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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이유

자끄 엘륄 지음
규장(규장문화사) 펴냄

이 책은 구약 성경 '전도서'의 내용을 더 깊이 상고해볼 수 있게 도와준다. 헛된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니, 참되고 유익한 인생이 되도록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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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하여(역자의 글)
엘룰은 자신의 변증법의 결론 역시 성경에서 찾았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한 전도서 해석이다. '결론'이란 모든 분석을 마친 후에 내리는 최후의 말이다. 그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코헬레트(히브리어로 '전도자'를 뜻함. 어원에 대해서는 이 책의 '논쟁적 후기'의 내용 참조)의 최종 분석에 동의한다.


1장 첫말
전도서의 첫 번째 낱말(헛됨)부터 우리를 멈추게 한다. 히브리어 '헤벨(hebel)'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안개'이다. 모든 것이 아침에 땅에서 올라와 태양 속으로 사라지는 안개처럼 흩어진다. 다음으로 '헛됨'이다. 즉, 이런저런 길로 들어서서 이런저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다 헛되다는 말이다. 아벨은 의인이요 경건한 사람으로서 희생제물을 드렸다. 그런데 그것 또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의(義)가 살해당해 죽었다. 그는 그렇게 당할 짓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사라졌다.
진보란 없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며 또 뜬다. 그것은 항상 그렇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얼마 후 남으로 되돌아온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되, 바다는 채워지지 않는다. 강물은 그것이 가는 곳에서 그 흐름을 되풀이한다.
코헬레트가 기원전 5~3세기에 전도서를 썼을 때,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살았던 근동지역에 3천 년에 걸쳐 새로운 것들이 있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과학과 기술, 도구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전도서 1장 8절에서 지적하듯이 인간에 대해 말한다. 새것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의 진보란 없다. 인간은 언제나 더욱 완벽한 도구들을 가질 수 있다. 그는 더 많은 것들을 조작할 수 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이 아니다.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그의 조건(시공간) 속에 갇힌 채 남아 있다.
징기스칸이 칼로 살해했던 것과 우리가 핵폭탄으로 살해하는 것 사이에 행위 방식에는 현저한 변화가 있지만, 죽인다는 행위 자체에는 변화가 없다. 살인, 탐욕, 지배 등은 변하지 않는다. 참으로 해 아래서 새것이란 결코 없다. 고전적인 구별방법을 사용하자면, 인류의 양적인 성장은 있을 수 있으나, 질적인 발전은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 무(無)로 귀결하는가? 우리가 계획하는 든 것이 무 외에 다른 출구를 갖지 못하는가? 아니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이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
1장에서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무익하며 진보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 뒤, 즉시 2장에서 철저하게 시작한다. 코헬레트의 태도에는 모순이 없다. 오히려 반대로 심오한 일관성이 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단지 현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늘,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어야 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2장 묵상
인간의 삶은 오직 단 한 번 일어나고,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인지 나쁜 결정인지를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오직 단 한 번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결정들을 비교해볼 수 있도록 제이, 제삼, 제사의 삶이 우리에게 부여되지 않는다.


3장 권력
악당이 있어 그가 권력을 가질 때 우연히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악당은 위에 있는 더 나쁜 자들에게 복종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더 높은 곳에 있는 더 나쁜 자들에게 굴복한다. 이와 같이 권력의 사다리로 올라갈수록, 상대해야 할 자들은 더 악하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전 4:2). 이것은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단언하는 몇 안 되는 성경 본문 중의 한 곳이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기 때문이며, 피억압자가 의지할 곳이 아무도 그의 눈물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며, 폭력이 사방에 있기 때문이며, 위로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것이다.


4장 돈
두 번째 큰 헛됨은 돈이다. 본질적인 것은 근본적인 모순에 있다. 즉 돈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과 돈이 헛되다는 것이다. 돈을 추구하는 것은 끝이 없다. 결코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 우리가 살고 바랄 뿐인 구경거리의 사회는 돈에 대한 갈망과 사랑을 암시한다.
돈을 쓰든 간직하든 간에, 돈은 환상이요, 연기요, 안개이다. 그것을 중요시하는 것이 헛됨이다.
당신은 부자로 죽지만 마치 가난한 죽음과도 같을 것이다. 죽음 저편에서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 부를 얻고 후손에게 남기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이 후손이 뭘 할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너는 네가 남기는 것이 어디에 쓰일지 모른다."
돈은 순전히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행복 -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기 - 과 관련된다. 이것은 그다지 악한 것이 아니다. 결국 악이란, 돈을 모든 것을 가능케 하며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 시대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지 돈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수단은 기술이다(나를 원망하지 말라). 그러나 이 기술은 돈이 있을 경우에만 구체적으로 활동하며 발전할 수 있다. 어제 인간을 지배한 것이 돈의 매력이었다면, 오늘날은 기술의 매력이다.


5장 노동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일하는 것이 결국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이 성취하는 것은 즉시 연기로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이것은 이미 노동이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고 아무 가치도 없음을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우리 입에는 오직 한마디 말뿐이다. 즉, '기회의 평등', '재능의 인정', 정의, 그리고 공정한 보수를 받을 권리이다. 결국 창출된 가치에 따라 온전히 임금이 평등하기를 바란다. 코헬레트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며, 우리의 존재와 이 세상 속에 내재하고 있다. 가장 좋은 노동과 노동 조직과 경제 조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도 당신은 인간에게 닥치는 불리한 때와 가혹한 시간을 막지 못하리라. 당신은 '행운'과 '우연'을 막을 수 없으리라.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가 도래하는 날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4:4). 일의 경쟁, 다른 사람들의 제거, 최강자의 승리, 성공했을 때의 시기 유발! 이것이 노동이다.
이러한 소송 앞에서 "노동을 정죄하자, 일하기를 멈추자"라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전도자의 교훈이 아니다. 일하지 않기 위해서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전 4:5).
일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 3:10). 조금 뒤에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수고'(전 3:13)가 나온다. 그러므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노동이 유익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선물이기 때문이다.
노동이 헛되고 무익한가? 궁극적으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헛된 것에 열정을 쏟을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모든 것을 시도해야 한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우리를 게으름으로 이끄는 자의 이상한 충고인가) 이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지는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 당신은 당신의 일의 효과와 열매를 모른다. 그러므로 시도하고, 애쓰고, 시작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녀라. 이것이건 저것이건 성공할 수 있다. 효과와 결과는 당신의 소관이 아니다. 철저히 우연의 소관이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유익한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런 것인지 알려고 그렇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이 당신의 손에 미친다면 그것을 완성하라.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손이 할 수 있는 대로 희생물을 찾는 살인자, 전쟁을 벌일 뿐인 군인 등으로 무한히 위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일은 헛된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야 한다? 일이란 부조리하지만 모든 것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코헬레트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계시이다.


6장 행복
코헬레트는 행복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헛된 것임을 마치 서문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초의 충동이었고 최초의 시도였다. 행복은 어제나 오늘이나 헛되고 어리석고 무의미(행복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행복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지만 주의하라. 이것은 절대 최상급이 아니다. 그것은 '해 아래서'의 인간 조건과 관계된 것이다. 그것은 헛되지만 나머지 것들보다 낫다는 것이다. 첫째로 행복이란 역시 자기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는 데 있다(전 3:22). 둘째로 확실히 고려해야 할 차원은 사랑하는 아내와의 관계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전 9:9). 이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고 경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헛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행복이 헛되다는 사실 때문에 낙담하지 말라. 당신이 행복할 때 주저 없이 행복하며, 이 단순한 행복에 빠져라. 축제는 즐거운 것이다. 우울한 생각은 갖지 말라. 음식과 포도주는 좋은 것이다. 그 밖의 것을 추구하지 말라. 오늘은 행복의 날이다. 이 순간을 절정으로 살아라. 내일 불행이 찾아올 것이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마 6:34). 특별히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서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날을 생각할지로다 …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전 11:8,9). 우리는 인간의 수단으로, 단지 우리의 인간적인 수단만으로 훨씬 더 잘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헛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아볼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7장 선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가 같은 방식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이다. 정의가 없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의인이 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어떤 보상도 없다. 모든 것이 헛됨의 작용에 의해 뒤집히거나 왜곡되거나 혼동된다.
인정받거나 좀 더 나은 명성을 기대하지 말라. 선하고 의로워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평가되려는 생각을 갖지 말라. 그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와 사회는 헛됨과 악의 토대 위에 있으며, 어떤 식으로 건 우리에게 최소한의 기준도 제공할 수 없다.


8장 인간적인 답
만일 모든 것이 이처럼 무(無)로 귀결하고,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데로 귀결한다면, 빈손으로 남게 될 것을 애써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 애써 바람을 잡을 가치가 있는가? 가치가 없다. 하지만 아무튼 살아야 할 시간, 만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시간이 있다. 비록 상대적인 것들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높이에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상대성이 그 절정과 완전성에 이르는 것을 다음 구절에서 발견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니나"(전 3:1).
코헬레트는 결코 자살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렇다. 살아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 근원을 보게 될 것이다. 살아야 한다.


10장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가 사물에 있지 않고, 반대로 사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연 가운데 지혜를 연구해서는 안 되고 지혜를 통해 자연을 연구해야 한다.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하며, 배워야 한다.
코헬레트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지식과 지혜를 분리하는 것은 막중한 오류이다. 그러나 지혜 역시 '해결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헛됨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한편에 지혜가 있고 다른 편에 광기와 미련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코헬레트에게 이것은 외양상 명백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다. 우매자가 우매한 것인지 지혜자가 지혜로운지 결코 확실하지 않다. 무엇을 기준으로 나눌 것인가? 이런 질문은 전도서 전면에 걸쳐 제시된다. 이것은 세상에서 바르게 처신하기 위해 근본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지혜의 업적은 오직 한 사람의 죄인, 즉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망가뜨리는 자에 의해 결국 못쓰게 되고 소멸된다. 외양상 순전히 인간적인 사건에서도 지혜는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연대(連帶)를 보여준다. 지혜자는 타인들에게 유익할 수 있고 그들을 구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룹, 사회, 국가 안에 있는 한 죄인의 영향력을 이길 수 없다. 이것이 지혜의 한계이다.


11장 반어법
지혜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지혜도 잊혀진다. 우리는 지혜가 별도의 위대함이라든지 객관적 체계가 아니라, 지혜자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음을 봐야 할 것이다. 지혜자가 잊혀질 때 그가 생각하고 하고 입증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오늘날 이 교훈들을 말하고 경고하며 젊은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설명하는 것이 엄밀하게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힘들여 매울 수 있었던 지혜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지혜자는 잊혀졌고 그의 지혜는 쓸모없다. 그 무엇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될 수 없다. 1930년대에 저질러진 어리석음은 1960년대와 1980년대에 다시 반복된다.
지혜가 돈을 벌고 사회에서 자리를 마련하여 명예를 얻는 데 매우 유용한 반면, 진정 지혜로운 자는 경멸되고 거부된다. 당신이 '지혜로울수록', 당신은 모든 것이 헛되며 바람을 잡는 것임을 배운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고통을 증가시킨다.
'도덕적 용어로 이 무제한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탐욕이라고 불린다. 어떤 사물이나 쾌락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등됨을 탐하는 것이다. 즉, 지식(과학)으로 소유할 수 있는 (물론 무의식적이고 순수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탐하는 것이다. 지식에 의해 얻은 소유의 덕택으로 인간존재가 무한정 증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번뇌의 근원이며 다른 번뇌는 없다. 그리고 이것이 지식에 대한 커다란 열정이며, 이것만이 절대적인 탐욕을 만족시킨다.
고통은 지식에 대한 탐욕과 가능성 사이의 결합에서 유래한다. 지식은 인간에게 최종적인 답을 결코 주지 못하며, 탐욕은 항상 더욱 멀리 계속 전진하기를 요구한다. 지식은 그 자신 논리만으로 전진하지 않고 이 논리와 인간의 탐욕의 결합에 의해 전진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으로 무한히 고통당한다. "너희가 욕심을 내지만 얻지 못한다"(약 4:2).


