 관심과 사랑의 부족으로 인한 공허감을 느끼지 않는다.

요즘에는 생일이라고 하여 비싼 선물을 받는 날로 오해하며 자라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보다는 아이의 생일을 온 가족이 함께 축하해 주고 그 아이가 태어난 것이 부모나 다른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축복이 되었는지를 말해준다면 자녀들은 가족의 사랑을 느끼며 행복해할 것이다.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책망하고 훈계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때로 벌을 주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부모가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고 훈계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을 인정해 주고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주고 격려해 주는 것은 아이가 자신의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힘을 길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자아개념을 심어주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흠뻑 느끼게 하는 일이다.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을 통해 자신이 귀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혹 아이가 칭찬받을 만한 어떤 능력이나 소질을 타고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생을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그들이 귀중한 존재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이며 부모에게 있어서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가정의 분위기는 자녀들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행복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체로 밝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다. 가정은 자라나는 자녀들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부모다.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은 첫째 부모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다. 부모의 불평 소리는 자녀에게 불평하는 습관을 만들어 준다. 다음으로 부부 사이의 관계다. 부부 사이의 관계가 원만하면 자녀들은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게 된다. 셋째로는 형제애이다. 형제애를 해치는데 으뜸이 되는 것이 바로 부모의 편애이다. 넷째로 가족들이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다.





4/ 격노케 하지 말라

부모에게 분노하는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비뚤게 자라거나 반항하는 이이들 뒤에는 반드시 그들을 분노하게 한 부모가 있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잔소리와 꾸중을 많이 들을 때 낙심한다. 자녀들은 소리 지르는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 적당한 시기에 한 가지만 지적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지적할 때 주의할 점은 잘못한 행동 그 자체를 두고 나무라도록 해야지 인격까지 송두리째 비난하면 안 된다. 비난과 징계, 잔소리와 훈계는 구분되어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거나 꾸중할 때는 간단하면서도 엄하게 말하고 아이가 알아들었다고 생각되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이들은 부모가 간섭하거나 의심할 때보다 자기를 신뢰해 줄 때 오히려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으며 동시에 자기를 신뢰해 주는 부모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아이들은 편애를 하거나 남과 불리하게 비교할 때 분노한다. 상처와 낙심만이 남을 뿐이다.

아이들 싸움에 끼어들었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둘 사이에 잘잘못을 가리기 위한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아이에게 똑같이 벌을 주도록 해야 한다. 누구의 잘못으로 싸움이 일어났든지 간에 서로의 인격을 모독하는 언어를 사용하거나 폭력을 사용한 싸움 자체는 잘못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벌을 준 후 “왜 벌섰는지 이유를 아니?”라는 질문으로 아이의 반성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희들 왜 싸웠니?”하는 질문 등으로 다시 싸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급한 부모들은 자녀가 하리라고 예상되는 말을 대신해 준다. 설혹 그 말이 자녀의 마음을 꼭 그대로 나타내주는 말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자신이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저지당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 표현이 서투르더라도 자기가 표현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경청해 주는 부모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평소에 부모들이 자녀들의 말을 경청하며 자녀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들도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자녀들을 훈계하고 다스리는 방법으로 벌을 주거나 매를 들 때가 있는데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매를 대는 것은 극히 신중해야 한다. 성경에도 채찍은 아이에게 효과가 있다고 가르치는데 유대인 사회에서 만 13세에 성인식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만 13세 이후에는 아이들에게 매를 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꾸지람하는 것보다 잘한 일이 있을 때 칭찬해 주는 방법을 통해서 자녀들의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효과적인 대화법은 두 가지 기본적인 원리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원리는 관심 있게 들어주는 태도이다. 둘째 원리는 화를 내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5/ 마땅히 할 일을 가르치라

아이에게 지나치게 좋고 화려한 옷을 해 주는 것은 부모의 절제되지 못한 소비 성향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자녀들이 원하는 것이 곧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엄마들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하고 아이가 그 말을 들은 척 만 척해도 그대로 두는 것을 본다. “XX야, 그런 짓을 하면 못쓴다.” 하고 말하고는 실제로는 아이를 그대로 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옳지 않은 일을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으니 그대로 해도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아이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아이의 책임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이다.

벌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올바르고 선한 습관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훈련하는 것이다. 훈련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이 자녀들의 삶을 위하여 선하게 작용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녀들이 분명히 규칙을 어기거나 부모의 말을 거역했는데도 무심코 지나쳐 버린다면 그들은 규칙이나 부모의 말,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부모의 단호한 태도는 아이를 그릇된 길에서 구하는 최선의 예방책이 될 것이다.

훈계와 사랑은 상반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병행되어야 할 동반자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예부터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집의 자녀를 후레자식이라고 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엄한 권위 밑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배운 데 없이 제멋대로 자라서 버릇이 없는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의 가정교육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부재의 교육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흔히 아버지가 직장 일로 인해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가정에서 자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된다. 자녀들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면 비록 아버지가 자녀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더라도 아버지 부재의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아버지의 권위는 결국 부모의 권위를 말한다. 부부는 자녀들 앞에서 서로 상대방의 권위를 세워 줌으로써 자녀를 바로 교육할 수 있다.

왜 아버지의 권위가 그렇게 중요할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자녀들 곁에서 자녀들을 바로잡아 주고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지 자녀로 하여금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매를 사용하는 중요한 원칙은 부모와 아이가 다 매를 귀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매를 통해서 자녀의 올바른 삶을 귀중히 여기는 부모의 마음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징계는 반드시 사랑을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아이의 장점을 인정해 주고 칭찬거리가 있으면 자주 칭찬해 주고 아이의 소질을 무시한 것이 없는지 살펴서 격려해 주어야 한다. 아이가 남의 물건을 가져왔을 때는 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돌려주고 오너라.”라고 말한 다음 돌려주고 온 것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를 다그치는 것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나 훈시가 아니다. 아이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느낌으로써 부모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되면 부모가 싫어하는 행동은 차차 없어질 것이다.

예로부터 삼 대 부자가 없다는 말은 결국 자녀에게 돈을 관리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매일 용돈을 주는 방법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적절한 계기에 일주일 혹은 한 달 단위의 용돈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한 달 단위의 용돈을 줄 때는 군것질 혹은 작은 장난감들을 살 수 있는 돈과 간단한 학용품을 사야 할 돈을 구분 지어 주는 것이 좋다. 힘들더라도 용돈 사용은 반드시 훈련해야 할 부분이다.





6/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있는가?’, 나는 자녀에게 가르치는 바를 스스로도 모범적으로 행하고 있는가?’ 혹은 ‘나의 삶은 나의 신앙고백과 일치하는가?’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며 예비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스스로의 삶이 성숙될 뿐 아니라 사려 깊은 부모가 될 수 있다.

