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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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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콘

맥스 배리 지음
열린책들 펴냄

사람을 조종하는 언어시스템을 익힌 달변가들이 나온다. 이들은 스스로를 '시인'이라 부른다. 언어라는것은 누군가를 살게도 죽게도 만드니 잘 생각해보면 실제로 마법같은 것이다. 이 마법같은것을 더욱 마법스럽게 꾸며냈다.
처음엔 성인용 해리포터 같다고 느꼈다. 잘 짜여진 세계관과 비밀스러운 조직의 특별한 능력. 좀 더 많이 죽고, 좀 더 야하고, 좀 더 현실적인 세계관이 다를 뿐이다. 나는 피자와 치킨처럼 맛을 위한 책도 좋아하므로 이야 재밌다를 연발하며 보았다.
그러다 작가가 끼워놓은 묵직한 메시지를 만났다. 우리가 이미 맞이한 빅브라더 사회를 말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때 미래의 모습을 그리라고 하면 날아다니는 자동차, 해저도시, 우주복 입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인터넷에 남긴 내 개인정보로 날 파악해서 조종하려 드는 세상은 떠올리지 못했다.
'대지의 슬픔'을 먼저 읽은 덕분에 이해가 좀 더 깊었다. 대지의 슬픔이 스펙터클의 개념서라면 렉시콘은 스펙터클의 응용서다. 대지의 슬픔은 스펙터클의 피동, 렉시콘은 스펙터클의 사동이다.
스펙터클은 마침내 인터넷으로 진화했다. 이제 우리를 현혹하는 스펙터클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세상속에 산다. 나를 속속들이 파악한 정보를 이용해서 달콤하게 나를 이끈다.
내 삶이 누군가가 조종하는대로 이끌려간다면 그건 정말 나 자신의 삶일까? 내가 원한것이 모두 진짜 내가 원한것일까? 주의를 기울여도 피할수 없게 된 세상속에서 어떻게 할것인지 묻는다.
깊은 사랑과 같은 범지구적이고 근원적인 인간본능은 강력해서 주인공들처럼 조종의 손길을 이겨낼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을 조종하고 싶어하는 세력은 근면하다. 로웰이라는 시인의 보고서는 인간본능마저 조종 가능한 세상을 원한다.
이 책은 대중적인 포장 안에 담긴 내용물에 가치가 있다. 판타지로만 본다면 끝이 싱거운 소설이다.
예스24의 페이백 이벤트로 대지의 슬픔과 렉시콘 두권이 나란히 있었기에 나란히 구매했고 나란히 읽었다. 의도적으로 함께 내놓은거라면 따봉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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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콘 中