12장 참된 지혜
오히려 지혜의 첫 번째 말은 이미 지혜의 헛됨과 그 한계를 인정하는 데 있었다. 코헬레트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런 분별력 가운데서 살고 노동하고 기뻐하도록 초대한다. 이 분별력이란 의미가 없다는 확실성, 우리를 명확하게 해주고 사물을 정돈하며 세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도덕적 가치의 범위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지혜란 없다는 끊임없이 확인되는 확실성이다. 지혜란 "그렇지만…."이다. 인간이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참 지혜는 가능한 지혜가 없다는 식견을 갖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변한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예언서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꾸도록 해다. 얼마나 많은 역사가들이, 매우 유치하게도,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선지자가 실수했다고 쓸 수 있었던가. 하지만 정반대이다. 예고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예언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예언의 목적은 인간에게 피해야 할 것과 피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완벽하고 패러다임적인 예는 요나의 예언이다. 파국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견해를 바꾸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처신이 바뀜으로써 하나님이 뒤로 물러나 사태를 처음으로 돌리신 것이다.
코헬레트는 우리가 미래를 장악하여도 현재로 소급하는 것이 전적으로 헛되다고 경고한다. 당신은 누구도 훈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일을 모르는 이상 무엇이 좋은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돈을 유익한 방식으로 축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결국 그 돈의 유익을 누가 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노동에 삶의 의미를 둘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업적을 내일 누가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쉴리방은 에밀 시오랑(Emil Cioran)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시오랑은 말하기를, 죽음이 삶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그러면 달리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삶이 죽음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13장 지혜의 시험
지혜의 두 기둥은 불가해한 미래에 대한 인식과 만물 안에 있는 죽음의 식별이다. 매우 놀랍게도 코헬레트에게는 헛된 것으로 선포되지 않는 유일한 인간 실재가 있는데, 그것은 '말'이다.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호 유사성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끊임없이 헛됨에 빠질 위험이 있다. 말이 많음은 악이요 재앙이다. (당신의) 말이 많을수록 (당신의) 존재는 줄어든다. 말의 홍수는 존재의 축소를 낳는다.
말은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 코헬레트는 대화에 있어서,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도, 신중할 것을 권면한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전 5:4,5).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말에 신중해야 하며 자신의 언어를 다스려야 한다. 당신은 말에 근거해 파산된다(우리가 흔히 우리의 행위로 판단된다고 믿어온 것과는 반대이다). 당신이 함부로 말할 경우 하나님은 이 말과 관련해 당신이 행하는 것을 파괴할 수 있다.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게 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 5:6하).
코헬레트는 우리로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첫째로 그는 "낭비하는 법, 대비하지 않는 법, 집착하지 않는 법, 걱정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했고, 둘째로, "주고 나누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했다. "오늘 주고 지금 나눠라. 왜냐하면 내일 재앙이 네게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일 어쩌면 당신은 더 이상 줄 수 없을지도 모르며, 나눠줄 것이 당신에게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상황이 당신에게 유리하기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리 못하리라"(전 11:4).
성공은 어떤 것인가? 여전히 상대적인 것으로, 당신이 성공했을 때 당신은 타인에게 줄 수 있고 당신의 식물을 물에 던질 수 있다는 유익 외에 다른 것이 없는 성공이다. 소유란 이런 것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15장 엘로힘
전도서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엘로힘(Elohim)으로 불리며, 결코 자신의 백성에게 계시된 이름인 거룩한 네 글자 말(YHWH, 즉 '야훼')이 아니다.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이며(창세기 1장), 우주 생성의 주체이다. 엘로힘은 복수형인 반면, 일반적으로 그것과 함께 쓰이는 동사들은 단수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한 분이신 다수의 하나님(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엘로힘은 그가 특별한 관계를 세우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 시 또 다른 독특함을 보여준다. 엘로힘은 모든 것과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신'이란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엘로힘이 멀리 있는 절대적인 신이라면, 야훼는 자신을 드러내고 우리 역사에 들어와서 인간 존재에 참여하는 신이다. 엘로힘은 자격 없는 어떤 신성의 의미가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의 의미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우리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타자이며, 그를 고착시키고자 하는 곳과는 다른 곳에 계시다.
그런데 코헬레트가 전적으로 확신하는 한 가지 현실이 있다. 그것은 이 캄캄하게 감춰진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고 그 곁에 있으며 우리의 삶에 침투해 있어 그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행동과 경험과 지혜와 지식에서 하나님을 축출하려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커져 압도적인 존재가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동시에 보아야 하며, 만사를 붙들고 계시는 이 하나님에 대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16장 모순
우리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울 때, 이러한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때가 있음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17장 주시는 하나님
무엇보다도 먼저 '주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이 백성의 하나님이었던 분이다. 자유를 주셨고, 율법을 주셨으며, 언약을 주셨고, 말씀을 주셨으며,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던 하나님이다. 그는 모든 것을 선물로 시작한다.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이 베푸신 재능(선물)에 입각하여 인간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감사는 완전히 동일하게 무상의 것이다. 하나님은 의무 없이 표현되는 마음의 자유로운 기쁨일 경우에만 그 감사를 즐거워하신다. 선물은 도덕, 구속(拘束), 상호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는 '업적에 의한 구원'이란 없다.
기쁨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기쁨을 줄 수 있는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하며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환영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물은 또한 노동이 행복을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 전 3:13, 5:18,19).
다른 모든 오류의 근원인 핵심적인 오류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계화하거나 영(靈)을 법제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적인 실재에 입각해 논리적인 추론을 펴서 "즐거움이나 부가 있다면,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그 즐거움이 가장 비열하고 야만적이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어떤 것이라도, 그 부가 어떤 것이라도). 한편 코헬레트가 보여주는 길은 무엇이 하나님의 선물인지 식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을 식별하고 그의 활동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 최상의 것이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전 2:26). 전도서에는 하나님이 착한 사람을 행복하고 번창하게 해준다는 '주장' - 전통적인 교훈(일례로 욥을 보라) - 이라고는 결코 없다. 하나님이 지혜, 지식, 희락을 주었고 그것이 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착하게 만들었다. 그는 실제로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선물을 배가시켰다.
"청년이여 네 어릴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궁극적으로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심판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심판이란 즐거움의 날개를 자르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즐거움의 의미와 깊이와 지속을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직 복된 소식의 보장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담당하신 몫이다. 아직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이 그의 심판을 통해 정의를 주신다는 확언이다.
무엇보다도 코헬레트는 하나님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그는 당신에게 젊음과 힘과 심지어 즐거움을 주신다. 당신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직 악이란 정확히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음을 망각하는 것이리라.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오직 지혜만이 선물과 심판 사이의 바른 관계에 있다.


18장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내가 정녕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행복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앞에서 경외를 경험하기 때문이다"(전 8:1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행복하다. 이 경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경험하는 자에게 주님의 임재를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19장 전도자의 최종 교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청년의 때 하나님을 기억하라. 즉, 모든 가능성이 당신 앞에 열려 있는 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당신 힘이 온전히 남아 있는 때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때는 노망이 들거나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가 되었을 때가 아니다. 당신의 구원에 너무 늦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과 이 창조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위해 섬기는 일에 너무 늦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시편 111편 10절). 이제 우리는 "누가 우매와 지혜를 분별하며, 이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갖는다. 코헬레트는 지혜가 오직 첫걸음 -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걸음 - 만을 따른다는 것을 안다. 나머지 모든 것은 그것에서 유래하는 바, 곧 헛됨, 덧없는 즐거움,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 인간의 미친 행동이다.


논쟁적 후기: 나는 왜 이 책을 써야만 했는가?
전도서는 하나의 결론이지 가능한 출발점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본문 자체에 부합한다고 여긴다. 전도서의 모든 단언과 이의 제기는 경험의 축적 후에 마치 구두점처럼 나타난다. 결과(outcome)가 아니라 결론(conclusion)이다. 왜냐하면 전도서에서 출발하여 또는 전도서 이후에 크게 할 말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많은 불확실한 것들 가운데서 적어도 히브리 역사가들과 주석자들이 일치하는 네 가지 사항이 있다. 먼저 기록 연대이다. 폭넓은 '격차'(BC 7세기에서 BC 3세기까지) 사이에서 많은 이견을 보인 끝에, 오늘날 본 텍스트는 BC 350~250년 경으로 연대가 잡힌다. 즉,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시기에 대한 선호와 더불어, 그 정복 전이건 후이건, 대략 320년이다. 두 번째 일치 사항은 솔로몬이 실제로 이 책 전체의 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저자로 지칭된 '코헬레트'의 어원이다. 마지막으로 코헬레트의 히브리어가 매우 서툴다는 것이 의견의 일치이다. 즉 거의 시적이지 않은 허풍 떠는 문체와 더불어 쇠퇴기의 변조된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것이 분명 찬란한 이국(異國)의 영향을 아들인 뒤 맛소라(Masoretic) 텍스트에 심각한 변화를 보여주는 화려하고 지나치게 장식적인 언어임을 인정한다.
'코헬레트'(qohelet)는 회중을 의미하는 '칼'(quhal)에서 유래한다. 내가 보기에 코헬레트는 직함이나 기능이 아니라 다만 동기 없는 명칭으로, 십중팔구 마지막 저자에게서 유래하며 책 전반에 표현된 '빈정댐'과 '문제 삼기'라는 문맥에 위치한다. 달리 말해, 명칭은 책의 내용으로 이해되어야지 어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석자들은 기록 연대가 결정된 이상 솔로몬은 전도서를 기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솔로몬은 텍스트에 명백하게 명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전도서를 쓴 의도에 대해 의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요 예루살렘의 왕인 다윗의 아들이다. 다시 말해 그는 두 왕국(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열 이전에 위치하며 따라서 솔로몬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헛됨'이란 단어 헤벨(hevel)이 우상들을 내포하며, 심지어 헛된 우상들로 번역될 수 있음을 볼 것이다. 그런데 통치 말년에 솔로몬이 우상숭배하는 왕이 되는 것을 잊지 말자. 모든 것이 연기, 헛됨, 우상이라는 선포는 솔로몬의 경험 그 자체와 관계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텍스트 자체로 집중하며 그것을 솔로몬의 권위 하에 위치시킨다. 그의 이름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다. 코헬레트는 마치 그가 왕인 것처럼 쓴다. 그는 자기 자리에 있다. 그는 자기 책이 마치 솔로몬에게서 유래한 듯이 그것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는 왕국 없는 왕이다. 그는 위대한 왕이 아니지만 왕처럼 자리 잡는다. 그의 책은 왕과의 관계를 표현한다(군주국을 정당화하고 백성으로 왕을 돕도록 불러내기까지 할 수 있는 왕이다). 코헬레트는 왕과 신하의 관계(어쩌면 왕과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의 명칭이다.
근본 질문들에 대한 이 간단한 회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내게 남은 것은 전도서가 숙곳(Souccoth) 축제의 주 낭독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다시 말하는 일이다. 숙곳이란 장막절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해 나무로 만든 오두막집 축제이다.
나는 이 축제의 전체 의미와 관련해 전도서의 전부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솔로몬이라는 왕의 책이요, 성전 헌당 책이요, 놀라운 언약의 책이요, 허술한 인간 피난처(나뭇가지 집)의 책이요, 헛된 인간 소유(광야)의 책이요, 하나님의 절대적 왕권의 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수확을 끝내고 겨울로 들어가는 시기의 책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백성에게는 기쁨의 시기요, 일주일 간의 축연이다. 그때 이 책은 백성에게 축연 그 자체의 헛됨을 상기시키며, 바로 복잡한 상징들로 인해, 그 의미가 피조물의 이해력에서 벗어나는 하나님의 활동의 신비를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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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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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수입과 지출에서 심리적으로 착각하는 부분까지 잘 지적하여 돈을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돈으로 얻으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하고, 돈의 노예기 되지 않고,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돈에는 이름이 없다
사람들은 돈을 구분해서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분은 아주 직관적이고 본능적이어서, 평생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마음속 회계장부라는 뜻으로 심적 회계 또는 심리계좌라고 부른다.
현금으로 구매하면 소비할 때 돈이 없어지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고 이것은 심리계좌에 즉각적으로 '손해'로 인식된다. 따라서 단지 카드만 긁으면 되는 신용카드가 아니라, 내 지갑에서 10만 원이 빠져나가는 걸 목격하는 상황에서 훨씬 신중한 소비를 하게 된다. 반대로 신용카드는 같은 물건이라도 더 쉽게 사게 만든다. 실제 돈을 지불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돈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돈도 안 썼는데 물건을 주니 소비가 공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신용카드를 쓰면 소비에 대한 경계심이 적어지고, 자연스럽게 소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심리계좌 때문에 생기는 착각의 결과다.

