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단지 텍스트의 집합이 아니다. 누군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든, 시간의 상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는 책을 산다. 읽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삶의 일부로 들이기 위해서. 책은 때로는 방을 채우는 오브제가 되고, 때로는 내 기분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서점은 나에게 쉼의 공간이고, 책은 그 안에서 건져 올리는 작은 조각들이다. 그렇게 오늘도 책을 사고, 책을 곁에 두며, 아주 조용하게 행복해진다. (p.115)
아이가 먼저 성당 교리에 들어가야 하기에 미사 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성당 마당에 들어섰다. 작고 호젓한 공간, 웃긴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성당 마당에서는 책도 쑥쑥 잘 읽히는 기분이 들어 거의 매주 가방에 책 한 권을 넣어 성당에 온다. 이번 주 들고나온 책은, 나의 애정하는 소설가, 김서령 작가님의 폴앤니나에서 출간된 『서점을 그리다』.
많은 분이 익히 아시겠지만, 김서령 작가님의 글은 소나기처럼 우리 삶을 스며놓은 문장이 많았는데, 그녀가 만드는 책도 신기하리만치 그녀를 닮아있다. 그래서 이번 책, 『서점을 그리다』을 통해서도 나는 우리가 심취하는 것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많이 느끼고, 생각했다. 또 무엇인가에 풍덩 빠져 살아갈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또 한 번 실감했다. 『서점을 그리다』는 소금이, 욘욘, 나예, 도담 작가님 등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동네서점을 그리고 기록한 책이다. 평소에도 책을 시공간을 초월하게 하는 “어디로든 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은 마치 전국의 서점을 직접 여행하게 만드는 기분의 책이었다. 거기에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개성 넘치는 일러스트가 더해져,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마음속으로 풍덩 빠지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서점을 그리다』가 더 좋았던 까닭은, 각 작가가 책이나 서점에 대해 느끼는 점을 기록한 문장들 때문이었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동지애와 공감까지 듬뿍 느끼며, 내가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책이 가득 있는 공간들에서 얼마나 안정감과 평온을 느끼는지 새삼 깨닫게 되더라. 『서점을 그리다』는 분명 운전석에 앉은 채 읽었는데, 한 시간 남짓 동안 나는 '책방고즈넉'으로, '책방주의'로, '봄날의 책방'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책이 가지는 강력한 힘을 또 한 번 체험했다.
신기하게도 나랑 이름도 두 글자나 겹치는(!) 진킴 작가님의 문장을 읽다 눈물이 왈칵 났다. 책을 좋아하는 엄마가 만들어내던 집안의 풍경, 그리고 엄마와 나누던 책 이야기, 엄마가 나이를 먹고 바빠지며 엄마랑 책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점점 없어져서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바빠진다는 건 이렇게 아쉬운 일투성이인 것 같다(p. 135)”라는 말에 울음이 터진 건, 그런 시간들을 고스란히 겪어온 나의 유년기와 앞으로 그런 감정을 겪어갈 나의 아이가 겹쳐 보였기 때문. 지금의 내가 아빠와 책을 이야기하며 보내온 시간들을 소중히 간직하듯, 우리 아이도 나와 보낸 시간들이 추억으로 촘촘히 남아있겠지.
진킴 작가님뿐 아니라 각각의 작가님마다 남기는 문장들이 다 있었다. 어떤 문장은 내 마음 같아서 공감을 했고, 어떤 문장은 생경하게 느껴져 '이렇게 책을, 책방을 바라볼 수 있구나'하고 느끼게 했다. 그래서 온 마음이 푸근해지고 부자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들의 문장을 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아, 나도 이런 기분 알아'하는 연결고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책을 더 사랑하고, 책방을 더 사랑하면 좋겠다.
책을 읽는다는 건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움직이는 일이었다. (p.15 기믕서 '세입오브타임')
이 모든 것이 나를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p.24 고래하 '메종인디아')
어떤 공간이 오래 남는다는 건 결국,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오래 살아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p.34, 소금이 '책보냥')
'독자의 태도가 공간을 완성한다.'는 “다다르다”의 철학처럼 이 서점은 방문하는 모든 이와 함께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작품이다. (p.45, 노리다락 '다다르다')
같은 공간에서 책이 건네는 위로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한 교감이 이루어지리라. (p.56 욘욘 '경기서적')
서점에 들어가는 순간은 언제나 평화 그 자체였다. (p.82, 버드얀 '교보문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그 책을 바라보면 괜히 마음이 풍성해지는 기분이다.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 그저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책. (p.114, 치유 '홀로상점')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내가 누군가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조용한 장소가 주는 감정은 고요함을 넘어 때로는 나 자신을 다시 정리해주는 힘이 되었다. (p.171, 무니 '숭문당')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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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에서 근무하는 스물아홉, 한수정. 신입사원 연수 때 박은영 과장의 강의를 듣고 연정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굳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고향인 부산에 있으라고 했지만, 수정은 끝내 연정에 자리를 잡았다. '과장님이 중앙로지점을 떠나 연정시장지점으로 옮겨갈 때 나도 기어이 따라갔어요.(p. 13)'라고 한 부분에서 수정이 과장님을 얼마나 좋아하고 따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라고 영 다른 인생을 산 건 아니라는 말이에요. 불행하게 큰 적 없고, 악랄한 새아버지에게 구박받은 적도 없고, 우리 엄마도 남자에게 미쳐서 애들 다 팽개치고 팔자 고친 여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평범했다는 거예요. 평범하게 자랐다는 말을 왜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p. 24)
평범한 여자 사람, 한수정. 수정은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나는 유별난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한다. 책 속 등장인물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유심히 듣지 않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래요, 수정 씨 당신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당신에게 닥친 그 일이 안타깝고 화가 나요.