“사이트가 사람마다 다르게 보인다는 거예요. 가령 당신이 세금 감면에 찬성하는 쪽을 클릭했다고 해봐요. 그러면 이제 당신 컴퓨터에 쿠키가 남고, 그 사이트에 다시 접속하게 되면 정부가 당신 돈을 어떻게 낭비하는가에 대한 기사들이 뜨죠. 그 사이트는 당신이 원하는 것에 기반해 역동적으로 내용을 고르는 거예요. 아니, 당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화나게 할 것에 기반해서요. 당신의 주의를 끌고, 믿음을 강화하고, 사이트를 신뢰하게 할 내용들을 보여 주는 거죠. 만약 세금 감면에 반대하는 쪽을 클릭하면, 공화당이 복지 정책들에 반대한다거나 하는 그런 글을 보여 주는 거예요. 어느 쪽이든 간에 먹혀 들어가죠. 당신 사이트는 거울이고, 각자의 생각을 다시 비춰 주는 거예요. 꽤 멋지지 않아요?
(...)
사람들이 이런 사이트에 접속하면 점차 그 의존도가 커지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돌연 사용자의 주요 신념에 맞춰 기사를 내지 않는 다른 모든 뉴스원들이 이 사용자에겐 혼란스럽고 낯설게 보이기 시작하죠. 그런 뉴스들은 사실 편파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해요. 웃기는 일이에요. 이제 당신은 당신을 신뢰할 뿐 아니라 당신을 이 세상의 주요 소식통으로 여기는 사람을 얻게 되는 거죠. 짠! 이제 그 사람은 당신 거예요. 당신은 그 사람에게 뭐든 원하는 걸 말하고, 누구도 당신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요.
(...)
앨리엇. 이게 미래라고요. 모두들 자신에 대한 웹 페이지를 만들고 있어요. 몇 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여론 조사에 클릭하고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TV쇼, 제품, 정치 성향을 날마다 입력하는 걸 상상해 봐요. 그건 이제까지 가운데 가장 큰 데이터 집합이 될 거예요. 그리고 자발적인 거고요. 그게 재밌는 부분이죠. 사람들은 인구 조사에 저항하지만 자신을 소개하는 페이지에는 모든 것을 밝히죠. 그리고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말하기 위해 하루 종일을 써요. 그건 좋은 거죠. 우리들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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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에 빠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랜드포크스에서 총을 쏜 사람 이야기 읽었어? 사람들 말이, 그 사람은 여자 친구와 싸웠다더군.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 그래서 그렇게 회까닥 한 거로군>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거기에 연관성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도 없었어. 그자들은 그냥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 거야. 그렇지 않다면 뭐 하러 그 사실을 언급했겠어?
이 사건에 뭔가 특별한 게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나는 이런 경우를 <늘상> 봐. 가령 TV뉴스를 보면 모든 소식이 이런 식이야. <화재가 발생했고, 건물주에게는 경제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건물주가 자기 건물에 불을 질렀다고 말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 뉴스가 말하는 건 딱 그거야.
난 그게 맘에 걸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똑똑하며 여러 조각을 하나로 맞출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건 미리 짜인 판이거든. 우리는 한 방향으로만 맞아들어가는 조각들을 받고, 이 조각들로 만든 큰 그림이 결국엔 잘못된 거였다고 밝혀져도, 조각들을 준 쪽에선 애초에 그 그림이 옳았다고 말한 적이 없어.
전국적 규모의 이야기처럼 큰 사건이 아닌 이상, 모든 기사는 경찰들이 말하는 걸 받아 적은 기자 한 명으로부터 나와. 그게 AP 통신으로 가고, 모든 뉴스 제공자들이 그 기사를 공유하지. 그래서 마치 모든 제공자가 각자 조사를 해서 같은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보이지만, 대개는 모두가 한 가지 정보원에게서 얻은 내용을 그대로 읊는 것뿐이야.
아마도 그랜드포크스의 그 남자는 여자 친구 때문에 정말 화가 났었던 게 맞을거야. 하지만 그게 그 남자가 총을 쏜 이유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만약 그게 수수께끼라고 말했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호기심이 일어 질문을 했겠지만, 입증되지 않은 한 가지 힌트만 흘렸을 뿐인데도 우리는 만족하고 있어. 그 이유를 알아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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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알았어. 이런 식이야. 거리에서 캠페인을 해 개별 방문을 하고. 노크를 하기 전에 서류를 보면 이런 식으로 적혀 있어. '마슬로프, 21세, 남자, 내년에 직장을 구할 수 있는지가 최대 관심사임.' 그래서 나는 노크를 하고 말하지. '안녕하세요, 마슬로프 씨. 저는 선거에 출마했고 제 주요 관심사는 일자리 창출입니다.'
<마슬로프> 그렇군.
<빅토르> 그러면 넌 생각하지 '우와, 이 친구가 진짜네. 이 친구를 찍어야지.' 그리고 다음 집에 가면 이번에는 이렇게 말해. '안녕하세요, 키티펜드래곤 양. 저는 선거에 출마했고 제 주요 관심사는 기후 변화와 싸우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서류에 그게 키티펜드래곤의 관심사라고 적혀 있거든.
<마슬로프> 하지만 그건 좋은 거잖아.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지. 원하는 것도.
<빅토르> 흠, 내가 뽑혔다고 생각해 보자. 내 최고 관심사는 뭘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마슬로프> 알아. 하지만 최소한 사람들 말을 듣기는 하잖아.
<빅토르> 그건 민주주의의 근본을 흔드는 거라고. 후보자들은 자신의 입장이 뭔지 밝혀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거잖아. 문제가 뭔지 모르겠어?
<마슬로프> 응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0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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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asoora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전통파 추리소설이다. 사건 해소의 뒷맛이 깔끔하고 주인공이 선해서 기분이 밝아진다.
과거사건에서 공범을 결심하게 된 사연들이 자세했다면 더 재미있었을것 같다.
범인을 비롯하여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이 과장된게 작품 분위기와는 어울렸지만 유치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심심할때 가볍게 읽기 좋다. 없는 시간을 내서 읽을 책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문제다. 추리소설 마니아들은 극찬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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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도 그런게 있으면 좋겠네요. 일기예보 같은거 말이에요."
"몰랐습니까?"
"뭘요?"
"사건의 일기예보, 그게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거.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의 정보를 모아 다시 일어날지도 모를 사건을 예측하고,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일 말입니다."

반전이 없다

조영주 지음
연담L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1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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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asoora

기나긴 이별이 1953년에 출간된 책이라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얼마나 한결 같은지 놀랍다. 돈과 권력은 어느시대든 사람을 현혹한다.
현실적인 배경속에 초현실적인 주인공이다.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사람, 권력 앞에 기죽지 않고 위협 앞에 굽히지 않는 사람, 조금이라도 거리낌이 있다면 돈도 사랑도 친구도 받지 않는 결벽적인 사람.
이런 사람이 드물긴해도 세상에 존재할것이다. 결혼해서 가정을 지켜야 하는 순간 사라질뿐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반려동물 조차 곁에 두지 않고 사람들과 이별하며 홀로 늙어가는 고독한 탐정이다.

