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방님의 프로필 이미지

비밀의 방

@bimileuibang

+ 팔로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표지 이미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김경일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이 책을 처음 읽은 때는 20대 한창 나이였다.
무릎을 치며 공감을 하였다. 모든 것이 유교 사상 때문이라 했다. 권위주의, 남녀차별, 서열 등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라는 것이다. '힘 있는 자'와 돈 가진 자'를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곡된 권위와 도덕적 가치, 허풍으로 가득 찬 '대한민국'이 유교적 허세문화와 정치적 허세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그 때의 나는 이 책을 상당히 매우 좋은 책으로 평점 만점을 주었었다.

나는 자라면서 딸부자에 아들 하나있는 우리 집에서 차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남동생이 누나들 등살에 괴롭다고 했다.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남녀 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착각 이었다. 예의범절로 포장된 횡포를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무지였다. 초등학교 때 반장은 당연히 남자, 부반장은 여자였다. 출석부 이름도 남자가 늘 앞 번호였다.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아니 당연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는 복장 자유화였는데도 당연히 치마를 입어야 했다. 직장생활을 했을때 여자는 늘 먼저 출근해 책상을 닦았고, 커피를 탔다. 아무리 몸이 불덩어리여도 어른이 앞에 서계시면 얼른 자리를 양보해 드려야 했다. 선생님과, 선배, 상사의 말에 절대로 토를 달어서는 안 되었다. 이의 제기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딸 끝에 아들을 낳은 것도 유교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장손 타령에 굴복하신 것이다. 세월이 훌쩍 지나, 조정래의 대하소설을 몇 번 탐독하고, 김진명의 고구려를 읽으면서 문득 이 책이 생각이 났다. 구부(소수림왕)가 그토록 뛰어넘고 싶어 했던,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 했던 공자. 그런데 다시 읽으니 그 때의 그 느낌과 똑같지는 않았다. 머리말을 제외하고 첫 장 부터 어?... 이런 내용이었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의 기억의 오류.. 좋았던 부분만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건가? 그 당시 내가 어떤 부분에 끌리고 매료 되었었는지 궁금해 끝까지 붙잡고 찬찬히 읽었다. 내가 꼰대가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부 한국인으로 사는 열 가지 괴로움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인생의 최고의 책이라 생각했던 내게 뒤통수를 쳤다.

" 정치인, 기자, 학자들처럼 민족과 민주주의를 열심히 외치는 집단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찾아낸 우리들의 대안이 찬호와 세리, 그리고 릭 윤이지만 이것이 해답이 될까? 찬호의 스트라이크와 세리의 버디 퍼팅, 릭 윤의 미소에 일희일비하면서 손에 땀을 쥐어야 비로소 한국인인가? 그것이 나의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들의 개인적 선택에 대해 왜 우리가 '애국적'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이 사실은 돈 때문에 나간 것이 아니고 국위선양을 위해서라고 자위를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열등한 대리만족 때문일까?"

살짝 반감이 생긴다. 의도하지 않은 국위선양 맞다. 개인의 이익에서 온 어부지리 국위선양 맞다. 그러나 선한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 또한 사실이다. 과대한 찬양만 아니라면, 조금의 애국적 박수 정도야 쳐 줄 수 있는 일 아닌가. 대한민국이라는 인지도를 높였다. 그 덕분에 다른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금 박세리 키즈들이 LPGA를 휩쓸고 있으며, k-pop열풍으로 문화 수출에 의한 이익 또한 어마어마하다. 작가는 지금 이런 열풍을 보면서 아직도 박세리와, 박찬호에게 '애국적' 박수 보내기를 떨떠름하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백두산 천지를 보며 수많은 미사여구로 민족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이들에게도 고깝게 말한는 것이다.