얼마나 버는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가장 많이 번 달만 기억하는 심리계좌의 착각은 당연히 지출 문제를 발생시킨다. 최고 소득 기준으로 지출 기준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소득이 불규칙해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돈 관리를 포기하면, 결국 잘못된 소득 기준과 지출 기준으로 인해 차후에 심각한 돈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득은 안정적이지 않고,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소득이 중단되면 실제 소득이 중단되는 것과 똑같이 재무적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득에도 소득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통장에 찍히는 소득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득까지를 '우리 집 소득'이라는 심리계좌에 넣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최소한 얼마 이상을 벌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저축은 많이 할수록 좋은 거 아닌가요?
저축에서는 이자가 아닌 원금이 훨씬 더 중요하다. 원금이 1억 원이면 연 4퍼센트 이자가 400만 원이지만, 원금이 100만 원이면 연 4퍼센트 이자는 4만 원이다. 이자를 1퍼센트 더 받아도 1년에 5만 원이고 1퍼센트 덜 받아도 3만 원이다. 원금이 적다면 1~2퍼센트의 이자 차이가 돈을 불리는 데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금리 0.1퍼센트를 더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때로는 먼 곳에 있는 은행을 찾아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남들보다 조금 더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우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원금을 생각하면 0.1퍼센트의 금리 차이가 주는 이익은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너무 미미한 수준이다.
저축의 목적은 단지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쓸 돈을 준비하는 것이다. 즉 '쓰기 위한 저축'이다.
그리고 저축은 원금이 중요하다. 원금을 키우려면 쓰지 않고 계속 모아야 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저축은 쓰기 위한 것이다.
이자가 물가상승률에 못 미친다고 할지라도 그 손해는 미미하고, 돈이 필요할 때 저축해 놓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걸로 저축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이다.

도대체 왜, 아껴 써도 늘 쪼들릴까요?
마음속 심리계좌는 내가 직접 쓴 것만 지출로 기억한다. 그것만 따지면 '많이 쓰고 사는 것도 아니다'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다.
고정지출은 지출 과정이 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심리계좌는 돈을 썼다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 결과 심리계좌가 파악하는 지출과 실제 소비액 사이에 큰 차이가 나고, "도대체 쓴 것도 얼마 없는데 왜 남는 돈이 없지."라는 푸념을 늘상 달고 살아가게 된다.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적자가계부를 흑자로 돌리기 위해서는 수시 생활비가 아니라 고정지출을 구조 조정해야 한다.
연봉 1억 원이면 모자람 없이 쓰고 저축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면 예외 없이 소득이 늘어난 만큼 많이 써야만 하는 구조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남들의 시선이나 생각을 무시하고 17평 아파트로 이사할 정도의 결단을 내려야만 고정지출을 줄일 수 있다. 지금의 지출 구조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막연히 아껴 써서 재무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고정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결단이 필요하다. 사교육비, 주거비, 보험료, 차 유지비 등 다 포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결국 편리함과 욕망에 이끌려 살 것이냐 불편함을 감수하고 실속을 챙길 것이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막연히 쓰는 것도 없는데 돈에 쪼들린다는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면 내 돈이 없어지는 모습이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을 쓰니 돈 쓰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진다. 돈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물건을 주니 심지어 소비가 공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신용카드를 쓰면 자연스럽게 소비가 늘어나는 것이다.
신용카드 세대는 내 돈이 아니라 빚으로 사는 삶이고,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일하는 삶이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닌 소비자이고, 소비를 할 때 올바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물건을 구매하는 첫 번째 조건은 '필요'해서여야만 한다. 그러나 세일과 할인은 구매의 첫 번째 조건을 '필요'에서 '가격'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린다. 구매라는 행위에는 사람들의 이성이 아닌 심리적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세일 때 샀으니 다른 사람은 받지 못한 할인을 받았다, 그래서 거래에 승리했다고 느끼는 만족감은 우리를 더 많이 소비하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더 많이 후회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당장 쓸 돈은 있으신가요?
'집값 상승=자산 증식'이 착각이라는 것,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심리계좌에 들어 있는 심리적 자산일 뿐 내 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집값이 오른다 한들 내 마음속 심리계좌만 불렸을 뿐 정작 나에게는 '하우스 푸어'라는 달갑지 않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료가 비싸지면 더불어서 보험사가 가져가는 사업비도 그와 비례해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보험설계사나 보험사라면 고객들에게 어떤 보험을 권유하겠는가? 당연히 사업비가 많이 나오는 만기환급형이지 않을까? 그러나 보험사는 "보장도 받으실 수 있고, 만기에 내신 보험금을 그대로 돌려드려요."라는 말로 우리를 유혹한다. 물론 여기에 만기환급형 보험료가 순수보장형의 두 배라는 점은 항상 빠져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순수보장형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한다. 심리계좌의 손실회피 성향 때문이다. 보험료를 열심히 냈는데 아프지 않아 단 한 번도 보험금을 못 탈 수도 있다. 순수보장형은 이런 경우에 만기 시점에 돈을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다. 열심히 보험료를 냈는데 아무것도 돌려받는 것이 없으니 사람들은 이것을 손해라고 생각하고 가능한 회피하려고 한다
저축성 보험은 가입자가 무조건 손해 보는 저축이다. 10만 원짜리 교육보험에 가입하면 실제 저축되는 돈, 즉 적립보험료는 10만 원보다 적다. 보험사의 사업비와 위험보험료를 제하고 난 나머지 돈만 적립되기 때문이다. 저축성 보험의 사업비 비율은 10~15퍼센트 정도로 10만 원짜리 저축성 보험이라면 한 달에 8만 5000원만 저축하는 것이며 이자도 8만 5000원에 한해서만 붙는다. 그래서 대부분 저축성 보험은 7년 정도가 지나야 겨우 원금에 도달하게 된다. 7년 동안 이자 한 푼 못 받고 저축하는 셈이다.
연금보험, 교육보험 등 모든 저축성 보험이 다 같은 원리로 운영된다. 10년 동안 보험료 냈다고 보험사가 고객들에게 감사하다고 뭔가를 더 얹어주지 않는다. 그냥 내가 낸 돈, 그것도 다가 아니라 사업비를 제하고 난 나머지 돈을 모아 놓고 있다가 만기에 주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커다란 혜택이나 특혜는 숨어 있지 않다. 굳이 장점을 찾자면 장기간 꾸준히 돈을 모았기에 목돈을 쥘 수 있다는 정도다.

당신도 혹시 채무노예 아닌가요?
빚이 있지만 잘 갚고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위험이 닥친다면?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해진다면? 부채는 언젠가 생길 수도 있는 돈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고, 악순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빚으로 하는 투자는 자산 가격이 다시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빚으로 투자하는 경우 자산 가격이 오른다고 해도 반드시 이익을 본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정해 놓은 원칙보다는 주변 상황에 더 휘둘리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벌어야 돈 걱정이 없을까?
가처분소득은 세금이나 이자 같은 금융비용을 제외하고 언제든 자유롭게 소비나 저축에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범위를 좀더 좁혀 자유롭게 저축할 수 있는 돈을 가처분소득이라 규정짓겠다. 소득이 늘지 않더라도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면 결과적으로 돈을 더 버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가처분소득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매월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
어떤 물건들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매월 고정지출을 발생시킨다. 자동차는 소유하는 순간 주유비와 세금이라는 고정지출을, 더 큰 냉장고는 더 많은 전기세를, 5평 넓은 집은 그만큼의 관리비 부담을 선물한다. 뭔가를 새롭게 소유하기 전에 매달 고정지출이 추가로 발생하지는 않을지, 그 지출을 내가 부담할 수 있을지 따져보아야 한다.
"노후준비를 해야 한다, 노후 생활비로 20억 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하고 조바심을 불러일으킨다.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수입의 10퍼센트는 노후준비에 써야 한다고 힘주어 권유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혹시 노후대비용 금융상품 판매를 노린 공포마케팅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어떻게 써야 후회가 없을까?
소비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소비주의는 정서적·사회적 욕구를 쇼핑으로 충족하려 하고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규정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합리적인 소비자는 비슷한 물건이라면 더 싼 것을 선택하고, 세 배 비싼 물건이 있다면 세 배만큼의 효용이 있어야만 그 물건을 산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그 물건이 나에게 주는 효용이나 가치보다는, 그 물건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남들과 비교할수록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더 많이 소비하려면 더 많이 벌어야 하기에 시간과 건강을 희생해야 하고, 그나마 있는 여가 시간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TV 보기로 때운다. 자신이 '일하고→TV 보고→소비하고→더 일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소비를 참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어렵고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자제하면 할수록 오히려 충동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에 무작정 참는 것보다는 당장의 소비욕구를 지금 적절하게 실현하는 것이 소비에 대한 건강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무조건 아끼고 절약하는 것도, 그렇다고 나중 생각은 하지 않고 다 써버리는 것도 모두 옳지 못하다. 물 샐 틈 없는 돈 관리란 '나와 내 가족의 욕구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우선 순위에 맞게 가장 효과적인 비율로 돈을 배분하여 욕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쓸 돈만 모으면 된다
가장 먼저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사람은 가정에서 소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보험은 이 사람에게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가장이 보험가입 1순위가 된다. 어떤 집은 아이들을 위한다며 부모 보험이 아닌아이들 보험만 잔뜩 들어 놓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투자 안 하고 살아도 된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일단 투자를 하면 까먹을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고 주식시장의 오르내림에 나의 하루하루 기분이 좌우된다. 투자를 하겠다고 결정하기 전에 그런 삶이 과연 나에게 행복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돈을 잘 불리는 것은 내 돈을 손해 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한다. 맘 편하게 필요한 돈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투자만큼 화려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행복지수는 훨씬 더 높을 것이다.