성교육에 대해서 더 중요시해야 할 부분은 성의 도덕성 문제와 책임감에 대한 문제이다.

지능 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자신의 욕심을 고집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를 사랑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공부는 왜 해야 하나요?" 하고 질문하는 아이에게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남보다 잘 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을 사용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을 잘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좋은 재능을 주시고, 그 재능을 잘 개발해서 이웃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훌륭하게 사는 사람이 되길 기대하고 계시는데 네가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않고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으면 될까?" 하는 내용을 담은 대답을 해 주면 좋을 것이다.





7/ 자녀 양육의 모범

우리에게는 요게벳과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귀중히 여기도록 가르치는 어머니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결코 믿음의 반열에서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맺음말

앞서 말한 모든 원리들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 자신의 삶의 모범이다. 자녀 양육에 관하여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 부모라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할 만한 신앙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 지식은 무용지물인 셈이다.

항상 말씀에 비추어 부모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자라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로 우리 자녀들을 자라나게 하실 것이다.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부모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는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완벽한 부모를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그분의 세심한 은혜를 구하는 부모가 되기를 원하실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요?

박진경 지음
도서출CUP(씨유피) 펴냄

2021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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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b7mgtbsu2je

또 다른 상식 모음집. 그마저도 인간의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근거 없는 내용들도 많다. 이런 것은 과학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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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얼마나 클까?
천문학astronomy은 지구 밖 천체, 즉 태양과 달, 태양계 내의 행성, 태양계가 속한 은하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편 우주학cosmology은 우주 전체,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물질, 에너지와 그 시공간의 관계를 연구한다.
1916년에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에 근거하여, 먼 곳에서 전해 오는 별빛이 태양 주변을 통과할 때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굴절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계산해 냈다. 그리고 3년 후, 영국의 천문학자가 개기 일식을 이용하여 아인슈타인 이론의 결과를 실제로 관측하고 검증하였다.
우주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항성(별)이다. 태양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이다. 항성은 대체로 수소와 헬륨 덩어리인데, 수소가 핵융합반응을 통해 헬륨으로 바뀌면서 에너지로 전환되어 열과 빛이 발생한다.
항성 외에 행성도 있다. 간단히 말해 행성이란 항성 주위를 공전하며, 스스로 빛과 열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천체다. 태양계에서 항성은 태양이고, 지구를 제외한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5개 행성은 고대에 일찍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8~19세기에 와서 천문학자들이 추가로 천왕성과 해왕성을 발견했다. 그런데 2006년에 천문학계에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1930년에 발견되어 태양계의 9번째 행성으로 불리던 명왕성이 행성 명단에서 제명된 것이다. 이 사건은 천문학이나 기타 과학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발견이 이뤄져 오래된 관점과 견해를 바꾸곤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2006년에 얼마간의 토론과 논쟁을 거쳐 국제천문연맹에서는 행성의 세 가지 요건을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돌아야 하고 둘째, 질량이 충분해서 역시 충분한 중력과 인력을 보유함으로써 둥근 공 모양을 유지해야 하며 셋째, 공전 궤도 안에서 다른 천체가 가까이 함께 공전해서는 안 된다.
명왕성은 세 번째 요건을 갖추지 못해 제명당했다. 이 밖에 행성 주위를 도는 천체는 위성이라고 한다. 달은 지구의 위성이며 화성은 두 개의 위성을 갖고 있고 목성과 토성 등도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위성을 갖고 있다.
우주의 별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중력의 영향을 받아 각기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 무리들을 은하라고 부른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는 지름이 약 1018킬로미터이며 그 안에 약 2천억 개의 항성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크레이드 방정식
태양과 비슷한 항성 중 10억~20억 개에 행성이 딸려 있는 셈이다. 최소 10억~20억 개의 항성이 거느린 행성 가운데 생명이 있을 만한 환경을 가진 것은 또 얼마나 될까? 지구에서 우리의 경험에 비춰 보면, 물은 꼭 필요하다. 물은 용매 역할을 함으로써 분자들이 결합하여 유기화합물을 이루게 하고 더 나아가 단백질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행성과 항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광분해 작용 때문에 물 분자가 분해되어 사라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보다 5퍼센트 이상 더 가까우면 안 된다. 반대로 항성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도 물이 얼어 버린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보다 15퍼센트 이상 더 멀면 안 된다고 한다. 물 이외에 탄소, 산소, 질소도 필요하다. 탄소는 수소, 산소, 질소와 결합하여 유기화합물을 만들며, 활성 원소인 산소는 다른 원소와 결합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질소는 단백질의 기본 원소다.
천문학자 황서우수는 195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지구와 약 10광년 거리인 황소자리 타우와 에리다누스자리 엡실론이 생명 발생과 유지의 조건을 갖췄다고 지적했다. 두 별의 스펙트럼 분석에서 탄소와 산소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 황과 규소가 탄소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으며 철, 나트륨, 칼륨은 모두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원소다. 과학자들은 10억~20억 개의 행성 중 약 10퍼센트가 생명이 살기에 적합할 것이라고 추산한다. 따라서 1억~2억 개의 행성에 외계 문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그렇더라도 생명과 지적 생명체가 같은 것은 아니다. 우선 지적 능력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해하고 학습하고 창조하고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능력을 전부 지적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구에서 3억~4억 년 전 단세포 미생물로부터 시작된 진화 과정을 토대로, 많은 과학자는 지적 능력의 발전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진화와 유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생명이 살 만한 환경을 가진 행성 중에서 지적 생명체가 있을 만한 곳은 얼마나 될까? 과학자들은 1퍼센트 정도로 추산한다.
우리 은하의 2천억~3천억 개의 별 가운데 태양과 비슷한 별은 얼마나 될까? 그중 행성을 가진 별은 얼마나 될까? 더 나아가 생명이 살 만한 환경을 가진 별과 지적 생명체가 있는 별은 얼마나 될 것이며, 그중에서도 우리와 교신할 만한 능력과 의지를 가진 별은, 그중에서도 우리와 수명이 맞아떨어지는 별은 얼마나 될까? 드레이크 방정식은 이 질문들에 대한 추정값을 백분율로 전부 곱한 것으로서, 그 결과로 나온 값이 곧 우리와 교신할 가능성이 있는 외계 문명의 숫자다. 드레이크 방정식의 모든 백분율은 전부 추산일 뿐이므로, 최종 결과는 추산마다 크게 다르다. 낮게는 한 자리 숫자에서 높게는 5천, 1만, 심지어 더 클 때도 있다.
어쨌든 추산 결과가 1보다 크면 희망이 있는 셈이다.