"산을 가다 보면 산이 있고, 산이 있다보니 폭포도 있고, 호수도 있음이 무에 그리 넋을 놓고 노래하며 민족 장래 모두를 부탁할 만큼 대단한 것이던가? 그것은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의 시작 언저리에서 더덕 몇 뿌리를 천년 묵은 약초라고 팔고 있는 허술한 장사꾼의 보따리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몸짓들이다.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흐름 속에 어느 한 지역 문화의 성스러움 이나 순수 가 그들만의 원시적 가치로 남아 있도록 놔두지 않는 그 흐름 앞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외치게 될지는 참으로 의문이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감정과 생각이 왔다 갔다, 이랬다저랬다 혼란스러웠다. 1부를 읽을 때와 2, 3부를 읽을 때,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의 마음과 생각이 달랐다. 왜 그런 것일까? 답은 맨 뒷장을 덮은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2부는 유교의 해악, 출발과 기원, 왜곡의 역사, 조상 숭배 의식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이며, 3부는 한중일 삼국의 식칼과, 음식을 통해 문화 비교를하며 일본 찬양을 해댄다. 그래서 1부와 같이 3부도 반감이 생겼다. 중국은 좋게 말해서 다국적이고 나쁘게 말해서 다소 오만하다고 평한다. 그들의 주된 음식인 돼지볶음 '차오'를 빗대어 둔탁하고 불투명하며, 실체를 잡을 수 없다고 중국 문화의 정서를 비꼰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극찬을 한다. 뒤가 없는 일본인들의 진솔한 면을 '쓰시'에 빗대어 투명하고 정갈한 국민성이라 칭찬하며,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존중해 주고 발휘할 수 있는 문화성이라 극찬 한다. 그에 비해 한국의 '찌개'는 이름부터 몰개성, 억지가 가득한 음식이라고 한다. (잡탕찌개, 부대찌개, 섞어찌개) 김치와 된장 고추장에 대한 평도 영~.
마음에 안 든다. 맛에 변화를 전혀 줄 수 없는, 유연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음식, 외부 변화에 대해 유달리 둔감하고 고집이 센 한국인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평한다. 같은 것을 두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것 아닌가? 한국의 찌개를 두고 좋게 평한 글도 많이 읽었다. 작가는 그것도 민족주의를 앞세운 문화적 해석 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장 반감이 가는 것은 "일본을 용서 한다"는 단락이다. 뺨을 때린 놈은 때린 적이 없다고 우기는데 맞은 사람이 나서서 난 널 용서해 사랑해~~ 네가 가진것이 많기 때문이야 너에게 배우고 싶어 어떻게 하면 미개하지 않게 살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일본이 6가야에 자신들이 지역 통치를 위해 '임나일본부'를 두었다는 주장을 완전 부정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한다. 그 지역에 정말 '임나일본부'가 전혀 없었다는 기록도 없고, 완전히 백제나 신라의 통제를 받았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이란다. 없다는 기록이 없기에 인정을 할 수 없다니, 기록이란 있는 것을 기록하는 게 아닌가? 작가는 애국적 역사풀이를 그만 두자고 한다. 그러면서 식민사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주고받으며 때로 싸우고 화해하는것, 이것이 바로 문화다. 만일 우리가 일본에 건네준 문화의 일단면만을 가지고 일본을 문화적 속국으로 치부하려고 하는 한, 그건 우리가 일본의 강제 통치를 경험했기 때문에 부려보는 억지고, 또 다른 컴플렉스일지 모른다는 혐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게 된다."

4부는 대한민국의 커다란 숙제 교육, 입시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학벌주의, 일류 지상주의를 유교의 뿌리에서 찾는다. 이 부분은 상당히 공감되는 부분이다.
5부는 결론 부분으로 유교의 오만을 벗어버리고 국가를 넘어 하나의 인류, 문화를 만들자고 말한다.
"한국인을 넘어서. 한국인의 문화가 아닌 사람들의 문화를 만들어보자, '유토피아를 꿈군다.' " 작가의 외침 이다.

외면적으론 유교를 비판하지만 내면은 민족주의를 반대하고 있다. 난 민족주의자 이다. "우리 민족은 하나"(혈통적으로 하나를 말 하는 것 아님)라는 민족주의와 전체의 미래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러나 국수적 민족주의, 한국적 쇼비니즘은 아니다. 내 민족이 자랑스럽고, 민족을 강조하는 우리의 근성이 좋다. 이 민족의 근성이 없었다면, 그 수많은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며, 일제강점기를, 6.25를, IMF를 금융위기를, 코로나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민족만의 특유 근성이 나는 좋다.