돈이 아닌 행복을 관리하라
특히 사람들이 잘 적응하는 것, 즉 쉽게 질려서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소득과 소비다. 월급이 10퍼센트 오르면 처음에는 기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그 감정은 사라진다. 자동차나 TV, 심지어 집을 새로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사람들이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바로 사랑, 우정, 좋은 인간관계, 건강, 행복한 결혼 같은 것이다. 이것들은 쉽게 질리지 않고, 지속적인 만족감을 준다. 그래서 돈을 모으고 불리는 것보다 사람 노릇 제대로 하는 것이 더 행복하기도 하다. 내 용돈을 줄여서라도 부모님 생활비를 보내는 것이, 여행을 포기하고 동생 등록금을 대는 것이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노력 이전에 내가 잘 적응하지 않는 것들, 질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찾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 나와 내 가족이 지속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에 돈을 쓸 수 있고, 결과적으로 돈으로 욕망만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사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질적인 것만을 기준으로 남들과 비교하며 살면, 그 삶에는 주체성이 없고 자신감도 없어진다. 진정한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돈과 사회적 지위를 중요시하는 물질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두통이나 우울증을 호소하는 비율이 더 높다고 한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끊는 것, 그리고 나만의 가치 있는 삶의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고, 많이 쓰고 살면서도 늘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만약 돈을 많이 벌어 미래 불안이 해소된다면 돈 잘 버는 사람들은 미래 불안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이런 사람들을 만나보면 누구 못지 않게 미래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한다.
소득이 높은 사람은 삶의 기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높은 기준을 10년이 아니라 평생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하다. 지금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은퇴하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보니, 미래에 지금 생활 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은 늘 이들을 짓누른다.
'꼭 내 집을 가지지 않더라도 빚 지고는 살지 않겠다. 아이들 영어유치원은 안 보내지만 대학 등록금은 적어도 절반이라도 해주겠다. 나이 들면 부부가 15평 집에서 살겠다. 네 식구뿐이니 차는 중형차만 갖겠다. 매년은 아니지만 10년에 한 번은 해외로 여행을 가겠다. 자녀 결혼 때 집은 못 사줘도 노후병원비는 내 힘으로 마련하겠다. 마흔 살까지는 기타를 꼭 배우겠다.'는 식으로 가족구성원들의 필요 욕구를 구체화하고 관리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만들어진 필요 욕구가 크다면 당연히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소박한 욕구로도 만족스럽게 살 수 있다면 돈벌이 외에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미래 불안은 이렇게 필요한 것을 구체화한 후, 능력의 한도 내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욕구를 선택하면서 해소되는 것이지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심리계좌

이지영 지음
살림Biz 펴냄

2021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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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바

@1b7mgtbsu2je

자녀 교육의 바이블이라고 할까... 여러 책을 읽어봤지만, 이 책은 손꼽을만하다. 내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 최고의 양육법임을 깨닫게 해준다.




서문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여 다 훌륭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근원은 오늘날 교육을 비롯한 사회의 전 분야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인본주의라는 사상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자녀 양육, 어떻게 할까?

자녀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즉 복된 선물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부모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최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본능뿐 아니라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인간은 피동적으로 사랑을 받을 때보다도 사랑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삶의 의미를 느낀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 사람은 행복감에 젖을뿐 아니라 삶이 풍요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아이가 독립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자라도록 하기보다 엄마의 치마폭에 언제까지나 보호하고 싶어하고 자기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자녀가 사랑스러운 나머지 어렵고 힘든 일뿐 아니라 해야 할 일까지도 대신해 주는 부모들이 문제다.

이 시대는 참으로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의 영혼과 삶을 악한 자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양육해야 할 때이다.

이 세대는 존경심과 권위를 상실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겉치레의 존경심과 억압적인 권위는 배격되어야 할 것이지만 마땅히 가져야 할 존경심과 올바른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는 교육을 능가하게 하는 내적인 영향력을 지닌 힘이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특기교육이나 지능개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이에게 어떤 습관을 길러주고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게 해 주며 어떤 가치관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 인생의 참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자녀에게서 바람직하지 못한 면을 발견하고 크게 낙담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일수록 염려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잘못을 고쳐주고 바르게 인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동시에 소망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속적 인본주의에 근거한 인본주의 교육의 문제는 바로 이처럼 인간이 가진 능력을 최대로 계발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할 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여러 가지 측면 중에서 지적 능력 발달과 아이가 느끼는 감정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지는 못한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행동이라면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부모의 가치관을 자녀에게 강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비롯한 일체의 가치를 자녀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인본주의란 본래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한 것인데 사회와 인간의 사고가 세속화되면서 하나님을 배격하고 모든 일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이 되었다.

종래의 교육이 억압과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율과 자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위험한 일이다. 인간은 이끌어줌이 없이 자율에만 맡기어도 될 만큼 선하지 않으며, 자율 없이 이끌고 지시하는 것에만 의존하는 기계적이고 피동적인 존재가 되어서도 안된다.





2/ 그리스도인의 자녀 교육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자녀의 생명과 생애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 즉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양육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또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관리하는 자이므로 주인의 소유에 대하여 함부로 취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함부로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자녀를 이용해서도 안되고 부당한 짐을 지워서도 안된다.

유대인들은 세계적으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교육에 있어서 도덕, 즉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첫 번째 목적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흔히 가정교육은 어머니의 책임이고 지식 교육은 학교의 책임이며 신앙교육은 교회가 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발달해 가는 학문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학교나 책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신앙은 삶 자체이기 때문에 자녀들과 삶을 같이 하는 부모를 통해 이루어질 때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자녀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

자녀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잠언 1장 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며 이를 멸시하는 자를 가리켜 미련하다고 한다. 다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외해야 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세 번째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





3/ 사랑을 느끼게 하라

에베소서 6장 4절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삶의 모범과 인내하고 관용하는 사랑이라고 요약될 것이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마음과 삶을 읽을 수 있는 이성과 감성이 있으므로 그것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가끔 “엄마는 너를 사랑해.”라고 속삭여 주거나 “아빠에게 가장 귀중한 보물은 바로 너희들이다.”라고 말해준다면 자녀들이 더없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의 행복감이 물질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이 느끼는 진정한 행복감은 욕구 만족으로 인해 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느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희생적인 사랑이란 자녀의 복되고 보람 있는 사람을 위해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지 부모의 야심이나 욕구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이 부모 자신의 일로 지나치게 바쁠 때 그들이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비록 자기들과 충분한 시간을 같이 있어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모가 자기들의 교육과 가정을 위해 애쓰는 것을 아는 자녀들은 결코 부모의 관심과 사랑의 부족으로 인한 공허감을 느끼지 않는다.

요즘에는 생일이라고 하여 비싼 선물을 받는 날로 오해하며 자라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보다는 아이의 생일을 온 가족이 함께 축하해 주고 그 아이가 태어난 것이 부모나 다른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축복이 되었는지를 말해준다면 자녀들은 가족의 사랑을 느끼며 행복해할 것이다.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책망하고 훈계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때로 벌을 주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부모가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고 훈계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을 인정해 주고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주고 격려해 주는 것은 아이가 자신의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힘을 길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자아개념을 심어주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흠뻑 느끼게 하는 일이다.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을 통해 자신이 귀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혹 아이가 칭찬받을 만한 어떤 능력이나 소질을 타고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생을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그들이 귀중한 존재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이며 부모에게 있어서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가정의 분위기는 자녀들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행복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체로 밝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다. 가정은 자라나는 자녀들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부모다.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은 첫째 부모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다. 부모의 불평 소리는 자녀에게 불평하는 습관을 만들어 준다. 다음으로 부부 사이의 관계다. 부부 사이의 관계가 원만하면 자녀들은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게 된다. 셋째로는 형제애이다. 형제애를 해치는데 으뜸이 되는 것이 바로 부모의 편애이다. 넷째로 가족들이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다.





4/ 격노케 하지 말라

부모에게 분노하는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비뚤게 자라거나 반항하는 이이들 뒤에는 반드시 그들을 분노하게 한 부모가 있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잔소리와 꾸중을 많이 들을 때 낙심한다. 자녀들은 소리 지르는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 적당한 시기에 한 가지만 지적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지적할 때 주의할 점은 잘못한 행동 그 자체를 두고 나무라도록 해야지 인격까지 송두리째 비난하면 안 된다. 비난과 징계, 잔소리와 훈계는 구분되어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거나 꾸중할 때는 간단하면서도 엄하게 말하고 아이가 알아들었다고 생각되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이들은 부모가 간섭하거나 의심할 때보다 자기를 신뢰해 줄 때 오히려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으며 동시에 자기를 신뢰해 주는 부모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아이들은 편애를 하거나 남과 불리하게 비교할 때 분노한다. 상처와 낙심만이 남을 뿐이다.

아이들 싸움에 끼어들었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둘 사이에 잘잘못을 가리기 위한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아이에게 똑같이 벌을 주도록 해야 한다. 누구의 잘못으로 싸움이 일어났든지 간에 서로의 인격을 모독하는 언어를 사용하거나 폭력을 사용한 싸움 자체는 잘못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벌을 준 후 “왜 벌섰는지 이유를 아니?”라는 질문으로 아이의 반성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희들 왜 싸웠니?”하는 질문 등으로 다시 싸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급한 부모들은 자녀가 하리라고 예상되는 말을 대신해 준다. 설혹 그 말이 자녀의 마음을 꼭 그대로 나타내주는 말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자신이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저지당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 표현이 서투르더라도 자기가 표현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경청해 주는 부모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평소에 부모들이 자녀들의 말을 경청하며 자녀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들도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자녀들을 훈계하고 다스리는 방법으로 벌을 주거나 매를 들 때가 있는데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매를 대는 것은 극히 신중해야 한다. 성경에도 채찍은 아이에게 효과가 있다고 가르치는데 유대인 사회에서 만 13세에 성인식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만 13세 이후에는 아이들에게 매를 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꾸지람하는 것보다 잘한 일이 있을 때 칭찬해 주는 방법을 통해서 자녀들의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효과적인 대화법은 두 가지 기본적인 원리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원리는 관심 있게 들어주는 태도이다. 둘째 원리는 화를 내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5/ 마땅히 할 일을 가르치라

아이에게 지나치게 좋고 화려한 옷을 해 주는 것은 부모의 절제되지 못한 소비 성향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자녀들이 원하는 것이 곧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엄마들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하고 아이가 그 말을 들은 척 만 척해도 그대로 두는 것을 본다. “XX야, 그런 짓을 하면 못쓴다.” 하고 말하고는 실제로는 아이를 그대로 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옳지 않은 일을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으니 그대로 해도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아이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아이의 책임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이다.

벌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올바르고 선한 습관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훈련하는 것이다. 훈련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이 자녀들의 삶을 위하여 선하게 작용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녀들이 분명히 규칙을 어기거나 부모의 말을 거역했는데도 무심코 지나쳐 버린다면 그들은 규칙이나 부모의 말,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부모의 단호한 태도는 아이를 그릇된 길에서 구하는 최선의 예방책이 될 것이다.

훈계와 사랑은 상반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병행되어야 할 동반자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예부터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집의 자녀를 후레자식이라고 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엄한 권위 밑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배운 데 없이 제멋대로 자라서 버릇이 없는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의 가정교육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부재의 교육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흔히 아버지가 직장 일로 인해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가정에서 자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된다. 자녀들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면 비록 아버지가 자녀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더라도 아버지 부재의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아버지의 권위는 결국 부모의 권위를 말한다. 부부는 자녀들 앞에서 서로 상대방의 권위를 세워 줌으로써 자녀를 바로 교육할 수 있다.

왜 아버지의 권위가 그렇게 중요할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자녀들 곁에서 자녀들을 바로잡아 주고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지 자녀로 하여금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매를 사용하는 중요한 원칙은 부모와 아이가 다 매를 귀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매를 통해서 자녀의 올바른 삶을 귀중히 여기는 부모의 마음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징계는 반드시 사랑을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아이의 장점을 인정해 주고 칭찬거리가 있으면 자주 칭찬해 주고 아이의 소질을 무시한 것이 없는지 살펴서 격려해 주어야 한다. 아이가 남의 물건을 가져왔을 때는 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돌려주고 오너라.”라고 말한 다음 돌려주고 온 것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를 다그치는 것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나 훈시가 아니다. 아이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느낌으로써 부모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되면 부모가 싫어하는 행동은 차차 없어질 것이다.

예로부터 삼 대 부자가 없다는 말은 결국 자녀에게 돈을 관리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매일 용돈을 주는 방법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적절한 계기에 일주일 혹은 한 달 단위의 용돈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한 달 단위의 용돈을 줄 때는 군것질 혹은 작은 장난감들을 살 수 있는 돈과 간단한 학용품을 사야 할 돈을 구분 지어 주는 것이 좋다. 힘들더라도 용돈 사용은 반드시 훈련해야 할 부분이다.