"한대리님을 사랑한 거 말고, 제가 잘못한 일이 뭐가 있어요?" "도대체 언제쯤이면 제 맘을 알아줄 건데요? 나 확 은행 옮겨버린다? 잔고 다 빼서 딴 게 갈 거예요?" 듣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저 말에 순간 나도 진절머리가 났다. 저 말에 몇 달 전에 읽었던 소설 #당신의떡볶이로부터#어느떡볶이청년의순정에대하여 가 생각났다. 아무래도 이 소설은 '어느 떡볶이 청년의 순정에 대하여(이하 어.떡.청.순)'에서 시작한 소설이니까 그럴 수밖에! 김서령 작가님은 매운맛을 단단히 보여주고 싶으셨나 보다.
"그러면! 그렇게 만났으면! 애를 데려가지! 느이 집으로 데려가 며칠만 재우지." 엄마의 외침에 눈물이 났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집에 오는 길에 읽다가 눈물 날 뻔했다. 너무 몰입했다. 남은 두 딸이 걱정돼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끽해야 6년 살다가 나온다는데, 나와도 아직 한참 젊다는데, 혹시나 남은 두 딸에게 복수라도 하면 어떡해. 엄마는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합의를 했을 것이다.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건 기분 탓만이 아니다. 올해 3월 있었던 노원 세 모녀 살인사건이 떠오른다. 1심 무기징역 선고 이후 항소를 한 상태이고 내년 1월 중으로 2심 재판 결과가 나온다. 소설과 비슷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걸 보고 있으니 무섭다. 그냥 소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작가님 딸이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썼어?"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한 것처럼 내 마음도 똑같다. 우리 모두에게 찾아올 미래가 안전하고 행복하고 편안하길 바라본다.
떡볶이에서는요, 골목 냄새가 나요.
골목 냄새가 뭐냐면, 담이 낮은 집들이 쭉 늘어섰고, 고무줄 놀이도 겨우 할 만큼 좁은 골목들이 막 엉켜 있는데요, 초입에 붉은 포장을 친 떡볶이 집이 있거든요. 합판을 몇 장 겹쳐 만든 긴 의자에 올라 앉아 다를 대롱거리며 백 원짜리 동전 몇 닢을 아줌마에게 건네면 비닐을 씌운 멜라민 접시에 빨간 떡볶이를 가득 담아줘요. 이쑤시개로 밀떡 하나 집어 넣으면 참 달콤도 하지. 종이컵에 부어주는 어묵 국물 후후 불어 마시면 등 뒤로 저녁 바람이 스쳐요. 노을 묻은 저녁 바람 아시죠? (p. 47 김서령, 어느 떡볶이 청년의 순정에 대하여)
이 책의 첫 장쯤을 펼쳤을 때였던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다섯 손가락에 꼽는 김서령작가님이 그랬다. 본인의 떡볶이는 좀 매울 거라고. 그런데 처음으로 작가님의 말에 토를 달아본다. “아니요. 그냥 매운게 아니라 씁쓸하게 매워요. 쿨피스 말고, 아주 차가운 생수로 입을 헹궈야 할 것처럼 세상이 맵고, 속이 쓰려요”. 라고. 혹자는 말하겠지. 무슨 놈의 떡볶이를 놓고 세상이 맵고 속이 쓰리냐고.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봐라.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다. 떡볶이에 얽힌 자신만의 서사시가.
나에게도 떡볶이를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그와 떡볶이만 먹은 것도 아닌데, 세상 다양한 진미를 나에게 먹여준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떡볶이를 앞에 높으면 그가 생각난다. 난 맵고 짠 음식을 즐기지 않는 편인데, 유독 떡볶이를 좋아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꽤 먼 거리를 달려 떡볶이 집에 나를 앉혔다. 어린애를 대하듯 튀긴 만두를 내 떡볶이에 얹어주고, 내 쿨피스 잔이 컵의 허리 깨에 내려앉으면 또 쿨피스를 채워 주웠다. 그는 언제나 내게 쿨피스처럼 달콤한 사람이었다.