"민족주의, 우리 사회 저층에 깔려 있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정서가 오늘 이 사회에 공헌한 것은 무엇인가? 척화비의 주인공 대원군이 승리했는가? 사대부들이 일제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았는가? 해방을 우리 손으로 만들었는가? 남북을 이어노았는가? 전쟁을 막았는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는가? 투명하고 건강한 경제구조를 만들어놓았는가? 무엇 하나 바꾸어본 일도 없고 올바른 예측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여전히 우리 민족 만세를 외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가? 귀 막고, 입 막고, 눈을 가린 채 '우리끼리 만세'를 부르면서 미래 사회를 운운해도 되는 일까? 정말 우리들은 도도하게 변하며 흐르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땅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은 한통속이 되어, 민족주의 속에 마련된 기득권과 권위의 달콤한 꿀을 나누어먹고 있다." -p57-

저자는 본문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유교라는 하나의 잣대로 매도하는 우를 저지르는 멍청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말 한다. 멍청이는 아닐지라도 한쪽으로 너무 쏠린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우리 사회의 저변에 유교 문화의 특성이 두텁게 깔려 있음은 부인하지 않지만, 유교를 타파하기 위해 민족주의까지 부정하기에는 너무 멀리 간 듯하다. 작가의 주장처럼 "우리 사회에 더러운 부유물처럼 떠있는 목소리와 주장과 구호와 이념들 밑에 도사리고 있는 유교적 권위, 그리고 그것 앞에 엎드리는 타협, 그래서 만들어지는 불평과 불투명함들. 그 본질들을 해체하고 찢어내고 씻어내야 마땅하다.

"유교 문화의 내부에는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유교 문화가 내거는 가치 척도는 '도덕 사회'를 이상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상적 도덕 사회. '인'의 세계로 표현되는 이 사회는 절대적 인격체 '성인'에 기반하고 있다. 억지와 희망이 만든 착각의 세계였다."

"주로 정치적 사고에 익숙한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도 살펴보고 또 다른 삶의 지평으로 넓혀갈 수 있다는 면에 대해 대단히 무지하다. 이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정신적, 문화적 독재를 획책하고 있는 지배자들(정치,경제,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의 교묘한 통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교 문화 속에서의 '힘'은 단순한 이분법적인 관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하늘과 땅, 남과 여, 왕과 백성, 부모와 자식들은 이 '힘'을 주고받는 이분법 체계 속의 대표적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 존재들 속에서 '힘'은 상하 수직의 루트를 따라 일방적으로 전달된다."

"문제는 '힘'의 사용이 상식과 법, 그리고 수성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 시스템 속에서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프로그램, 즉 유교 문화가 만든 권력 구조 속에서 발생했음에도, 다시 한 번 도덕으로 돌아가는 다시 유교 문화 속으로 스스로 기어드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데 있다"

20대 때와 지금 다시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다른 이유는, 아직 유교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1990년대 보다는 훨씬 많이 유교를 지워냈다는 것이다. 책에서 작가가 주장해왔던 것들이 많이 이루어졌고,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들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면 그 때 이 책이 쓰여진 덕분인가? (정말이지 끝까지 생각이 왔다 갔다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 예로 언어의 변화와 효의 근본적인 의미가 바뀌었으며, 노인복지가 시스템화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한번 굳어진 어휘에 대해서는 검증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언어란 변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 따라서 시대에 맍는 언어를 늘 새로운 마음으로 골라 사용해야 하는 법. 언어란 사회 공동의 가치를 담는 그릇, 따라서 언어를 새롭게 해석하고 선택한다는 뜻은 바로 사회 고동의 가치를 담을 그릇을 다시 씻고 다시 만들어간다는 유연한 태도를 의미한다."

지금 21세기 아이들과 미디어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언어가 새롭게 정의되고 만들어 졌는지 작가도 아실 것이다. 유교의 악습 또한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했지만 계속적으로 지워 나가고 있다. 아니 지워져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세대는 유학을, 유교를 모른다. 그리고 일반 시민의 의견이나 여론을 대변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은 90년대 시점에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다소 진부하고, 올드하다는 얘기다.
개정판이 나왔으면 하고 바라는 책 중 하나다.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0년 8월 2일
0

비밀의 방님의 다른 게시물

비밀의 방님의 프로필 이미지

비밀의 방

@bimileuibang

사람에겐 누구나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데 어떻게 아무 이야기가 없을 수 있을까. 하루를 살았어도 숨을 쉬었고, 밥을 먹었고, 웃었고, 울었고, 신체를 통한 감각을 느꼈다. 그런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냥 왔다 그냥 가는 인생은 없다. 그러니 악인인들 이야기가 없을까. 그 또한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이야기는 있다. 그런데 왜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말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해 이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는데 간혹 전문지식이 필요한 부분들이 더러 있어 이해력(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다소 어려웠다.