<이별을 할때마다 조금씩 죽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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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 순진하길래 이러시오, 말로? 세상물정 알 만큼 아실텐데. 법은 정의가 아니오. 몹시 불완전한 체계란 말이오. 눌러야 할 단추를 또박또박 정확히 누르고 행운도 좀 따라줘야 간신히 정의가 실현 될까 말까요. 법은 처음부터 일정한 체계를 마련해보려고 만들었을 뿐이니까.">

<고무밴드 한개를 집더니 양쪽 엄지에 걸고 잡아당겼다. 점점 더 길게 늘였다. 마침내 고무밴드가 뚝 끊어졌다. 그는 끊어진 고무줄 끄트머리에 얻어맞은 엄지를 문질렀다.
"누구나 지나치게 잡아당기면 끊어지기 마련이오. 아무리 강인해 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지. 또 만납시다.">

<"난 아직 무사해요. 자꾸 겁주려고 하지 마세요. 내가 원하던 대로 됐으니까. 레녹스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스프링어한테 가서 면상에 침을 뱉었겠지만."
"당신이 대신 뱉어줬잖아요. 그리고 이번에는 스프링어도 그 사실을 알아요. 검찰은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옭아매는 방법을 백가지도 넘게 알죠.">

<"잘 가게, 친구. 작별인사는 생략하겠네. 가슴에 사무칠때 벌써 해버렸으니까. 슬프고 쓸쓸하고 영원한 이별이었으니까.">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열린책들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0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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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asoora

주인공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지만 사실 좋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걸 느끼고 주인공에게 다가온다. 주인공은 인간관계를 바라지 않고 무심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제멋대로 마음을 열고 사연을 들려준다. 주인공의 삶에 난입하는 주변인들이 '침입자들'의 정체다.
주인공은 나무 같은 사람이다. 갖가지 사연으로 지친 새들이 찾아온다. 새들은 충분히 쉬었다가 제 갈 길을 떠난다. 나무 역시 그 이상의 관계를 바라지 않는다. 막지 않고, 잡지 않고, 아쉽지 않고, 무심하다.

주인공은 진지한 것을 가벼운 말투로 말한다. 그러고 보니 모든 질문에 다 진지하게 대꾸할 필요는 없구나ㅋㅋ
의미심장한 말을 해놓고, '그거 무슨뜻으로 하는 말이야?' 하고 상대가 물으면 아무뜻도 없다고 천연덕스럽게 넘기는 주인공의 방식이 좋아보였다. 과거를 묻는 질문엔 알코올성 치매라고 능청스럽고도 단호하게 회피한다.
그래도 관계는 망가지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한다(?)

예전에 '독서중독자들'이라는 코미디 웹툰을 중반 정도까지 봤는데, 거기 멤버로 나가면 코드가 딱 맞을듯한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하도 책이나 영화 예술 등을 많이 인용하길래 '뭐지 작가의 아는척을 위한 두번째 자아인가' 했는데, 나중에 작가의 말에서 밝히기를 '좋아한 작품들의 오마주' 였다고 한다. 나도 사람들에게 내 취향을 함께 하자고 조르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고 사니까 이해가 되었다.

표지만 봤을땐 스릴러나 추리소설인 줄 알았다. "택배가 도착하는 순간,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과거를 덮으려는 자, 잃어버린 자, 잊으려는 자. 의문의 남자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숨막히는 이야기." 라는 소개글이 아주 틀린말은 아닌데, 장르 낚시라는 느낌도 지울수 없다;

초반엔 택배기사의 고된 현실을 폭로하는 리얼리즘 소설인가 했지만 뒤로 갈수록 현실 판타지다. 유치함 속에서도 현실에 대입해 볼만한 주제를 품고있기 때문에 그리 나쁘진 않았다. '사람이 상처로부터 자신을 추스르는 이야기. 옳든 그르든 각자의 길을 찾아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아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 곁에서 쉬고 떠났듯이 주인공도 택배 터미널에서 쉬고 떠나는 것이다.
택배 동료가 주인공에게 '행운동은 택배기사가 아니다. 택배일을 진지하게 여기는게 아니라면, 택배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택배를 무시하면서 택배일 하는 사람은 싫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말이 주인공을 돌아가게 만든게 아닐까?
사막에서 집을 지어보려 했지만 도피였을 뿐이다. 슬픔을 시간으로 달랜 뒤엔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결국 육지로 돌아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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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라도 날로 먹고 싶은데 그마저도 꼭 비싼 비용을 치르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손에 쥔 건 어쩐지 싸구려 같고. 시간에 사기당한 기분이죠. 어떡하겠어요? 그게 멍청함의 대가인것을. 하지만 누굴 탓할 일은 아니죠. 누구도 그리 살라고 등들 떠민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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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어 오브 드래곤'이라는 영화를 봤습니까?"
"모르는 영화에요."
"거기에서 미키 루크가 이런 대사를 하죠. '난 상처받은 영혼이야'. 그걸 듣고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몰라요."
"젠장, 안 그런 영혼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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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유를 원하죠. 하지만 실제로 자유를 감당할 만한 사람은 별로 없어요. 왜인지 아십니까?"
...
"자유의 대가는 공포니까요. 생계의 공포. 인간관계에 있어 고립의 공포. 그 공포를 감당하며 살 만큼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흔치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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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다산책방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0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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