빅뱅 이론
그렇다면 우주의 모형은 어떨까? 우주에는 시작이 있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20세기 과학사의 가장 중요한 성과가 현재 모두가 그 정확성을 인정하는 우주 모형, 즉 ‘빅뱅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빅뱅Big Bang이라는 단어는 우주가 시작될 때 실제로 어떤 폭발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뱅’Bang이라는 단어에는 무언가 급작스럽게 발생한다는 의미가 있다.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시작점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7억 년 전, 우주는 수조 도(태양 중심부 온도의 10만 배)에 달하는 고온과 고압에 에너지 밀도도 대단히 큰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쿼크와 글루온 등을 포함한 그 입자들은 전자, 광자 같은 다른 입자들과 고속으로 충돌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입자들이 탄생하면서, 우주는 바깥으로 팽창하고 온도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현상이 다 영에서 1천만분의 1초나 1억분의 1초 사이에 일어나고 변화했다. 겨우 몇 분 후 온도는 1천 배나 떨어져서 약 10억 도가 되었다. 그때 우주의 입자들은 대부분 양성자였다. 아마도 많은 독자가 알겠지만 수소 원자의 원자핵은 하나의 양성자다. 수십만 년 후, 하나의 양성자와 하나의 전자가 결합하여 수소 원자를 이루었다. 수소 원자핵 2개가 합쳐져 헬륨 원자핵이 되기도 했다. 우주는 이렇게 점차 변화해 갔다.
미국 하버드 천문대의 헨리에타 레빗이 오랜 시간을 들여 많은 세페이드 변광성들의 변광 주기를 살핀 끝에, 대담하면서도 결국 사실로 증명된 가설을 수립했다. 그녀는 지구와의 거리가 대체로 다 같은 세페이드 변광성 25개를 찾았지만, 단지 그 별들과 지구의 거리가 거의 같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 그 거리가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별들과 지구의 거리는 거의 같기 때문에 그 별들의 빛이 지구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보는 그 별들의 겉보기 밝기는 실제 밝기가 동일한 거리를 거치며 감소된 상태였다. 따라서 우리가 관측하는 겉보기 밝기들 사이의 비는 실제 밝기들 사이의 비와 같다. 바꿔 말해 우리가 지구에서 관측하는 그 별들의 밝기는 그 별들의 실제 밝기와 비례한다.
헨리에타 레빗이 25개 세페이드 변광성을 관찰해 얻은 결론은 ‘세페이드 변광성의 실제 밝기는 변광 주기와 비례한다.’였다. 즉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가 길수록 실제 밝기가 높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대단히 유용하다. 왜냐하면 임의의 두 세페이드 변광성을 놓고 그 밝기와 변광 주기를 관찰하면 변광 주기의 비로부터 실제 밝기의 비를 계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관측한 두 별의 겉보기 밝기의 비도 알고 있으므로, 두 비를 이용해 두 별과 지구 사이의 거리의 비를 산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두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의 비가 3:1이면, 실제 밝기의 비도 3:1이다. 두 별의 겉보기 밝기의 비도 3:1이라면, 두 별과 지구 간 거리의 비율은 1:1이다. 다시 말해 이 두 별과 지구의 거리는 똑같다.


스티븐 호킹과 블랙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으로서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성을 표현하는 E=mc2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방정식에 의하면, “1킬로그램의 질량은 9×1016줄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
따라서 E=mc2은 한 단위의 질량이 c2처럼 많은 단위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아주 작은 질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로군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c2은 아주 큰 숫자이기 때문이다. 1킬로그램의 물을 에너지로 전환하면 약 2조 칼로리다. 이는 휘발유 수천만 리터를 태운 에너지와 맞먹는다. 이것이 바로 원자폭탄과 핵발전소의 기본 원리다.
어떤 물체가 정지해 있을 때, 그 물체에는 고유의 질량이 있다. 그런데 물체가 어떤 속도로 이동할 때는 정지해 있을 때의 질량 외에 운동 에너지를 갖게 되며, 운동 에너지는 질량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물체가 이동할 때는 정지해 있을 때보다 질량이 커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량이 무한대인 물체의 속도를 높일 만한 힘이나 에너지가 없다. 따라서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어떤 물체도 빛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아르키메데스의 깨달음
금의 비중은 1세제곱센티미터당 19.3그램인 데 비해 은의 비중은 1세제곱센티미터당 10.5그램, 구리의 비중은 1세제곱센티미터당 8.9그램이다. 따라서 만일 금으로 만든 왕관과 은으로 만든 왕관이 있는데 둘 다 무게가 2킬로그램이라면 금으로 만든 왕관이 은으로 만든 왕관보다 부피가 더 적다. 금 2킬로그램의 부피는 104세제곱센티미터이고 은 2킬로그램의 부피는 190세제곱센티미터다.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의 부피만 계산한다면 장인이 금을 훔쳤는지 훔치지 않았는지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서 목욕을 할 때 어떤 물체든 물속에 들어갔을 때 물체가 밀어낸 물의 양이 그 물체의 부피임을 발견했는데, 사실 누구나 고등학교 시절에 들어 보았음 직한 아르키메데스 원리에서 중요한 뒷부분은 물체를 물 또는 다른 액체에 넣었을 때 물은 물체를 위로 밀어 올리는 부력을 내며 그 부력이 물체가 밀어내는 물의 무게와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2킬로그램인 왕관의 부피는 104세제곱센티미터여서 물에 넣으면 104세제곱센티미터의 물을 밀어내는데, 물의 비중은 1이므로 104세제곱센티미터 물의 무게는 104그램이고, 부력은 104그램이다. 따라서 물에 넣은 왕관의 무게를 저울로 재면, 그 결과는 2,000−104=1,896그램이다.