'내가 알고 있는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말은 악인의 행동에 문학적 이야기를 입혀 대중을 호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미디어에서 종종 써먹는 범법자에게 스토리를 입혀(어릴 적 불우한 환경 등등) 대중들로 하여금 그를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것으로는 카메라 앞에 선 그의 외모(걸치고 두른 옷과, 모자, 등)에 스토리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대기업 오너가 들어 검찰에 출두할 때 흔이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다. '악인'의 기준과 악행의 기준을 묻고, 여러 방면에서 그것을 조명한다.
한마디로 '악'이라는 것은 사람이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세상에 완전하고, 무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대중에게는 악한 살인마이지만, 자신의 자녀에게는 좋은 부모로 불리고. 나에게는 악한 사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는 이해가 가고 수긍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문학, 예술매체이다.

문학과 예술에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것은 적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 이유를 소설, 에세이, 영화, 연극, 웹툰을 통해 얘기한다. 사회의 범죄자는 현행법으로 악인을 판결할 수 있지만, 문학과 예술에서는 동등한 이야기로 '악'을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요즘 특히 드라마, 영화, 웹툰이 너무 악인을 정당화시킨다는 비난에 대해 다소 억울함? 을 호소한다.
각기 다른 분야 9명의 저자들이 들려주는 악인의 서사에 가장 공감 가는 글은 듀나가 쓴 글이다.(가장 쉽게 공감이 된다.)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이 책을 대변하듯 장강명 작가가 다른 곳에 쓴 글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도움이 되었지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구호가 그렇듯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는 어떤 맥락에서는 적절하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이 간명한 슬로건은 당초 현실의 잔혹 범죄와 이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를 규탄하기 위해 대두됐지만, 머잖아 창작 서사 전체를 아우르는 원칙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김지운 편집자의 분석에 따르면 ‘악인의 서사 자체를 비윤리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 널리 '확산’되어 이제 ‘대중화된 통설로 자리매김했다.
생각하는 첫째 부조리는 ‘서사 없이 어떤 인간이 악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서사로 이해하는 동물이며, 서사 정보 없이 도덕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즉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고 규정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이미 서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는 어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어느 지점에서 멈추겠다, 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끝났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서사 예술이 수용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오히려 그런 태도의 반대 지점에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끼 살인마이고, 안나 카레니나와 마담 보바리는 간통을 저질렀고, 히스클리프는 스토커, 뫼르소는 묻지 마 살인범인데 우리는 그들의 서사를 읽으며 도덕적 판단이 흔들리거나 최소한 악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돼 당혹스러워한다.
그 사실이 둘째 부조리로 이어진다. 인류사에는 한 개인의 광증이나 직업 범죄자의 탐욕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거대한 악행이 있어 왔다. 성전(聖戰)이라고 하는 끔찍한 집단 학살을 저지른 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이 정의를 수행한다고 여겼다. 상대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얄팍한 서사를 굳게 믿었기에, 그 이상의 서사를 들으려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악인을 처단하기 위해 악행을 반복하는 지독한 아이러니는 작은 규모로도 흔히 일어난다. 어느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특정 멤버를 괴롭힌 것 같다는 심증으로 전 국민이 그 청년들을 괴롭힌다.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굳게 믿을수록 더 잔인해진다. 호모사피엔스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나는 그보다는 늘 흔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쉽게 악마화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서사 없는 악인을 시원하게 응징하는 복수극이야말로 가장 ‘비윤리적인’ 픽션 아닐까 싶다.
선정적인 범죄 보도가 낳을 수 있는 피해가 있다. 악인을 평범한 사람보다 더 자유롭고 더 유능한 것으로 묘사하며 악행을 매혹적으로 그리는 창작물도 있다(그런데 화려한 스포츠카가 등장하는 갱스터 랩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 비서 사적 요소도 그런 선망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런 선정성과 도덕적 무감각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의 서사를 막자는 발상은 상투적 범죄물 속 악인의 초상만큼이나 얄팍하다. 그리고 위험하다."

그러고 보면 홍길동은 대도이고, 임꺽정은 산적, 장보고는 해적이다. 우리는 이들을 악인이라 하지 않는다. 영웅, 의적, 호걸, 위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요즘 미디어가 좀 심하게 악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경종이 될지, 모방이 될지 선택 또한 개인의 몫으로 두어야 하는 건가?... 역시 어렵다.