6/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있는가?’, 나는 자녀에게 가르치는 바를 스스로도 모범적으로 행하고 있는가?’ 혹은 ‘나의 삶은 나의 신앙고백과 일치하는가?’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며 예비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스스로의 삶이 성숙될 뿐 아니라 사려 깊은 부모가 될 수 있다.

성교육에 대해서 더 중요시해야 할 부분은 성의 도덕성 문제와 책임감에 대한 문제이다.

지능 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자신의 욕심을 고집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를 사랑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공부는 왜 해야 하나요?" 하고 질문하는 아이에게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남보다 잘 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을 사용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을 잘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좋은 재능을 주시고, 그 재능을 잘 개발해서 이웃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훌륭하게 사는 사람이 되길 기대하고 계시는데 네가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않고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으면 될까?" 하는 내용을 담은 대답을 해 주면 좋을 것이다.





7/ 자녀 양육의 모범

우리에게는 요게벳과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귀중히 여기도록 가르치는 어머니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결코 믿음의 반열에서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맺음말

앞서 말한 모든 원리들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 자신의 삶의 모범이다. 자녀 양육에 관하여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 부모라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할 만한 신앙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 지식은 무용지물인 셈이다.

항상 말씀에 비추어 부모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자라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로 우리 자녀들을 자라나게 하실 것이다.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부모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는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완벽한 부모를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그분의 세심한 은혜를 구하는 부모가 되기를 원하실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요?

박진경 지음
도서출CUP(씨유피) 펴냄

2021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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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b7mgtbsu2je

또 다른 상식 모음집. 그마저도 인간의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근거 없는 내용들도 많다. 이런 것은 과학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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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얼마나 클까?
천문학astronomy은 지구 밖 천체, 즉 태양과 달, 태양계 내의 행성, 태양계가 속한 은하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편 우주학cosmology은 우주 전체,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물질, 에너지와 그 시공간의 관계를 연구한다.
1916년에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에 근거하여, 먼 곳에서 전해 오는 별빛이 태양 주변을 통과할 때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굴절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계산해 냈다. 그리고 3년 후, 영국의 천문학자가 개기 일식을 이용하여 아인슈타인 이론의 결과를 실제로 관측하고 검증하였다.
우주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항성(별)이다. 태양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이다. 항성은 대체로 수소와 헬륨 덩어리인데, 수소가 핵융합반응을 통해 헬륨으로 바뀌면서 에너지로 전환되어 열과 빛이 발생한다.
항성 외에 행성도 있다. 간단히 말해 행성이란 항성 주위를 공전하며, 스스로 빛과 열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천체다. 태양계에서 항성은 태양이고, 지구를 제외한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5개 행성은 고대에 일찍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8~19세기에 와서 천문학자들이 추가로 천왕성과 해왕성을 발견했다. 그런데 2006년에 천문학계에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1930년에 발견되어 태양계의 9번째 행성으로 불리던 명왕성이 행성 명단에서 제명된 것이다. 이 사건은 천문학이나 기타 과학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발견이 이뤄져 오래된 관점과 견해를 바꾸곤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2006년에 얼마간의 토론과 논쟁을 거쳐 국제천문연맹에서는 행성의 세 가지 요건을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돌아야 하고 둘째, 질량이 충분해서 역시 충분한 중력과 인력을 보유함으로써 둥근 공 모양을 유지해야 하며 셋째, 공전 궤도 안에서 다른 천체가 가까이 함께 공전해서는 안 된다.
명왕성은 세 번째 요건을 갖추지 못해 제명당했다. 이 밖에 행성 주위를 도는 천체는 위성이라고 한다. 달은 지구의 위성이며 화성은 두 개의 위성을 갖고 있고 목성과 토성 등도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위성을 갖고 있다.
우주의 별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중력의 영향을 받아 각기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 무리들을 은하라고 부른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는 지름이 약 1018킬로미터이며 그 안에 약 2천억 개의 항성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크레이드 방정식
태양과 비슷한 항성 중 10억~20억 개에 행성이 딸려 있는 셈이다. 최소 10억~20억 개의 항성이 거느린 행성 가운데 생명이 있을 만한 환경을 가진 것은 또 얼마나 될까? 지구에서 우리의 경험에 비춰 보면, 물은 꼭 필요하다. 물은 용매 역할을 함으로써 분자들이 결합하여 유기화합물을 이루게 하고 더 나아가 단백질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행성과 항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광분해 작용 때문에 물 분자가 분해되어 사라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보다 5퍼센트 이상 더 가까우면 안 된다. 반대로 항성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도 물이 얼어 버린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보다 15퍼센트 이상 더 멀면 안 된다고 한다. 물 이외에 탄소, 산소, 질소도 필요하다. 탄소는 수소, 산소, 질소와 결합하여 유기화합물을 만들며, 활성 원소인 산소는 다른 원소와 결합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질소는 단백질의 기본 원소다.
천문학자 황서우수는 195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지구와 약 10광년 거리인 황소자리 타우와 에리다누스자리 엡실론이 생명 발생과 유지의 조건을 갖췄다고 지적했다. 두 별의 스펙트럼 분석에서 탄소와 산소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 황과 규소가 탄소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으며 철, 나트륨, 칼륨은 모두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원소다. 과학자들은 10억~20억 개의 행성 중 약 10퍼센트가 생명이 살기에 적합할 것이라고 추산한다. 따라서 1억~2억 개의 행성에 외계 문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그렇더라도 생명과 지적 생명체가 같은 것은 아니다. 우선 지적 능력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해하고 학습하고 창조하고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능력을 전부 지적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구에서 3억~4억 년 전 단세포 미생물로부터 시작된 진화 과정을 토대로, 많은 과학자는 지적 능력의 발전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진화와 유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생명이 살 만한 환경을 가진 행성 중에서 지적 생명체가 있을 만한 곳은 얼마나 될까? 과학자들은 1퍼센트 정도로 추산한다.
우리 은하의 2천억~3천억 개의 별 가운데 태양과 비슷한 별은 얼마나 될까? 그중 행성을 가진 별은 얼마나 될까? 더 나아가 생명이 살 만한 환경을 가진 별과 지적 생명체가 있는 별은 얼마나 될 것이며, 그중에서도 우리와 교신할 만한 능력과 의지를 가진 별은, 그중에서도 우리와 수명이 맞아떨어지는 별은 얼마나 될까? 드레이크 방정식은 이 질문들에 대한 추정값을 백분율로 전부 곱한 것으로서, 그 결과로 나온 값이 곧 우리와 교신할 가능성이 있는 외계 문명의 숫자다. 드레이크 방정식의 모든 백분율은 전부 추산일 뿐이므로, 최종 결과는 추산마다 크게 다르다. 낮게는 한 자리 숫자에서 높게는 5천, 1만, 심지어 더 클 때도 있다.
어쨌든 추산 결과가 1보다 크면 희망이 있는 셈이다.


빅뱅 이론
그렇다면 우주의 모형은 어떨까? 우주에는 시작이 있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20세기 과학사의 가장 중요한 성과가 현재 모두가 그 정확성을 인정하는 우주 모형, 즉 ‘빅뱅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빅뱅Big Bang이라는 단어는 우주가 시작될 때 실제로 어떤 폭발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뱅’Bang이라는 단어에는 무언가 급작스럽게 발생한다는 의미가 있다.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시작점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7억 년 전, 우주는 수조 도(태양 중심부 온도의 10만 배)에 달하는 고온과 고압에 에너지 밀도도 대단히 큰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쿼크와 글루온 등을 포함한 그 입자들은 전자, 광자 같은 다른 입자들과 고속으로 충돌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입자들이 탄생하면서, 우주는 바깥으로 팽창하고 온도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현상이 다 영에서 1천만분의 1초나 1억분의 1초 사이에 일어나고 변화했다. 겨우 몇 분 후 온도는 1천 배나 떨어져서 약 10억 도가 되었다. 그때 우주의 입자들은 대부분 양성자였다. 아마도 많은 독자가 알겠지만 수소 원자의 원자핵은 하나의 양성자다. 수십만 년 후, 하나의 양성자와 하나의 전자가 결합하여 수소 원자를 이루었다. 수소 원자핵 2개가 합쳐져 헬륨 원자핵이 되기도 했다. 우주는 이렇게 점차 변화해 갔다.
미국 하버드 천문대의 헨리에타 레빗이 오랜 시간을 들여 많은 세페이드 변광성들의 변광 주기를 살핀 끝에, 대담하면서도 결국 사실로 증명된 가설을 수립했다. 그녀는 지구와의 거리가 대체로 다 같은 세페이드 변광성 25개를 찾았지만, 단지 그 별들과 지구의 거리가 거의 같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 그 거리가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별들과 지구의 거리는 거의 같기 때문에 그 별들의 빛이 지구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보는 그 별들의 겉보기 밝기는 실제 밝기가 동일한 거리를 거치며 감소된 상태였다. 따라서 우리가 관측하는 겉보기 밝기들 사이의 비는 실제 밝기들 사이의 비와 같다. 바꿔 말해 우리가 지구에서 관측하는 그 별들의 밝기는 그 별들의 실제 밝기와 비례한다.
헨리에타 레빗이 25개 세페이드 변광성을 관찰해 얻은 결론은 ‘세페이드 변광성의 실제 밝기는 변광 주기와 비례한다.’였다. 즉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가 길수록 실제 밝기가 높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대단히 유용하다. 왜냐하면 임의의 두 세페이드 변광성을 놓고 그 밝기와 변광 주기를 관찰하면 변광 주기의 비로부터 실제 밝기의 비를 계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관측한 두 별의 겉보기 밝기의 비도 알고 있으므로, 두 비를 이용해 두 별과 지구 사이의 거리의 비를 산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두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의 비가 3:1이면, 실제 밝기의 비도 3:1이다. 두 별의 겉보기 밝기의 비도 3:1이라면, 두 별과 지구 간 거리의 비율은 1:1이다. 다시 말해 이 두 별과 지구의 거리는 똑같다.


스티븐 호킹과 블랙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으로서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성을 표현하는 E=mc2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방정식에 의하면, “1킬로그램의 질량은 9×1016줄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
따라서 E=mc2은 한 단위의 질량이 c2처럼 많은 단위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아주 작은 질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로군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c2은 아주 큰 숫자이기 때문이다. 1킬로그램의 물을 에너지로 전환하면 약 2조 칼로리다. 이는 휘발유 수천만 리터를 태운 에너지와 맞먹는다. 이것이 바로 원자폭탄과 핵발전소의 기본 원리다.
어떤 물체가 정지해 있을 때, 그 물체에는 고유의 질량이 있다. 그런데 물체가 어떤 속도로 이동할 때는 정지해 있을 때의 질량 외에 운동 에너지를 갖게 되며, 운동 에너지는 질량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물체가 이동할 때는 정지해 있을 때보다 질량이 커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량이 무한대인 물체의 속도를 높일 만한 힘이나 에너지가 없다. 따라서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어떤 물체도 빛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아르키메데스의 깨달음
금의 비중은 1세제곱센티미터당 19.3그램인 데 비해 은의 비중은 1세제곱센티미터당 10.5그램, 구리의 비중은 1세제곱센티미터당 8.9그램이다. 따라서 만일 금으로 만든 왕관과 은으로 만든 왕관이 있는데 둘 다 무게가 2킬로그램이라면 금으로 만든 왕관이 은으로 만든 왕관보다 부피가 더 적다. 금 2킬로그램의 부피는 104세제곱센티미터이고 은 2킬로그램의 부피는 190세제곱센티미터다.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의 부피만 계산한다면 장인이 금을 훔쳤는지 훔치지 않았는지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서 목욕을 할 때 어떤 물체든 물속에 들어갔을 때 물체가 밀어낸 물의 양이 그 물체의 부피임을 발견했는데, 사실 누구나 고등학교 시절에 들어 보았음 직한 아르키메데스 원리에서 중요한 뒷부분은 물체를 물 또는 다른 액체에 넣었을 때 물은 물체를 위로 밀어 올리는 부력을 내며 그 부력이 물체가 밀어내는 물의 무게와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2킬로그램인 왕관의 부피는 104세제곱센티미터여서 물에 넣으면 104세제곱센티미터의 물을 밀어내는데, 물의 비중은 1이므로 104세제곱센티미터 물의 무게는 104그램이고, 부력은 104그램이다. 따라서 물에 넣은 왕관의 무게를 저울로 재면, 그 결과는 2,000−104=1,896그램이다.