과학 속 우연
미생물은 모양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크기도 몇 미크론(1밀리미터의 1/1000)부터 수십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까지 천차만별이다. 미생물의 종류는 보통 세균, 균류(곰팡이), 바이러스로 나뉜다. 지구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미생물이 산다. 전체 숫자는 대략 1030이나 된다. 이처럼 많은 미생물이 지구 생태계의 균형, 발효 식품이나 양조 식품 제조, 오염수 처리 등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인간의 몸속에도 미생물이 많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인간과 조화롭게 공존한다. 특히 소화기 계통에서 소화 기능을 돕는다. 그러나 외부에서 신체로 침투하는 여러 미생물은 우리가 질병에 걸리는 원인이 되곤 한다.
오랫동안 인류는 질병이 몸속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150년 전에야 비로소 질병과 미생물의 관련성을 알아냈다. 질병 중에서도 폐결핵, 파상풍,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등은 세균의 침입으로 발병하고, 감기, 천연두, 에이즈 등의 원인은 바이러스이며, 일부 호흡기와 피부 질환은 균류 때문이다.
세균과 바이러스의 차이점은 바이러스가 세균보다 열 배에서 백 배 더 작다는 데 있다. 보통 의학에서 사용하는 여과기는 세균은 걸러 낼 수 있지만 바이러스는 너무 작아서 걸러 내지 못한다. 그래서 바이러스는 ‘여과성 바이러스’라고도 불린다. 이 밖에도 바이러스는 홀로 생존하지 못하고 반드시 다른 세포에 의지해 성장하고 번식한다. 그래서 미생물학에서는 바이러스를 미생물로 분류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독립적으로 성장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체 세포에 침투한 바이러스를 직접 약물을 써서 죽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면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세포도 죽기 십상인 탓이다.
면역이란 침입한 미생물에 대한 저항을 뜻하며, 면역 기능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나뉜다. 선천적 면역 기능은 첫 번째 방어선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갖춰진 능력이자 일반적인 반응이다. 어떤 특정 미생물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피부와 콧구멍의 털, 호흡기와 식도의 점막은 몸속으로 침입하려는 미생물을 성벽처럼 막아서고, 눈물과 기침과 콧물로 미생물을 밖으로 몰아낸다. 몸에서 열이 나는 것도 몸속의 백혈구를 비롯한 물질들이 미생물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런 것이 인체의 선천적 면역 기능이다. 선천적 면역 기능은 기억력이 없다. 바꿔 말해, 미생물이 침입할 때마다 인체는 똑같은 반응을 되풀이한다.
후천적 면역 기능은 척추동물에게만 있는 것으로, 태어난 뒤에 형성된 기능이다(모체로부터 태아에게 전달된 면역 기능도 포함된다). 후천적 면역 기능은 특정 미생물을 판별하고 방어하는 능력이 있고 기억력도 있다. 인체가 예전에 접했던 세균과 바이러스에 다시 노출되었을 때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백신의 기본 개념이기도 하다. 2천 년 전에 벌써 그리스인은 어떤 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은 그 병에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물론 그때는 그 이유까지 알지는 못했다. 사실 그것은 병에 걸렸던 사람의 몸에 그 병에 대한 후천적 면역 기능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용되는 백신은 미량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경구용 백신이나 주사를 통해 인체에 주입하여 미리 경미한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인체에 면역 기능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천연두가 없어진 것은 18세기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의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제너가 39세였을 때, 목장에서 소젖을 짜는 하녀 하나가 자기는 우두에 걸린 적이 있어서 천연두에 걸릴 리가 없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우두가 어떤 바이러스에 의해 생기는데 그 바이러스가 소의 피부에 수포를 만들기도 하고 소젖을 짜던 하녀의 몸에 침투해 우두를 앓게 함으로써 천연두에 대한 면역 기능을 형성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두 바이러스를 천연두 예방과 치료의 백신으로 삼은 제너의 발견은 백신 기술의 장을 열고 기초를 확립했다. ‘백신 접종’을 뜻하는 영어 단어 ‘vaccination’은 라틴어의 기원을 따지면 ‘소의 작은 수포’라는 뜻이다. 현재 이 단어는 모든 종류의 백신 접종을 폭넓게 가리킨다.
인체에 미생물이 침입했을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대응 방법이 있다. 하나는 약물로 직접 미생물을 제거하거나 성장을 억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물로 인체의 면역 기능을 촉발하는 것이다. 후자는 제너가 천연두를 예방하고 치료한 사례에서 시작되었다. 제너의 천연두 백신 발견은 백신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기초를 다졌다. 한편 전자는 푸른곰팡이를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에게 공을 돌려야 한다. 푸른곰팡이의 약명은 페니실린이며, 페니실린은 이후 항생제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항생제란 세균을 죽이거나 성장을 억제하는 약물이다. 일찍이 2,400년 전에 중국인은 곰팡이가 핀 두부에 소염 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집트와 그리스에도 유사한 치료 방법이 있었다. 인체에 외부 세균이 침입했을 때 약으로 제거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했듯이 바이러스가 몸에 침입하여 인체 세포에 기생한다면 항생제로는 그것을 제거하지 못한다.
의사였던 플레밍은 어느 날 감기에 걸렸을 때 실험실에서 콧물을 이용해 세균을 배양했다. 그런데 잘못해서 그의 눈물이 세균을 배양하던 접시에 떨어졌다. 이튿날 그는 눈물에 젖은 배양 접시 속 세균들이 다 죽은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눈물과 침에 인체에는 무해하면서도 살균 기능이 있는 효소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결과를 증명하기 위해 플레밍과 실험실 조수는 몇 주 동안 계속 레몬 껍질로 눈을 비벼 가며 실험용 눈물을 조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효소의 살균 능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다만 이 우연은 나중에 플레밍이 푸른곰팡이를 발견하는 선례가 되었다.
몇 년 뒤, 플레밍은 실험실에서 인체에 염증을 일으키는 포도상 구균을 배양하다가 배양 접시의 뚜껑을 닫는 것을 까먹었다. 그 바람에 곰팡이(곰팡이가 핀 과일이나 빵에서 날아왔을 것이다) 한 점이 접시에 떨어졌는데, 나중에 보니 곰팡이 근처의 세균들이 완전히 박멸된 게 아닌가. 눈물에서 살균 기능을 가진 효소를 발견했던 경험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곰팡이에도 그런 기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플레밍이 발견한 곰팡이는 푸른곰팡이의 일종으로서 포도상 구균을 죽이는 기능이 있었다. 이 사례로 인해 ‘곰팡이의 살균 기능’이라는 의학 연구의 문이 활짝 열렸다.
항생제는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을 뿐 아니라 농업, 목축업, 식품산업에서도 폭넓게 응용된다.
제너가 백신을, 플레밍이 항생제를 이용한 세균 퇴치 기술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 덕분이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실로 오묘한 사건들이다.