"이런 세계에서ㅓ 우리는 창작물의 악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악역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하지만 서사를 주지 않고 악역을 최대한 단순히 만들어도 누군가는 결국 그 악당을 옹호할 핑계를 찾아내 제멋대로 서사를 덕분일 것이다.
하나의 완벽한 해답은 없을 것이고 아마 우리는 매 창작마다 새로운 전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영화는 영화일 뿐,' '소설은 소설일 뿐' 같은 말은 거짓말이다. 어느 작가가 세상을 향해 한마디라도 던졌다면 우리는 그 말의 여파로 세상이 꿈틀거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 ( 듀나 본문 중)"

나는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선과 악을 판결할 권한 또한 나에게는 없다. 다만, 지금 세상의 문화를 정치를 사회를 올바른 시각으로 볼 수 있고, 좋은 책을, 영화를, 드라마를 고를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책을 열심히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모든 작가님들 부탁드립니다.

"악이라는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재현하는 서사는 '앎'의 서사를 쌓아 올린다. 앎의 서사는 달리 보는 눈을 통해 구체화된다. 달리 보기 위해 작가들은 많은 눈으로 보고나 다른 거리에서 본다.
악은 가해의 끝이 아니라 피해의 시작이다." (박혜진 본문 중)

악인의 서사

듀나 지음
돌고래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3년 10월 7일
0
비밀의 방님의 프로필 이미지

비밀의 방

@bimileuibang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상대도 자신을 좋아해 주면,
그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지 않을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
(생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은데.
내가 아무리 그의 이름을 불러 주어도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어주지 않는다.
짝사랑, 외사랑의 슬픔이다.

"어쨌든, 그날 밤, 리쯔웨이는 완곡하게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지만, 여전히 친구로서 그녀를 좋아했다. 교통사고가 있기 전까지 사실 그녀는 줄곧 힘들어했다. 심지어, 만약 이대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 번 생각하기도 했다. "

책 제목을 보고 편견을 가졌다. 아니 오독을 했다.
'상견녀?', '상간녀?' 제목이 웃긴다. 무슨 치정? 불륜 소설이려니 했다. 우연찮게 '너의 시간 속으로'라는 유튜브 Shorts 영상에서 전여빈의 엠펙 있는 연기에 과몰입 되어 무슨 드라마인지 궁금해 검색해 보았다.
대만 명작 想見你(너를 보고 싶어)를 리메이크한 드라마라고 한다. 극찬의 극찬이 넘쳐난다. 책으로도 나왔다기에 대만의 타임슬립은 어떤 식일까 하는 궁금증에 읽게 되었다.
처음의 기대는 청춘물 타임슬립 (기욤 뮈소) 정도로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역시 뻔한 청춘물에 타임슬립이군 하는 생각으로 1/3 지점을 지나는데 점점 빨려 들어간다. 어느새 장르가 바뀌었다. 상큼 발랄 로맨스에서 스릴 넘치는 추리 소설로 바뀌는 것 같더니 다시 애절하고 몽글몽글한 애정물에서 추리로 바뀐다.
로맨스와 추리를 왔다 갔다. 복잡한데 흥미롭고 재미있다.
2/3 지점을 넘어서는 거의 심장이 두근거기고 진땀이 난다. 이야기가 뻔하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왜 그리들 극찬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사랑은 늘 아프다.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관심과 사랑, 보살핌을 받고 싶어 했던 천윈루에게 나태주의 '풀꽃'을 읽어 주고 싶다.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잖아. 한 번만 기회를 줘, 네게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천원루는 공허한 눈빛으로 모쥔제를 보면서, 잠시 주의가 흐트러졌다.
“이 세상에서 내가 누구보다 널 좋아해. 게다가 난 네가 필요하다고, 약속할게. 온 힘을 다해 널 즐겁게 해줄 거야. 사랑받는 게, 보살핌을 받는 게 어떤 건지 느끼게 해 줄게."

달콤함과 애절한 사랑이 돌고 돌아 서로에게 꽃이 되어준 황위쉬안과 리쯔웨이의 사랑이 중심이지만. 먼 곳만 바라보는 천윈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선 모쥔제의 풀꽃 같은 사랑을 더 응원한다.