과학 속 우연
미생물은 모양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크기도 몇 미크론(1밀리미터의 1/1000)부터 수십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까지 천차만별이다. 미생물의 종류는 보통 세균, 균류(곰팡이), 바이러스로 나뉜다. 지구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미생물이 산다. 전체 숫자는 대략 1030이나 된다. 이처럼 많은 미생물이 지구 생태계의 균형, 발효 식품이나 양조 식품 제조, 오염수 처리 등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인간의 몸속에도 미생물이 많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인간과 조화롭게 공존한다. 특히 소화기 계통에서 소화 기능을 돕는다. 그러나 외부에서 신체로 침투하는 여러 미생물은 우리가 질병에 걸리는 원인이 되곤 한다.
오랫동안 인류는 질병이 몸속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150년 전에야 비로소 질병과 미생물의 관련성을 알아냈다. 질병 중에서도 폐결핵, 파상풍, 장티푸스, 디프테리아 등은 세균의 침입으로 발병하고, 감기, 천연두, 에이즈 등의 원인은 바이러스이며, 일부 호흡기와 피부 질환은 균류 때문이다.
세균과 바이러스의 차이점은 바이러스가 세균보다 열 배에서 백 배 더 작다는 데 있다. 보통 의학에서 사용하는 여과기는 세균은 걸러 낼 수 있지만 바이러스는 너무 작아서 걸러 내지 못한다. 그래서 바이러스는 ‘여과성 바이러스’라고도 불린다. 이 밖에도 바이러스는 홀로 생존하지 못하고 반드시 다른 세포에 의지해 성장하고 번식한다. 그래서 미생물학에서는 바이러스를 미생물로 분류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독립적으로 성장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체 세포에 침투한 바이러스를 직접 약물을 써서 죽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면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세포도 죽기 십상인 탓이다.
면역이란 침입한 미생물에 대한 저항을 뜻하며, 면역 기능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나뉜다. 선천적 면역 기능은 첫 번째 방어선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갖춰진 능력이자 일반적인 반응이다. 어떤 특정 미생물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피부와 콧구멍의 털, 호흡기와 식도의 점막은 몸속으로 침입하려는 미생물을 성벽처럼 막아서고, 눈물과 기침과 콧물로 미생물을 밖으로 몰아낸다. 몸에서 열이 나는 것도 몸속의 백혈구를 비롯한 물질들이 미생물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런 것이 인체의 선천적 면역 기능이다. 선천적 면역 기능은 기억력이 없다. 바꿔 말해, 미생물이 침입할 때마다 인체는 똑같은 반응을 되풀이한다.
후천적 면역 기능은 척추동물에게만 있는 것으로, 태어난 뒤에 형성된 기능이다(모체로부터 태아에게 전달된 면역 기능도 포함된다). 후천적 면역 기능은 특정 미생물을 판별하고 방어하는 능력이 있고 기억력도 있다. 인체가 예전에 접했던 세균과 바이러스에 다시 노출되었을 때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백신의 기본 개념이기도 하다. 2천 년 전에 벌써 그리스인은 어떤 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은 그 병에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물론 그때는 그 이유까지 알지는 못했다. 사실 그것은 병에 걸렸던 사람의 몸에 그 병에 대한 후천적 면역 기능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용되는 백신은 미량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경구용 백신이나 주사를 통해 인체에 주입하여 미리 경미한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인체에 면역 기능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천연두가 없어진 것은 18세기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의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제너가 39세였을 때, 목장에서 소젖을 짜는 하녀 하나가 자기는 우두에 걸린 적이 있어서 천연두에 걸릴 리가 없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우두가 어떤 바이러스에 의해 생기는데 그 바이러스가 소의 피부에 수포를 만들기도 하고 소젖을 짜던 하녀의 몸에 침투해 우두를 앓게 함으로써 천연두에 대한 면역 기능을 형성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두 바이러스를 천연두 예방과 치료의 백신으로 삼은 제너의 발견은 백신 기술의 장을 열고 기초를 확립했다. ‘백신 접종’을 뜻하는 영어 단어 ‘vaccination’은 라틴어의 기원을 따지면 ‘소의 작은 수포’라는 뜻이다. 현재 이 단어는 모든 종류의 백신 접종을 폭넓게 가리킨다.
인체에 미생물이 침입했을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대응 방법이 있다. 하나는 약물로 직접 미생물을 제거하거나 성장을 억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물로 인체의 면역 기능을 촉발하는 것이다. 후자는 제너가 천연두를 예방하고 치료한 사례에서 시작되었다. 제너의 천연두 백신 발견은 백신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기초를 다졌다. 한편 전자는 푸른곰팡이를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에게 공을 돌려야 한다. 푸른곰팡이의 약명은 페니실린이며, 페니실린은 이후 항생제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항생제란 세균을 죽이거나 성장을 억제하는 약물이다. 일찍이 2,400년 전에 중국인은 곰팡이가 핀 두부에 소염 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집트와 그리스에도 유사한 치료 방법이 있었다. 인체에 외부 세균이 침입했을 때 약으로 제거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했듯이 바이러스가 몸에 침입하여 인체 세포에 기생한다면 항생제로는 그것을 제거하지 못한다.
의사였던 플레밍은 어느 날 감기에 걸렸을 때 실험실에서 콧물을 이용해 세균을 배양했다. 그런데 잘못해서 그의 눈물이 세균을 배양하던 접시에 떨어졌다. 이튿날 그는 눈물에 젖은 배양 접시 속 세균들이 다 죽은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눈물과 침에 인체에는 무해하면서도 살균 기능이 있는 효소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결과를 증명하기 위해 플레밍과 실험실 조수는 몇 주 동안 계속 레몬 껍질로 눈을 비벼 가며 실험용 눈물을 조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효소의 살균 능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다만 이 우연은 나중에 플레밍이 푸른곰팡이를 발견하는 선례가 되었다.
몇 년 뒤, 플레밍은 실험실에서 인체에 염증을 일으키는 포도상 구균을 배양하다가 배양 접시의 뚜껑을 닫는 것을 까먹었다. 그 바람에 곰팡이(곰팡이가 핀 과일이나 빵에서 날아왔을 것이다) 한 점이 접시에 떨어졌는데, 나중에 보니 곰팡이 근처의 세균들이 완전히 박멸된 게 아닌가. 눈물에서 살균 기능을 가진 효소를 발견했던 경험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곰팡이에도 그런 기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플레밍이 발견한 곰팡이는 푸른곰팡이의 일종으로서 포도상 구균을 죽이는 기능이 있었다. 이 사례로 인해 ‘곰팡이의 살균 기능’이라는 의학 연구의 문이 활짝 열렸다.
항생제는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을 뿐 아니라 농업, 목축업, 식품산업에서도 폭넓게 응용된다.
제너가 백신을, 플레밍이 항생제를 이용한 세균 퇴치 기술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 덕분이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실로 오묘한 사건들이다.


꽃가루, 염료, 항생제
지금 우리는 당뇨병의 원인이 혈액 속 당 수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건강 검진을 받을 때 공복 상태에서 정상 혈당은 100시시의 혈액에 당이 70~100밀리그램 함유되어 있는 수준이다.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은 소화를 거쳐 당으로 변한 뒤 혈액으로 보내지는데, 인체는 혈당이 높다고 감지하면 췌장(이자)에서 인슐린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인슐린의 기능은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간과 근육에 축적하는 것이다. 만약 췌장 세포가 손상을 입어 인슐린 분비량이 대폭 줄거나, 나이가 많아지면서 인체에 인슐린에 대한 저항성이 생긴다면, 일부 혈당이 글리코겐으로 변하지 않고 혈액에 계속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직접적인 후유증이 생긴다. 첫째, 글리코겐은 인체의 주요 에너지원인데, 만일 간과 근육에 글리코겐이 부족해지면 에너지가 필요할 때 대신 지방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효율이 낮고 반응도 늦어서, 당뇨병 환자가 체력이 떨어지고 쉽게 피곤해지는 원인이 된다. 둘째, 혈당이 정상 수치를 넘어서면 각양각색의 문제가 나타나는데, 무엇보다도 혈당이 증가하면 오줌 속 당도 증가하기 때문에 인체는 신장에서 더 많은 물을 분비해 오줌 속 당을 희석하려 한다. 이것이 당뇨병 환자가 자주 소변을 보고 갈증을 느끼는 원인이다. 아울러 지나친 칼로리 소모로 인해 환자는 늘 허기를 느끼고, 심지어 체중이 감소하며, 오랜 시간이 지나면 신장 기능이 나빠진다. 이 밖에도 높은 혈당 수치는 혈관이 굳거나 좁아지고 막히는 현상을 초래하여 심장과 순환기에 문제를 가져오고, 망막 혈관을 손상시켜 시력에 영향을 주다가 결국 실명에 이르게 한다. 백혈구 기능에도 영향을 끼쳐 염증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리는데, 이는 당뇨병 환자가 한번 상처를 입으면 쉽게 낫지 않는 원인이 된다.
사람들이 당뇨병 환자의 오줌에 당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1천 년 전의 일이지만, 당뇨병과 췌장의 기능을 연결시킨 것은 100년 전의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1889년, 췌장이 소화 기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던 두 독일 과학자가 개에게서 췌장을 제거했다. 그리고 며칠 뒤, 실험실 조교가 그 개의 오줌 근처에 파리가 들끓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곧 그 오줌을 분석하여 당 함량이 매우 높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췌장에 혈당 조절 기능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눈은 말을 한다
어느 두 일본인 학자는 인간과 오랑우탄, 원숭이의 눈을 비교하여 인간의 공막만 흰색이고 바깥에 노출된 면적도 가장 넓다는 것을 알아냈다. 눈동자와 공막의 색깔이 비슷하면 다른 사람이 눈동자의 위치를 알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눈빛의 방향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포식 동물의 경우, 그것은 먹잇감을 사냥하는 동안 자신을 숨기는 데 도움이 된다. 반면 인간은 눈동자와 공막의 구분이 확실하여, 다른 사람이 시선의 방향을 읽도록 도움으로써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아이 콘택트는 시선의 방향뿐 아니라 시선의 고정과 이동까지 포함하여 눈의 접촉으로 뇌의 접촉까지 이끌어 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눈은 영혼의 창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지 시적이고 철학적인 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의학과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뇌는 시선의 접촉을 통해 상대방의 정서와 동기를, 즉 상대방이 기쁜지 슬픈지, 상대방이 성실한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이런 상호 작용의 메커니즘은 대단히 복잡하긴 하지만 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비효과
세상의 많은 일이 아주 작은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흔히 운이 좋은 사람은 은인과 귀인을 만나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이때 은인과 귀인의 정의는 무엇일까? 오래전에 어떤 사람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을 하다가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그는 화장실에 가려 했지만 주머니에 동전 한 닢조차 없었다. 그곳의 화장실은 동전을 넣어야 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 동전을 빌려 막 들어가려는데, 앞에서 어떤 사람이 용무를 마치고 화장실 문을 닫지 않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공짜로 화장실을 쓸 수 있는 데다가 동전까지 굳은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슬롯머신에 그 동전을 넣었다가 놀랍게도 잭팟을 터뜨렸다. 그 후에는 그 돈을 밑천으로 장사를 벌여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훗날 이 이야기를 비서에게 자주 들려주면서 이야기를 마친 뒤에는 한결같이 “그때 나를 도와준 사람을 찾고 싶네. 무일푼 신세였던 내게 이런 날이 오게 해 줬으니 말이야. 정말 감사를 표하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그 사람을 찾는담?”이라고 말했다. 비서는 동전을 준 사람이 친한 친구가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찾는 사람은 그 친구가 아니라 까먹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은인은 명확하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화장실에 갈 동전을 준 친구 같은 사람이다. 귀인은 특별히 도움을 주려는 마음도 없었는데, 심지어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 주는 사람이다. 이 이야기에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바로 귀인이다. 작디작은 나비 한 마리, 꽃 한 다발, 길가에서 축구를 하는 꼬마, 자기 나라 말밖에 못하는 외국 관광객 등은 모두 우리의 귀인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폭파범과 재갈량
“복은 겹쳐서 오지 않고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에 따르면,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10분의 1이라면 좋은 일 두 가지가 연이어 일어날 가능성은 10분의 1 곱하기 10분의 1, 즉 100분의 1이다. 그러나 이미 좋은 일이 일어난 다음 다른 좋은 일이 또 일어날 가능성은 역시 10분의 1이다.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10분의 1이면 나쁜 일 두 가지가 연이어 일어날 가능성은 100분의 1이지만, 나쁜 일이 이미 일어난 후에 다른 나쁜 일이 또 일어날 가능성은 역시 10분의 1이다. 그런데 왜 복과 화,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서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일까?
쉽게 말하면 이것은 심리가 수학을 이긴 것이다. 좋은 일이 또 일어나거나 나쁜 일이 또 일어날 확률은 앞에 발생했던 좋은 일이나 나쁜 일로 인한 심리의 영향을 받는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우쭐하는 마음에 해이해져 노력을 게을리할 수도 있다. 아니면 탐욕스러워져서 더 많은 이익에 눈독을 들이다가 오히려 두 번째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낮출 수도 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분노하고 실망하고 긴장하고 좌절하고 부주의해져 두 번째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뜻밖의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또 다른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