꽃가루, 염료, 항생제
지금 우리는 당뇨병의 원인이 혈액 속 당 수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건강 검진을 받을 때 공복 상태에서 정상 혈당은 100시시의 혈액에 당이 70~100밀리그램 함유되어 있는 수준이다.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은 소화를 거쳐 당으로 변한 뒤 혈액으로 보내지는데, 인체는 혈당이 높다고 감지하면 췌장(이자)에서 인슐린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인슐린의 기능은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간과 근육에 축적하는 것이다. 만약 췌장 세포가 손상을 입어 인슐린 분비량이 대폭 줄거나, 나이가 많아지면서 인체에 인슐린에 대한 저항성이 생긴다면, 일부 혈당이 글리코겐으로 변하지 않고 혈액에 계속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직접적인 후유증이 생긴다. 첫째, 글리코겐은 인체의 주요 에너지원인데, 만일 간과 근육에 글리코겐이 부족해지면 에너지가 필요할 때 대신 지방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효율이 낮고 반응도 늦어서, 당뇨병 환자가 체력이 떨어지고 쉽게 피곤해지는 원인이 된다. 둘째, 혈당이 정상 수치를 넘어서면 각양각색의 문제가 나타나는데, 무엇보다도 혈당이 증가하면 오줌 속 당도 증가하기 때문에 인체는 신장에서 더 많은 물을 분비해 오줌 속 당을 희석하려 한다. 이것이 당뇨병 환자가 자주 소변을 보고 갈증을 느끼는 원인이다. 아울러 지나친 칼로리 소모로 인해 환자는 늘 허기를 느끼고, 심지어 체중이 감소하며, 오랜 시간이 지나면 신장 기능이 나빠진다. 이 밖에도 높은 혈당 수치는 혈관이 굳거나 좁아지고 막히는 현상을 초래하여 심장과 순환기에 문제를 가져오고, 망막 혈관을 손상시켜 시력에 영향을 주다가 결국 실명에 이르게 한다. 백혈구 기능에도 영향을 끼쳐 염증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리는데, 이는 당뇨병 환자가 한번 상처를 입으면 쉽게 낫지 않는 원인이 된다.
사람들이 당뇨병 환자의 오줌에 당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1천 년 전의 일이지만, 당뇨병과 췌장의 기능을 연결시킨 것은 100년 전의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1889년, 췌장이 소화 기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던 두 독일 과학자가 개에게서 췌장을 제거했다. 그리고 며칠 뒤, 실험실 조교가 그 개의 오줌 근처에 파리가 들끓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곧 그 오줌을 분석하여 당 함량이 매우 높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췌장에 혈당 조절 기능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눈은 말을 한다
어느 두 일본인 학자는 인간과 오랑우탄, 원숭이의 눈을 비교하여 인간의 공막만 흰색이고 바깥에 노출된 면적도 가장 넓다는 것을 알아냈다. 눈동자와 공막의 색깔이 비슷하면 다른 사람이 눈동자의 위치를 알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눈빛의 방향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포식 동물의 경우, 그것은 먹잇감을 사냥하는 동안 자신을 숨기는 데 도움이 된다. 반면 인간은 눈동자와 공막의 구분이 확실하여, 다른 사람이 시선의 방향을 읽도록 도움으로써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아이 콘택트는 시선의 방향뿐 아니라 시선의 고정과 이동까지 포함하여 눈의 접촉으로 뇌의 접촉까지 이끌어 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눈은 영혼의 창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지 시적이고 철학적인 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의학과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뇌는 시선의 접촉을 통해 상대방의 정서와 동기를, 즉 상대방이 기쁜지 슬픈지, 상대방이 성실한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이런 상호 작용의 메커니즘은 대단히 복잡하긴 하지만 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비효과
세상의 많은 일이 아주 작은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흔히 운이 좋은 사람은 은인과 귀인을 만나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이때 은인과 귀인의 정의는 무엇일까? 오래전에 어떤 사람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을 하다가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그는 화장실에 가려 했지만 주머니에 동전 한 닢조차 없었다. 그곳의 화장실은 동전을 넣어야 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 동전을 빌려 막 들어가려는데, 앞에서 어떤 사람이 용무를 마치고 화장실 문을 닫지 않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공짜로 화장실을 쓸 수 있는 데다가 동전까지 굳은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슬롯머신에 그 동전을 넣었다가 놀랍게도 잭팟을 터뜨렸다. 그 후에는 그 돈을 밑천으로 장사를 벌여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훗날 이 이야기를 비서에게 자주 들려주면서 이야기를 마친 뒤에는 한결같이 “그때 나를 도와준 사람을 찾고 싶네. 무일푼 신세였던 내게 이런 날이 오게 해 줬으니 말이야. 정말 감사를 표하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그 사람을 찾는담?”이라고 말했다. 비서는 동전을 준 사람이 친한 친구가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찾는 사람은 그 친구가 아니라 까먹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은인은 명확하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화장실에 갈 동전을 준 친구 같은 사람이다. 귀인은 특별히 도움을 주려는 마음도 없었는데, 심지어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 주는 사람이다. 이 이야기에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바로 귀인이다. 작디작은 나비 한 마리, 꽃 한 다발, 길가에서 축구를 하는 꼬마, 자기 나라 말밖에 못하는 외국 관광객 등은 모두 우리의 귀인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폭파범과 재갈량
“복은 겹쳐서 오지 않고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에 따르면,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10분의 1이라면 좋은 일 두 가지가 연이어 일어날 가능성은 10분의 1 곱하기 10분의 1, 즉 100분의 1이다. 그러나 이미 좋은 일이 일어난 다음 다른 좋은 일이 또 일어날 가능성은 역시 10분의 1이다.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10분의 1이면 나쁜 일 두 가지가 연이어 일어날 가능성은 100분의 1이지만, 나쁜 일이 이미 일어난 후에 다른 나쁜 일이 또 일어날 가능성은 역시 10분의 1이다. 그런데 왜 복과 화,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서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일까?
쉽게 말하면 이것은 심리가 수학을 이긴 것이다. 좋은 일이 또 일어나거나 나쁜 일이 또 일어날 확률은 앞에 발생했던 좋은 일이나 나쁜 일로 인한 심리의 영향을 받는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우쭐하는 마음에 해이해져 노력을 게을리할 수도 있다. 아니면 탐욕스러워져서 더 많은 이익에 눈독을 들이다가 오히려 두 번째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낮출 수도 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분노하고 실망하고 긴장하고 좌절하고 부주의해져 두 번째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뜻밖의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또 다른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