이 책에는 10명의 작가, 10개의 떡볶이 이야기, 그리고 아주 많은 이들의 인생이 담겨있다. 짧은 이야기도 있고, 꽤 긴 이야기도 있다. 퍽이나 유쾌한 이야기도 있고, 퍽이나 깊은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야기 하나하나에서 우리의 삶을 느낄 수 있고, 우리 인생 어느 시점을 꺼내 보게 되기도 한다. 남우에게서는 유쾌한 웃음을- 한대리에게서는 가슴 쓰린 아픔을, 효나의 이야기에서는 분노와 원통함을 느꼈다.
나는 이 책을 오래도록 읽었다. 아팠고, 힘들었고, 고민했고, 울었다. 그래서 사실 생각보다 늦은 리뷰를 쓰는 거다. 리뷰 자체를 참으로 오랜만에 남기는데, 한동안의 나는 마구 흔들리고 마구 슬퍼하고 마구 기뻐하고 마구 행복해하고 마구 울고 마구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또 조금 자랐다. 또 한번 나의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고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을, 가까이 두어야 할 사람을 구분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김치 안에서 덜 갈려진 생강을 찾아내는 일과 같고, 떡볶이 안에 숨겨진 단 하나의 계란을 찾아내는 일과 같다.
수오서재의 책은 언제나 나를 생각하게 한다. 언제나 나를 고민하게 한다. 길었던 나의 고민에 일단은 마침표를 찍어본다. 쉼표를 찍으려다 마침표를 찍는 것은 나에게는 여전히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반면 등의 수많은 접속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떡볶이 한 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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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 속에 살아가고 있을까. 끝내 풀리지 못한 채 묻혀 버린 세상의 오해들이 얼마나 많을까. 알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 문제로 얼마나 많은 관계가 파투 났을까. (p.53)
책 좀 읽는 사람들이라면 빼먹지 않는 작가들이 있다. 물론 이 작가들을 다 거론하자면 이 리뷰는 시작부터 끝까지 이름으로 채워질 것 같아서 여기에 한가지 조건을 더 붙여본다. 본인 글도 잘 쓰지만, 남의 글도 잘 옮기는, 즉 번역가이자 작가인 분들(사실 번역이란 게 언어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작가님들이 번역한 책을 읽는 것은 독자로서 매우 행복한 일이다.)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top3를 뽑자면 사랑하는 <빨강머리앤>을 번역하신, 또 사랑하는 김서령 작가님과 거짓말 좀 보태서 200번은 읽은 인생책 <어린왕자>를 번역하신 황현산 교수님, <창가의 토토> 권남희 작가님이다. 적어도 이 세분의 책은 조건 없이 읽고 있기에, 이번에 나온 권남희 작가님의 책도 나오자마자 집어 들었다. (아쉬워진다. 더는 황현산 교수님의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마 이 분들의 이름을 몰라도, 이 분들의 책은 한번쯤 읽어봤을 테고, 권남희 작가님이 번역한 책은 참으로 많으니 거르기가 더 힘들지도 모른다. (300여권을 번역하였으니 그걸 어찌 거른단 말인가) 언제나 붙어있는 수식어처럼, 이번 책도 재미있고 유쾌하고 명료했다.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음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서론이 길었다.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짤막하지만 깊이가 있는 에세이들로 한 권을 엮어서일까. 마치 그녀의 삶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엿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편안하게 읽히고, 마음에 굵직하게 남는다. 내 이야기 같아서, 내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이야기라서.
- 며칠 푸르르 끓었던 화가 풀리고 마음이 편해졌다. 무 자르듯 자르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p.84)
- 동물이나 인간이나 자기 가치관과 다르게 산다 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교만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 늘보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싶다. 나무늘보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라고. (p.118)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모두 똑같이 표현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냥 적당히 알아서 들으라고 말하는. 물론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순간에 대해 물으면 언제나 솔직하게 대답해주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나도 사람인지라 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고,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지 화가 치밀곤 한다.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화를 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유는 몰랐지만.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무 자르듯 잘라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미운 말을 하지만 그 안에 숨은 예쁜 마음을 알기에 그냥 적당히 알아들어보고 싶은 거라는 것을. 나는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최대한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어디 세상이 다 나와 같던가. 그리고 또 입으로 뱉는 것만이 말은 아님을 알 나이가 되지 않았던가.
끄덕이며, 웃으며 씁쓸함을 함께 느끼며 읽다 보니 어느새 책의 마지막 장이다. 그녀가 번역한 책들도 그랬지만, 그녀가 쓴 문장들도 참으로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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