호랑이와 마주친다면
스트레스란 무엇일까? 먼저 생리학의 항상성이라는 개념을 알아보자. 인간과 동물의 체내에는 정상적이거나 이상적인 생리 지수들이 있다. 체온, 체내 수분, 혈당 등이다. 항상성이란 바로 그런 지수들을 정상 범위 안에서 유지시키는 메커니즘이다. 관련된 몇 가지 기본 개념을 검토해 보자.
우선, 일부 지수는 정상 범위가 비교적 좁다. 예를 들어 우리의 정상 체온은 섭씨 37도이며 아래위로 1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반면 일부 지수는 정상 범위가 비교적 넓다. 혈당 같은 경우, 정상 범위는 혈액 100시시당 당이 70〜100밀리그램이다(식사 직후 혈당이 140밀리그램 이하까지 상승하는 것도 정상이다). 쉽게 상상하기 힘들 텐데, 우리 몸속에는 혈액이 약 5리터밖에 없으므로 혈당은 5그램에 불과하다. 우리가 커피를 마실 때 넣는 막대 포장 설탕의 분량 정도다.
신체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조작을 통해 지수 조절이라는 목적을 달성한다. 인체의 체온 조절을 예로 들면, 바깥 온도가 높을 때 우리는 땀을 흘림으로써 증발을 통해 체온을 떨어뜨린다. 동시에 피부 표면의 털은 옆으로 누워서 피부 근처 공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해 열 발산의 목적을 달성한다. 반면 바깥 온도가 낮을 때는 피부의 털이 직립하여 열 발산을 막는 보호벽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추울 때 소름이 돋는 이유다. 소름이 바로 피부의 털을 직립시키는 기제인 것이다. 또한 바깥 온도가 높을 때는 모세 혈관이 확장되어 비교적 많은 피가 피부를 돌며 열을 발산하지만, 바깥 온도가 낮을 때는 모세 혈관이 수축하여 피부를 도는 혈액량을 줄임으로써 열 손실을 줄인다. 날씨가 추울 때 피부가 창백해지고 손발이 마비된 것처럼 느낌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두 번째 예는 혈당의 조절이다. 혈당의 정상 범위는 혈액 100시시당 당 70〜100밀리그램인데, 혈당이 너무 낮으면 현기증, 피로, 무력증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혈당이 너무 높으면 당뇨병에 걸려 신장, 눈, 신경에 해를 끼친다. 혈당이 너무 낮을 때 췌장은 글루카곤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여 간에 있는 글리코겐을 당으로 바꿔 혈액으로 보낸다. 반대로 혈당이 너무 높을 때 췌장은 또 다른 호르몬인 인슐린을 분비함으로써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간에 축적한다.
이제 “스트레스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스트레스란 체내의 항상성을 교란하는 모든 외적 요소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자동차 사고는 급작스러운 통제 불능의 충격이고, 장기 야근은 생리적인 충격이며, 걱정과 긴장은 심리적인 충격이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체내 항상성에 영향을 주어 몸이 스트레스에 반응하게 만든다. 그 반응에는 몸에 축적된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가령 우리가 호랑이에게 쫓긴다면 우리는 더 빨리 달려야 하는 동시에 아주 절박하지 않은 기능은 잠시 늦춘다. 위장의 소화 기능, 인체 조직의 성장과 복원 기능 등이다. 그러면서 고통에 둔감해지기도 하고(전쟁터의 병사들은 부상을 당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곤 한다) 감각과 인지 능력이 좋아지기도 한다(아주 작은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리거나 머리가 갑자기 영민하게 돌아가는 것 등이다).
이처럼 생리적인 충격은 인체의 항상성을 깨뜨려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 반응을 유발하게 마련이지만, 심리적인 충격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발생할 리 없는 사건에서 기인하는데 어째서 인체의 항상성을 교란하고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 앞에서 말한 대로 인체의 항상성 조절은 뇌가 주관한다. 뇌는 예상하고 기대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더라도 그것 때문에 인체의 항상성 조절 기능이 작동된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가 생기면 바로 조절 기제를 작동시키고, 스트레스가 지나가면 조절 기제를 닫는다. 만일 조절 기제가 작동해야 할 때 작동하지 않고 닫혀야 할 때 닫히지 않으면 당연히 각종 질병이 유발된다. 한편 조절 기제가 너무 반복적으로 작동하고 닫혀도 에너지가 소비되고 장기가 손상되어 각종 질병이 유발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우리가 생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스트레스에 직면해 체내 항상성에 변화가 생기면, 뇌는 곧장 조절 기제를 작동시킨다. 그렇다면 뇌가 어떻게 신경계를 통해 인체의 기관과 근육을 통제하는지 살펴보자. 신경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한 부분은 길을 걷고, 악수를 하고, 말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행위를 책임진다. 다른 부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행위를 책임진다. 예를 들면 땀을 흘리고, 내분비물을 분비하고, 위장이 연동 운동을 하는 일 등이 이른바 ‘자율 신경계’의 기능인데, 이 자율 신경계가 곧 스트레스에 반응하고 조절하며 적응하는 임무도 맡는다.
인체의 항상성 유지를 책임지는 신경계는 다시 교감 신경계와 부교감 신경계로 나뉜다. 두 가지 신경계는 상호 보완하는 기능을 가진다. 긴급하고 자극적인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교감 신경계가 반응하여, 동공이 확장되어 눈에 빛이 더 많이 들어오고 침 분비가 제한되어 좀 더 급한 다른 기관에 수분을 제공한다. 또한 심장 박동이 빨라져 근육과 폐로 가는 혈액은 많아지고 내장과 피부로 가는 혈액은 줄어드는 한편, 폐의 기관지가 확장되어 산소 교환이 늘어난다. 그리고 소화 기능이 제한되는 반면, 부신의 호르몬 분비와 자극 기능은 반응이 증가한다. 후자가 당장 급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감 신경계는 우리의 몸을 흥분시키고 경계 상태를 취하게 하여 외부의 교란에 대처한다.
반대로 우리가 편안한 상태에서 뭔가를 배불리 먹었거나 잠을 잘 때는 부교감 신경계가 기능한다. 동공이 수축되어 빛이 시신경을 덜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침의 분비가 늘어 위의 소화 기능을 자극하고 장의 연동 운동을 증가시킨다. 이것은 소화계의 혈관 확장으로도 이어져, 혈류량이 늘어 음식물의 소화와 영양 섭취를 돕는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산소가 비교적 덜 필요하기 때문에 기관지가 수축되고 심장 박동도 느려진다. 요컨대 부교감 신경계는 몸이 쉬고 영양분을 축적하게 하여 성장과 발육을 도모한다.
그러면 뇌는 어떻게 장기와 근육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걸까? 답은 이렇다. 뇌는 호르몬을 통해 정보를 장기와 근육에 전달하며, 그 정보들은 심장 박동 가속, 에너지 소비, 면역 기능의 작동과 제한, 신진대사, 성장, 발육에 관한 내용을 아우른다. 이때 호르몬이 우편배달부의 역할을 한다.
호르몬의 영문 철자는 ‘hormone’이며 그리스어에서는 ‘움직이게 하다’, ‘자극하다’ 정도의 뜻이다. 뇌는 호르몬을 통해 장기와 근육의 각종 생리 활동을 자극하며, 우리 몸은 뇌하수체, 갑상선, 췌장, 부신 피질(겉질), 난소, 고환에서 다양한 호르몬을 분비한다. 과거에는 이들 내분비샘이 독자적으로 기능한다고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뇌가 내분비샘의 기능을 관장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양한 호르몬들은 역시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며, 그중 일부는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 호르몬들은 교감 신경계의 신경 말단이나 혈액을 경유하여 장기와 근육으로 전달된다.
스트레스가 우리 몸의 항상성을 교란하면 몸은 그에 상응하는 반응으로 본래의 균형을 회복하려 한다. 교란과 반응의 과정에서 모든 것이 평온한 상태로 돌아올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한 병에 걸려 회복하기 힘든 손상을 입을 때도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스트레스가 우리 몸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먼저 스트레스가 심혈관계와 다른 장기에 끼치는 영향을 보자. 누가 산에서 호랑이와 마주쳐 돌아서서 도망친다고 하자. 그때는 그의 교감 신경계가 작동하고 부교감 신경계는 닫힌다. 근육에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간의 지방 세포나 근육에 저장된 지방, 단백질, 당을 모두 소환하여 혈액을 통해 근육으로 보낸다. 이때 보내는 속도는 당연히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므로, 심장이 더 빠르게 뛴다. 아울러 심장이 뛰는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교감 신경계는 심장으로 들어가는 정맥을 딱딱하게 수축시켜 심장으로 돌아가는 피가 더 큰 힘으로 심방에 충격을 가하게 한다. 그러면 심방은 당겨진 고무처럼 세게 퉁겨지면서 힘차게 피를 내보내고, 그 때문에 혈압이 상승한다. 그 밖에 근육으로 혈액을 보내는 혈관은 확장되어 혈류량이 늘어나는 반면, 소화계의 혈관은 수축되어 소화계로 가는 혈류량이 잠시 줄어든다.
그리고 이때 몸에 수분이 모자라서는 안 되는데, 신장은 혈액의 수분을 흡수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신장으로 흘러드는 피가 줄고 신장의 기능도 느려진다. 하지만 호랑이에게 쫓기던 사람은 자칫 호랑이에게 따라잡힐 찰나에 놀라서 바지에 흥건하게 오줌을 쌀 수도 있다. 앞에서 분명히 이때 몸에 수분이 모자라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까? 인체가 신장을 통해 몸 밖으로 내보내는 물은 일단 방광에 저장된다. 방광은 단순한 용기에 불과하며, 방광에 저장된 물은 이미 몸으로 돌아가 쓰일 수 없는 부담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이 정신없이 도망칠 때는 자기도 모르게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호랑이에게 쫓기던 사람이 운이 좋으면 정의의 용사가 나타나 액운에서 구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몸의 항상성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교감 신경계가 휴식에 들어가고 부교감 신경계가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 평생 호랑이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정말로 매일같이 호랑이와 마주친다면, 혹은 다른 스트레스 요인 때문에 이와 유사한 생리 반응이 늘 일어난다면, 우리의 몸은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본래 교감 신경계와 부교감 신경계는 교대로 작용한다. 긴장했을 때는 교감 신경계가 작동하고, 편안할 때는 부교감 신경계가 개입한다. 그런데 우리가 온종일 긴장한 상태라 전혀 편안할 틈이 없으면, 부교감 신경계는 오랫동안 기능하지 못해 점차 무뎌진다. 그러면 나중에는 편안할 때에도 이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악순환에 빠져 버린다.