호랑이와 마주친다면
스트레스란 무엇일까? 먼저 생리학의 항상성이라는 개념을 알아보자. 인간과 동물의 체내에는 정상적이거나 이상적인 생리 지수들이 있다. 체온, 체내 수분, 혈당 등이다. 항상성이란 바로 그런 지수들을 정상 범위 안에서 유지시키는 메커니즘이다. 관련된 몇 가지 기본 개념을 검토해 보자.
우선, 일부 지수는 정상 범위가 비교적 좁다. 예를 들어 우리의 정상 체온은 섭씨 37도이며 아래위로 1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 일부 지수는 정상 범위가 비교적 넓다. 혈당 같은 경우, 정상 범위는 혈액 100시시당 당이 70〜100밀리그램이다(식사 직후 혈당이 140밀리그램 이하까지 상승하는 것도 정상이다). 쉽게 상상하기 힘들 텐데, 우리 몸속에는 혈액이 약 5리터밖에 없으므로 혈당은 5그램에 불과하다. 우리가 커피를 마실 때 넣는 막대 포장 설탕의 분량 정도다.
신체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조작을 통해 지수 조절이라는 목적을 달성한다. 인체의 체온 조절을 예로 들면, 바깥 온도가 높을 때 우리는 땀을 흘림으로써 증발을 통해 체온을 떨어뜨린다. 동시에 피부 표면의 털은 옆으로 누워서 피부 근처 공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해 열 발산의 목적을 달성한다. 반면 바깥 온도가 낮을 때는 피부의 털이 직립하여 열 발산을 막는 보호벽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추울 때 소름이 돋는 이유다. 소름이 바로 피부의 털을 직립시키는 기제인 것이다. 또한 바깥 온도가 높을 때는 모세 혈관이 확장되어 비교적 많은 피가 피부를 돌며 열을 발산하지만, 바깥 온도가 낮을 때는 모세 혈관이 수축하여 피부를 도는 혈액량을 줄임으로써 열 손실을 줄인다. 날씨가 추울 때 피부가 창백해지고 손발이 마비된 것처럼 느낌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두 번째 예는 혈당의 조절이다. 혈당의 정상 범위는 혈액 100시시당 당 70〜100밀리그램인데, 혈당이 너무 낮으면 현기증, 피로, 무력증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혈당이 너무 높으면 당뇨병에 걸려 신장, 눈, 신경에 해를 끼친다. 혈당이 너무 낮을 때 췌장은 글루카곤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여 간에 있는 글리코겐을 당으로 바꿔 혈액으로 보낸다. 반대로 혈당이 너무 높을 때 췌장은 또 다른 호르몬인 인슐린을 분비함으로써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간에 축적한다.
이제 “스트레스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스트레스란 체내의 항상성을 교란하는 모든 외적 요소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자동차 사고는 급작스러운 통제 불능의 충격이고, 장기 야근은 생리적인 충격이며, 걱정과 긴장은 심리적인 충격이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체내 항상성에 영향을 주어 몸이 스트레스에 반응하게 만든다. 그 반응에는 몸에 축적된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가령 우리가 호랑이에게 쫓긴다면 우리는 더 빨리 달려야 하는 동시에 아주 절박하지 않은 기능은 잠시 늦춘다. 위장의 소화 기능, 인체 조직의 성장과 복원 기능 등이다. 그러면서 고통에 둔감해지기도 하고(전쟁터의 병사들은 부상을 당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곤 한다) 감각과 인지 능력이 좋아지기도 한다(아주 작은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리거나 머리가 갑자기 영민하게 돌아가는 것 등이다).
이처럼 생리적인 충격은 인체의 항상성을 깨뜨려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 반응을 유발하게 마련이지만, 심리적인 충격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발생할 리 없는 사건에서 기인하는데 어째서 인체의 항상성을 교란하고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 앞에서 말한 대로 인체의 항상성 조절은 뇌가 주관한다. 뇌는 예상하고 기대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더라도 그것 때문에 인체의 항상성 조절 기능이 작동된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가 생기면 바로 조절 기제를 작동시키고, 스트레스가 지나가면 조절 기제를 닫는다. 만일 조절 기제가 작동해야 할 때 작동하지 않고 닫혀야 할 때 닫히지 않으면 당연히 각종 질병이 유발된다. 한편 조절 기제가 너무 반복적으로 작동하고 닫혀도 에너지가 소비되고 장기가 손상되어 각종 질병이 유발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우리가 생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스트레스에 직면해 체내 항상성에 변화가 생기면, 뇌는 곧장 조절 기제를 작동시킨다. 그렇다면 뇌가 어떻게 신경계를 통해 인체의 기관과 근육을 통제하는지 살펴보자. 신경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한 부분은 길을 걷고, 악수를 하고, 말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행위를 책임진다. 다른 부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행위를 책임진다. 예를 들면 땀을 흘리고, 내분비물을 분비하고, 위장이 연동 운동을 하는 일 등이 이른바 ‘자율 신경계’의 기능인데, 이 자율 신경계가 곧 스트레스에 반응하고 조절하며 적응하는 임무도 맡는다.
인체의 항상성 유지를 책임지는 신경계는 다시 교감 신경계와 부교감 신경계로 나뉜다. 두 가지 신경계는 상호 보완하는 기능을 가진다. 긴급하고 자극적인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교감 신경계가 반응하여, 동공이 확장되어 눈에 빛이 더 많이 들어오고 침 분비가 제한되어 좀 더 급한 다른 기관에 수분을 제공한다. 또한 심장 박동이 빨라져 근육과 폐로 가는 혈액은 많아지고 내장과 피부로 가는 혈액은 줄어드는 한편, 폐의 기관지가 확장되어 산소 교환이 늘어난다. 그리고 소화 기능이 제한되는 반면, 부신의 호르몬 분비와 자극 기능은 반응이 증가한다. 후자가 당장 급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감 신경계는 우리의 몸을 흥분시키고 경계 상태를 취하게 하여 외부의 교란에 대처한다.
반대로 우리가 편안한 상태에서 뭔가를 배불리 먹었거나 잠을 잘 때는 부교감 신경계가 기능한다. 동공이 수축되어 빛이 시신경을 덜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침의 분비가 늘어 위의 소화 기능을 자극하고 장의 연동 운동을 증가시킨다. 이것은 소화계의 혈관 확장으로도 이어져, 혈류량이 늘어 음식물의 소화와 영양 섭취를 돕는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산소가 비교적 덜 필요하기 때문에 기관지가 수축되고 심장 박동도 느려진다. 요컨대 부교감 신경계는 몸이 쉬고 영양분을 축적하게 하여 성장과 발육을 도모한다.
그러면 뇌는 어떻게 장기와 근육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걸까? 답은 이렇다. 뇌는 호르몬을 통해 정보를 장기와 근육에 전달하며, 그 정보들은 심장 박동 가속, 에너지 소비, 면역 기능의 작동과 제한, 신진대사, 성장, 발육에 관한 내용을 아우른다. 이때 호르몬이 우편배달부의 역할을 한다.
호르몬의 영문 철자는 ‘hormone’이며 그리스어에서는 ‘움직이게 하다’, ‘자극하다’ 정도의 뜻이다. 뇌는 호르몬을 통해 장기와 근육의 각종 생리 활동을 자극하며, 우리 몸은 뇌하수체, 갑상선, 췌장, 부신 피질(겉질), 난소, 고환에서 다양한 호르몬을 분비한다. 과거에는 이들 내분비샘이 독자적으로 기능한다고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뇌가 내분비샘의 기능을 관장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양한 호르몬들은 역시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며, 그중 일부는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 호르몬들은 교감 신경계의 신경 말단이나 혈액을 경유하여 장기와 근육으로 전달된다.
스트레스가 우리 몸의 항상성을 교란하면 몸은 그에 상응하는 반응으로 본래의 균형을 회복하려 한다. 교란과 반응의 과정에서 모든 것이 평온한 상태로 돌아올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한 병에 걸려 회복하기 힘든 손상을 입을 때도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스트레스가 우리 몸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먼저 스트레스가 심혈관계와 다른 장기에 끼치는 영향을 보자. 누가 산에서 호랑이와 마주쳐 돌아서서 도망친다고 하자. 그때는 그의 교감 신경계가 작동하고 부교감 신경계는 닫힌다. 근육에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간의 지방 세포나 근육에 저장된 지방, 단백질, 당을 모두 소환하여 혈액을 통해 근육으로 보낸다. 이때 보내는 속도는 당연히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므로, 심장이 더 빠르게 뛴다. 아울러 심장이 뛰는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교감 신경계는 심장으로 들어가는 정맥을 딱딱하게 수축시켜 심장으로 돌아가는 피가 더 큰 힘으로 심방에 충격을 가하게 한다. 그러면 심방은 당겨진 고무처럼 세게 퉁겨지면서 힘차게 피를 내보내고, 그 때문에 혈압이 상승한다. 그 밖에 근육으로 혈액을 보내는 혈관은 확장되어 혈류량이 늘어나는 반면, 소화계의 혈관은 수축되어 소화계로 가는 혈류량이 잠시 줄어든다.
그리고 이때 몸에 수분이 모자라서는 안 되는데, 신장은 혈액의 수분을 흡수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신장으로 흘러드는 피가 줄고 신장의 기능도 느려진다. 하지만 호랑이에게 쫓기던 사람은 자칫 호랑이에게 따라잡힐 찰나에 놀라서 바지에 흥건하게 오줌을 쌀 수도 있다. 앞에서 분명히 이때 몸에 수분이 모자라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까? 인체가 신장을 통해 몸 밖으로 내보내는 물은 일단 방광에 저장된다. 방광은 단순한 용기에 불과하며, 방광에 저장된 물은 이미 몸으로 돌아가 쓰일 수 없는 부담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이 정신없이 도망칠 때는 자기도 모르게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호랑이에게 쫓기던 사람이 운이 좋으면 정의의 용사가 나타나 액운에서 구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몸의 항상성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교감 신경계가 휴식에 들어가고 부교감 신경계가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 평생 호랑이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정말로 매일같이 호랑이와 마주친다면, 혹은 다른 스트레스 요인 때문에 이와 유사한 생리 반응이 늘 일어난다면, 우리의 몸은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본래 교감 신경계와 부교감 신경계는 교대로 작용한다. 긴장했을 때는 교감 신경계가 작동하고, 편안할 때는 부교감 신경계가 개입한다. 그런데 우리가 온종일 긴장한 상태라 전혀 편안할 틈이 없으면, 부교감 신경계는 오랫동안 기능하지 못해 점차 무뎌진다. 그러면 나중에는 편안할 때에도 이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악순환에 빠져 버린다.