"그녀는 모쥔제를 바라보았다. 요즘 모쥔제는 계속 천윈루 곁에 있어주었다. 그는 항상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가 리쯔웨이는 아니었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주고, 진심으로 좋아해 준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 모든 연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상견니

지엔치펑 외 4명 지음
리플레이 펴냄

👍 외로울 때 추천!
2023년 9월 26일
0
비밀의 방님의 프로필 이미지

비밀의 방

@bimileuibang

나는, 사자도, 경찰도, 슈도, 선생도, 고슬링도 아니다. 이들처럼 독서 중독자가 되고 싶에 퇴짜를 맞으면서도 계속 모임에 지원을 하는 노마드이다. 독서광이 되고 싶어 이 책을 읽었는데 이들처럼 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노마드 처럼 계속 두들길 것이다. 퇴짜를 맞아도 매번 찾아가는 노마드 처럼, 포기하는 책이 많아도 또 사고, 빌리고, 선물 받아 읽을 것이다. 그럼 언제쯤 독서광이 될 것이다.

독서 초보자들에게 쉽게 독서의 재미를, 책 고르는 법, 도서관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학습만화 모드로 웃기고, 거칠고 단호하게 가르쳐 준다. 만화를 이렇게 진지하게 읽기는 처음이다.
푹 빠져서 단숨에 읽었단. 내가 아는 책, 가지고 있는 책, 읽은 책 얘기가 나오면 저절로 눈이 밝아져 아~~ 나도 좀 하는 군하는 자부심이 생긴다.

포인트 1.
웃기고 공감 가는 부분

독서 모임에서 절대로 꺼내서는 안되는 금기어(책, 저자)가 있다.
슈가 무심코 가져온 과자가 '마들렌'. 뒤늦게 후회하는 슈. 마들렌을 본 회원들의 반응이 웃음 포인트

슈: 여기가 다른 모임이었다면...
(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마들렌 장면
알아?
'아니'
'따뜻한 홍차에 찍어 먹는 마들렌
그걸 맛보는 순간 감미로운기쁨에
젖어 들며 예상치 못한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라" "그래? 난 앞으로
네가 떠오를 것 같은데")

그러나 이 모임에서 프루스트의 마들렌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지긋 지긋해", "거 지겨운 레퍼토리 좀 바꾸라고".... 따위의 비난은 차라리 괜찮은 편이지. 더 근원적으로...
'세상에는 많은 책이 있지만 독서 중독자라 해도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소수일 뿐이다. 결국 살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게 되는 일이 많은데, 독서 중독자들은 남아도는 독서력으로 그럭저럭, 아니 심도 있는 수준까지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유독 할 말 없는 책들이 있으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중 하나다.'

그래서 모임에선 어지간하면 꺼내지 않는 주제이지만.....이 중 누군가 참지 못하고 내뱉을 가능서도 배제할 순 없다.

*선생 : 참 착해. 회원 중 누군가 프루스트 현상을 이야기하면, 프로이트를 거론하며 흐름을 바꾸자.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며.... 아니지!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큼 할 말이 딱히 없는 책이잖아. 누군가 눈치 없이 그쪽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면 마찬가지로 곤란해...

* 사자 : 생제르맹 귀족 동네를 드나드는 등장인물 스완 씨 이야기를 하다가 슬쩍 화제를 전환하는 거야.
"역시 축구는 파리 생제르맹이지!라고 말하면서..... 근데 다들 축알못이면 어쩌지? 아니, 그보다 난 살케 팬인데....

"고슬링: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 뒀잖아. 완독한 것처럼, 마지막 권 최고의 문장이라며 인용을 하는 거지.
'작품이란, 그 책이 없다면 아마도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못 가려내고 말 것을, 독자에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는 볼 일 이 갑자기 생겼다며 자리를 먼저 뜨는 거야.. 치고 빠지는 전술..

이렇듯. 프루스트는 독충들에게도 힘겹다. ㅎㅎㅎ
솔직히 마들렌 얘기는 좀 지겹다. 나는 몇 년째 1권부터 4권을 도돌이표처럼 반복 중이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역시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몇 년째 감상 중이다. ㅋㅋㅋ.

포인트 2.
헉, 이런 교향? 만화에도 뒤통수치는 반전이! 허를 찌른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이창현 지음
사계절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3년 9월 19일
0

비밀의 방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