스트레스와 문명병
스트레스는 인체의 항상성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외적 요인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스트레스로는 다른 사람과의 싸움 같은 단기적이고 갑작스러운 생리적 충격, 오랜 수면 부족 같은 만성적인 생리적 충격과 심리적인 긴장, 초조, 경악 등이 있다.
몸은 스트레스를 만나면 몇몇 기제를 작동시켜 대처한다. 예를 들면 심장이 더 빨리 뛰거나 혈압이 높아진다. 스트레스가 지나가면 몸은 이런 생리적 반응들을 중단시키고 정상적인 균형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조절 기능까지 쇠퇴하면 몸은 오랫동안 정상적인 균형 상태에서 벗어나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스트레스에 대처하느라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때, 우리 몸은 어떻게 임기응변을 할까? 우선 혈액 속의 영양분을 즉시 글리코겐과 트리글리세리드로 바꾸고 영양분의 저장을 멈춘다. 동시에 지방에 저장된 글리코겐과 트리글리세리드를 포도당과 불포화 지방산으로 바꿔 혈액으로 보낸다. 이런 전환 조치는 모두 교감 신경이 분비하는 호르몬이 유발하는 것이다.
콜레스테롤은 우리 몸에 반드시 필요하며 여러 기능이 있는 지방이다. 인체는 콜레스테롤을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음식물에서 섭취하기도 한다. 지방의 일종인 콜레스테롤은 혈관 벽에 붙어서 혈관이 막히거나 딱딱해지는 증상을 유발한다. 그리고 혈액에 녹아드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일부 단백질에 의존해 혈액 속을 떠돈다. 비유하자면 콜레스테롤은 상자에 담겨 강물을 떠도는 셈이다.
췌장이 인슐린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며 인슐린은 지나치게 많은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간에 저장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만약 혈당 수치가 너무 낮거나 스트레스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수요가 발생하면, 췌장은 또 다른 호르몬 글루카곤을 분비해 간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혈당으로 바꿔 혈액으로 내보낸다.
스트레스가 닥치면 혈당과 간의 글리코겐이 전환되는 횟수가 잦아지는데, 췌장이 인슐린을 충분히 분비하지 못하거나 인슐린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당뇨병이 생긴다. 당뇨병에는 여러 유형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스트레스와 밀접한 유형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어떤 원인들로 인해 인체의 면역 체계가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 세포를 외부의 적으로 오인하고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인슐린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간에 저장하는 기능 외에 체세포가 혈당을 흡수하도록 돕는 기능인데 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인슐린 결핍의 두 가지 후유증은 첫째, 혈당이 너무 많아져서 혈당이 혈관 벽에 붙어 혈관을 막히게 하거나 딱딱하게 만드는 것이며, 둘째 인체의 많은 세포에 혈당이 부족하여 장기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1920년대부터 우리는 체내에 인슐린이 부족할 경우 인공 제조된 인슐린을 주입해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체내 인슐린의 적절한 균형점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인슐린이 너무 적으면 기능이 떨어지고 너무 많으면 쇼크를 일으킨다. 그리고 인슐린을 사용하는 당뇨병 환자들은 모두 아는바, 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혈당과 불포화 지방산의 양이 늘고 변화하여 균형의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이 밖에도 스트레스는 체세포의 인슐린에 대한 저항성을 증가시키는데, 이 점은 인슐린 주사로 체내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환자에게 또 하나의 변수가 된다.
두 번째 유형의 당뇨병은 몸에 인슐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체세포의 인슐린에 대한 저항성 때문에 생긴다. 예를 들어 너무 뚱뚱한 사람은 지방을 저장하는 세포가 이미 꽉 차서 더는 지방을 저장할 공간이 없다. 이때 췌장이 계속 인슐린을 분비하여 지방 세포를 자극하려, 하면 지방 세포는 그 자극을 외면한다. 그러면 췌장은 멋모르고 끊임없이 인슐린을 분비하다가 결국 손상을 입고 인슐린 제조 기능마저 잃음으로써 앞에서 말한 첫 번째 유형의 당뇨병을 야기한다.


바빠도 살이 안 빠진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평소보다 많이 먹고 어떤 사람은 평소보다 적게 먹는다. 의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그 비는 대략 2:1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스트레스를 느끼면 뇌는 여러 가지 호르몬의 방출을 유도하는데, 그중 코르티코트로핀 방출 호르몬CRH은 식욕을 억제한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에서는 소화가 당장 급한 일이 아니므로 잠시 미루는 것이다. 한편 글루코코르티코이드라는 호르몬은 혈액 속에 유동하는 혈당량을 증가시킨다. 스트레스 상태에서 우리 몸은 응급 대처에 필요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호르몬은 식욕을 자극하는 기능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식욕은 억제될까, 아니면 자극될까?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첫 번째 호르몬 CRH가 신속히 혈액으로 배출되고, 두 번째 호르몬 글루코코르티코이드는 좀 늦게 배출된다. 그러다가 스트레스가 지나가면, 첫 번째 호르몬은 곧바로 사라지지만 두 번째 호르몬은 비교적 오랫동안 남는다. 이것은 스트레스가 생겼을 때 보통 식욕이 없어졌다가 스트레스가 지나가면 회복 과정에서 식욕이 느는 현상을 정확히 설명해 준다. 만일 스트레스가 오랜 기간 지속된다면 오랫동안 식욕이 없을 테고, 만일 스트레스가 반복적으로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면 폭식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수많은 샐러리맨이 이런 경험을 겪는다.


아편 수용체와 엘비스 프레슬리
신경 말단은 통증 자극을 받으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신경 섬유를 통해 척수로 신호를 보낸다. 첫 번째 신경 섬유는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통증 신호를 책임지며 두 번째 신경 섬유는 만성적이고 가벼운 통증 신호를 책임진다. 신경 섬유가 이렇게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뇌로 가는 신호를 전담하는 척수 속 신경 세포도 두 가지 통증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처리한다. 뇌로 신호를 보내는 신경 세포는 ‘발신 세포’라고 하며, 신호 전송을 막는 신경 세포(제어 세포)의 제어를 받는다.
신경 말단에서 전해진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통증 신호는 발신 세포를 자극해 뇌로 전달되는데, 시간이 좀 지나면 이 통증 신호가 제어 세포를 자극해 발신 세포가 계속 통증 신호를 뇌로 보내지 못하도록 저지한다. 이것은 왜 우리가 칼에 베이거나 바늘에 찔렸을 때 통증이 순식간에 지나가는지 설명해 준다. 반면에 지속적이고 가벼운 통증 신호는 발신 세포를 자극해 뇌로 전달되긴 하지만 제어 세포를 자극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통증 신호가 끊임없이 뇌로 보내진다.
스트레스는 기억력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 단기적이고 가벼운 스트레스는 기억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점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스트레스는 경각심을 높이고 주의력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잘 자면 늙지 않는다
낮의 활동 시간에 몸은 신경 전달 물질인 아데노신을 생산하는데, 이 물질은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몸의 기능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뇌에 아데노신이 일정 정도 축적되면 우리는 자고 싶어진다.
수면은 도대체 어떤 기능을 할까? 단지 휴식 기능만 하지는 않는다. 우선, 우리가 깨어 있을 때 뇌는 인체의 총 에너지 소비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잠을 잘 때 뇌의 활동이 느려지는 틈을 타 몸이 뇌에 저장된 에너지를 보충한다. 앞에서 우리 몸은 혈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꾼 뒤 간, 뇌, 근육 등에 저장한다고 말한 바 있다. 둘째, 수면은 뇌의 온도를 떨어뜨려 휴식을 취하게 한다. 셋째, 수면이 꿈을 꾸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우리가 하루를 꼬박 새우면 이튿날 자면서 유난히 꿈을 많이 꾼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꿈을 꿀 필요가 있다는 뜻일 뿐, 꿈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꿈을 꿀 때 뇌는 깨어 있을 때보다 적게 활동한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깨어 있을 때 뇌에서 그다지 활동적이지 못했던 부분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꿈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음 넷째, 수면은 인지와도 연관이 있다. 풀지 못한 문제가 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머릿속에서 다 풀려 있을 때가 있다. 다섯째, 수면은 깨어 있을 때 수집한 정보를 정리하도록 도와준다. 심지어 정보 사이의 연관성까지 수립해, 깨어 있을 때 떠올리지 못했던 정보를 떠올리게 해 준다. 여섯째, 몇몇 전문가는 파괴되고 훼손된 신경 세포가 잘 때 치료되고 복원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수면은 정서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여성의 생리 기간에서 전반부에는 여러 호르몬의 분비가 증가해 난소의 배란 작용을 촉진한다. 그런데 스트레스 때문에 호르몬 분비가 줄면 정상적인 배란의 기회도 줄어든다. 후반부에는 또 다른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그 호르몬들의 주요 기능은 자궁벽의 세포를 성숙시킴으로써 수정란이 착상해 자라기에 알맞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호르몬 분비가 교란되면 자궁벽 세포의 성숙에 방해가 되고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해 성장할 확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임산부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태아에게 흘러가는 혈액량에 영향이 미치고 산모의 심장 박동 속도도 태아의 심박에 영향을 미쳐서 유산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물론 생식이 꽤 복잡한 과정이기는 해도 전반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우리 몸의 저항력은 상당히 강한 편이다.


스트레스를 즐기자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 비교적 괜찮은 것은 한눈 팔 수 있는 일을 하거나 상상하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머릿속으로 상상의 골프 시합을 치르는 것이다. 운동도 매우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첫째, 운동이 기분을 전환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효과는 운동 후 몇 시간에 국한된다.
둘째, 운동을 좋아해야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이 든다. 흰쥐가 자진해서 쳇바퀴를 돌려야 건강에 유익하지, 강제로 돌리게 하면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셋째, 유산소 운동의 효과는 비교적 괜찮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이때 유산소 운동이란 산책, 자전거, 수영과 같은 운동을 그리 격렬하지 않게 20분 이상 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산소 운동은 산소를 소비하면서 몸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혈당으로 바꾸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다. 한편 무산소 운동은 다르다. 역도, 근력 운동 등의 격렬한 운동은 한 번에 30초〜2분밖에 하지 못하고, 에너지원도 다르다.
넷째, 운동을 매주 몇 번 할지, 한 번에 몇 시간씩 할지 정해서 오랫동안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다섯째,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 명상도 운동처럼 오랫동안 규칙적으로 하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고 글루코코르티코이드 분비를 줄인다.
스트레스 해소를 돕는 또 다른 힘은 주변 사람들의 심리적 지원이다. 머리를 기대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어깨, 따뜻하게 내미는 손, 조용히 들어 주는 귀는 모두 큰 효과가 있다.
심리적 지원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은 봉사다. 남을 돕는 것은 많은 경우 자신을 돕는 것이나 다름없다. 달리 말해, 남을 위해 긴장함으로써 자신의 긴장을 대신하고 남의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스트레스를 대신하는 것이다.

단단한 과학공부

류중랑 지음
유유 펴냄

202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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