스트레스와 문명병
스트레스는 인체의 항상성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외적 요인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스트레스로는 다른 사람과의 싸움 같은 단기적이고 갑작스러운 생리적 충격, 오랜 수면 부족 같은 만성적인 생리적 충격과 심리적인 긴장, 초조, 경악 등이 있다.
몸은 스트레스를 만나면 몇몇 기제를 작동시켜 대처한다. 예를 들면 심장이 더 빨리 뛰거나 혈압이 높아진다. 스트레스가 지나가면 몸은 이런 생리적 반응들을 중단시키고 정상적인 균형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조절 기능까지 쇠퇴하면 몸은 오랫동안 정상적인 균형 상태에서 벗어나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스트레스에 대처하느라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때, 우리 몸은 어떻게 임기응변을 할까? 우선 혈액 속의 영양분을 즉시 글리코겐과 트리글리세리드로 바꾸고 영양분의 저장을 멈춘다. 동시에 지방에 저장된 글리코겐과 트리글리세리드를 포도당과 불포화 지방산으로 바꿔 혈액으로 보낸다. 이런 전환 조치는 모두 교감 신경이 분비하는 호르몬이 유발하는 것이다.
콜레스테롤은 우리 몸에 반드시 필요하며 여러 기능이 있는 지방이다. 인체는 콜레스테롤을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음식물에서 섭취하기도 한다. 지방의 일종인 콜레스테롤은 혈관 벽에 붙어서 혈관이 막히거나 딱딱해지는 증상을 유발한다. 그리고 혈액에 녹아드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일부 단백질에 의존해 혈액 속을 떠돈다. 비유하자면 콜레스테롤은 상자에 담겨 강물을 떠도는 셈이다.
췌장이 인슐린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며 인슐린은 지나치게 많은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간에 저장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혈당 수치가 너무 낮거나 스트레스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수요가 발생하면, 췌장은 또 다른 호르몬 글루카곤을 분비해 간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혈당으로 바꿔 혈액으로 내보낸다.
스트레스가 닥치면 혈당과 간의 글리코겐이 전환되는 횟수가 잦아지는데, 췌장이 인슐린을 충분히 분비하지 못하거나 인슐린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당뇨병이 생긴다. 당뇨병에는 여러 유형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스트레스와 밀접한 유형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어떤 원인들로 인해 인체의 면역 체계가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 세포를 외부의 적으로 오인하고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인슐린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간에 저장하는 기능 외에 체세포가 혈당을 흡수하도록 돕는 기능인데 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인슐린 결핍의 두 가지 후유증은 첫째, 혈당이 너무 많아져서 혈당이 혈관 벽에 붙어 혈관을 막히게 하거나 딱딱하게 만드는 것이며, 둘째 인체의 많은 세포에 혈당이 부족하여 장기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1920년대부터 우리는 체내에 인슐린이 부족할 경우 인공 제조된 인슐린을 주입해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체내 인슐린의 적절한 균형점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인슐린이 너무 적으면 기능이 떨어지고 너무 많으면 쇼크를 일으킨다. 그리고 인슐린을 사용하는 당뇨병 환자들은 모두 아는바, 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혈당과 불포화 지방산의 양이 늘고 변화하여 균형의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이 밖에도 스트레스는 체세포의 인슐린에 대한 저항성을 증가시키는데, 이 점은 인슐린 주사로 체내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환자에게 또 하나의 변수가 된다.
두 번째 유형의 당뇨병은 몸에 인슐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체세포의 인슐린에 대한 저항성 때문에 생긴다. 예를 들어 너무 뚱뚱한 사람은 지방을 저장하는 세포가 이미 꽉 차서 더는 지방을 저장할 공간이 없다. 이때 췌장이 계속 인슐린을 분비하여 지방 세포를 자극하려, 하면 지방 세포는 그 자극을 외면한다. 그러면 췌장은 멋모르고 끊임없이 인슐린을 분비하다가 결국 손상을 입고 인슐린 제조 기능마저 잃음으로써 앞에서 말한 첫 번째 유형의 당뇨병을 야기한다.


바빠도 살이 안 빠진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평소보다 많이 먹고 어떤 사람은 평소보다 적게 먹는다. 의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그 비는 대략 2:1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스트레스를 느끼면 뇌는 여러 가지 호르몬의 방출을 유도하는데, 그중 코르티코트로핀 방출 호르몬CRH은 식욕을 억제한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에서는 소화가 당장 급한 일이 아니므로 잠시 미루는 것이다. 한편 글루코코르티코이드라는 호르몬은 혈액 속에 유동하는 혈당량을 증가시킨다. 스트레스 상태에서 우리 몸은 응급 대처에 필요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호르몬은 식욕을 자극하는 기능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식욕은 억제될까, 아니면 자극될까?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첫 번째 호르몬 CRH가 신속히 혈액으로 배출되고, 두 번째 호르몬 글루코코르티코이드는 좀 늦게 배출된다. 그러다가 스트레스가 지나가면, 첫 번째 호르몬은 곧바로 사라지지만 두 번째 호르몬은 비교적 오랫동안 남는다. 이것은 스트레스가 생겼을 때 보통 식욕이 없어졌다가 스트레스가 지나가면 회복 과정에서 식욕이 느는 현상을 정확히 설명해 준다. 만일 스트레스가 오랜 기간 지속된다면 오랫동안 식욕이 없을 테고, 만일 스트레스가 반복적으로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면 폭식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수많은 샐러리맨이 이런 경험을 겪는다.


아편 수용체와 엘비스 프레슬리
신경 말단은 통증 자극을 받으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신경 섬유를 통해 척수로 신호를 보낸다. 첫 번째 신경 섬유는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통증 신호를 책임지며 두 번째 신경 섬유는 만성적이고 가벼운 통증 신호를 책임진다. 신경 섬유가 이렇게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뇌로 가는 신호를 전담하는 척수 속 신경 세포도 두 가지 통증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처리한다. 뇌로 신호를 보내는 신경 세포는 ‘발신 세포’라고 하며, 신호 전송을 막는 신경 세포(제어 세포)의 제어를 받는다.
신경 말단에서 전해진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통증 신호는 발신 세포를 자극해 뇌로 전달되는데, 시간이 좀 지나면 이 통증 신호가 제어 세포를 자극해 발신 세포가 계속 통증 신호를 뇌로 보내지 못하도록 저지한다. 이것은 왜 우리가 칼에 베이거나 바늘에 찔렸을 때 통증이 순식간에 지나가는지 설명해 준다. 반면에 지속적이고 가벼운 통증 신호는 발신 세포를 자극해 뇌로 전달되긴 하지만 제어 세포를 자극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통증 신호가 끊임없이 뇌로 보내진다.
스트레스는 기억력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 단기적이고 가벼운 스트레스는 기억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점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스트레스는 경각심을 높이고 주의력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잘 자면 늙지 않는다
낮의 활동 시간에 몸은 신경 전달 물질인 아데노신을 생산하는데, 이 물질은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몸의 기능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뇌에 아데노신이 일정 정도 축적되면 우리는 자고 싶어진다.
수면은 도대체 어떤 기능을 할까? 단지 휴식 기능만 하지는 않는다. 우선, 우리가 깨어 있을 때 뇌는 인체의 총 에너지 소비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잠을 잘 때 뇌의 활동이 느려지는 틈을 타 몸이 뇌에 저장된 에너지를 보충한다. 앞에서 우리 몸은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꾼 뒤 간, 뇌, 근육 등에 저장한다고 말한 바 있다. 둘째, 수면은 뇌의 온도를 떨어뜨려 휴식을 취하게 한다. 셋째, 수면이 꿈을 꾸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우리가 하루를 꼬박 새우면 이튿날 자면서 유난히 꿈을 많이 꾼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꿈을 꿀 필요가 있다는 뜻일 뿐, 꿈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꿈을 꿀 때 뇌는 깨어 있을 때보다 적게 활동한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깨어 있을 때 뇌에서 그다지 활동적이지 못했던 부분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꿈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음 넷째, 수면은 인지와도 연관이 있다. 풀지 못한 문제가 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머릿속에서 다 풀려 있을 때가 있다. 다섯째, 수면은 깨어 있을 때 수집한 정보를 정리하도록 도와준다. 심지어 정보 사이의 연관성까지 수립해, 깨어 있을 때 떠올리지 못했던 정보를 떠올리게 해 준다. 여섯째, 몇몇 전문가는 파괴되고 훼손된 신경 세포가 잘 때 치료되고 복원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수면은 정서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여성의 생리 기간에서 전반부에는 여러 호르몬의 분비가 증가해 난소의 배란 작용을 촉진한다. 그런데 스트레스 때문에 호르몬 분비가 줄면 정상적인 배란의 기회도 줄어든다. 후반부에는 또 다른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그 호르몬들의 주요 기능은 자궁벽의 세포를 성숙시킴으로써 수정란이 착상해 자라기에 알맞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호르몬 분비가 교란되면 자궁벽 세포의 성숙에 방해가 되고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해 성장할 확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임산부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태아에게 흘러가는 혈액량에 영향이 미치고 산모의 심장 박동 속도도 태아의 심박에 영향을 미쳐서 유산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물론 생식이 꽤 복잡한 과정이기는 해도 전반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우리 몸의 저항력은 상당히 강한 편이다.


스트레스를 즐기자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 비교적 괜찮은 것은 한눈 팔 수 있는 일을 하거나 상상하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머릿속으로 상상의 골프 시합을 치르는 것이다. 운동도 매우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첫째, 운동이 기분을 전환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효과는 운동 후 몇 시간에 국한된다.
둘째, 운동을 좋아해야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이 든다. 흰쥐가 자진해서 쳇바퀴를 돌려야 건강에 유익하지, 강제로 돌리게 하면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셋째, 유산소 운동의 효과는 비교적 괜찮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이때 유산소 운동이란 산책, 자전거, 수영과 같은 운동을 그리 격렬하지 않게 20분 이상 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산소 운동은 산소를 소비하면서 몸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혈당으로 바꾸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다. 한편 무산소 운동은 다르다. 역도, 근력 운동 등의 격렬한 운동은 한 번에 30초〜2분밖에 하지 못하고, 에너지원도 다르다.
넷째, 운동을 매주 몇 번 할지, 한 번에 몇 시간씩 할지 정해서 오랫동안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다섯째,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 명상도 운동처럼 오랫동안 규칙적으로 하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고 글루코코르티코이드 분비를 줄인다.
스트레스 해소를 돕는 또 다른 힘은 주변 사람들의 심리적 지원이다. 머리를 기대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어깨, 따뜻하게 내미는 손, 조용히 들어 주는 귀는 모두 큰 효과가 있다.
심리적 지원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은 봉사다. 남을 돕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을 돕는 것이나 다름없다. 달리 말해, 남을 위해 긴장함으로써 자신의 긴장을 대신하고 남의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스트레스를 대신하는 것이다.

단단한 과학공부

류중랑 지음
유유 펴냄

202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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