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너와 묵호가 꿈을 꾸는 동안, 나더러 더 꿈같은 삶을 살아달라고 말했어. 그 말을 듣고 나니 너희가 눈을 떴을 때 내 삶이 한 편의 해피엔딩 영화 같았으면 싶더라. 그래서 정말 부단히 열심히 살았어. 나 사랑하는 상대는 못 찾았어. 사랑에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더라, 나는. 대신 집을 샀고, 운명같이 찾아온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됐어. 취미로 발레를 시작하면서 내내 나를 괴롭히던 목 디스크도 없어졌어. 이렇게 설명하니 참 시시하네. 그런데 너도 알지? 이 시시함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얼마나 악을 쓰고 버텨야 하는지. 이 모든 시시함, 별일 없이 무난한, 어제인지 오늘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특색 없는 날들이 반복되는 거. 시계를 보지 않아도 노을로 하루의 때를 알게 되는 거. 어떤 기척에도 불안을 느끼지 않게 되는 거.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흐른다고 여겨지게 되는 거. 그 기저에는 소용돌이를 버티는 쇠몽둥이 같은 단단함이 있어야 하잖아. 그렇게 살았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된 날, 그 고요한 시시함 속에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너랑 묵호한테 바로 말해주지 못하는 게 얼마나 억울하던지.
아빠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은, 행동하지 않았다면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는 죄가 될 수 없다는 거다. 마음마저 순결한 사람을 적어도 아빠는 살아오면서 본 적이 없다. 단지 순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열매 같은 거란다. 씨앗은 같지만 어떤 과육은 싱그럽고 어떤 과육은 썩어 있지. 또 어떤 것은 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쓰기도 하지. 떫기도 하고, 혀를 아리게 만들기도 해. 같은 씨앗이 모두 같은 맛을 내지 않는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중요한 건 씨앗보다 과육이야. 마음보다 보이는 모습이 어떤지가 더 중요한 법이야. 아빠가 늘 말했잖니. 사람들의 친절은, 그냥 친절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그 속에서 어떤 안타까움이나, 어떤 우월함이나, 어떤 기만이 들어 있다고 한들 우리가 그것까지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고. 엄마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 엄마는 그저 종일 누워 하늘만 바라볼 뿐이니까. 그러니, 엄마가 심심해할 거라고, 위로워할 거라고, 슬퍼할 거라고 생각해서 너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지 말기로 아빠랑 약속했잖니.
밖에 있는 저 괴물들도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지 간에 분명한 건 저들이 우리를 위협한다는 거야. 그 사실 하나만을 생각하자. 아빠는 저들로부터 너와 엄마를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할 거야. 저들을 죽여서라도......
250814
프로젝트 헤일메리로 SF 소설을 처음 접해서인지 이 책의 초반은 조금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물론 소설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엔 내용에 쉽게 적응을 못했는데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총 8편의 단편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남았던 건 아래 네 편이다.
단편들의 제목 하나하나가 작품 내용과 너무 잘 어울려 오래 기억에 남았다.
📚 스펙트럼
“색채 언어”라는 말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죽은 루이를 대신해 나타난 다음 루이들(다섯 번째 루이까지) 모두가 희진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았던 이유가 궁금했다.
루이들이 그리던 그림들이 바로 무리인들이 사용하는 색채 언어였다.
그 속에는 첫 번째 루이의 희진을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이후의 루이들이 그 마음을 읽고 이어갔다.
희진을 아꼈던 첫 번째 루이와, 다른 루이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왜 무리인들의 수명은 짧은 거냐고.. ㅠㅠ)
따뜻한 드라마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루이는 희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희진의 뒤로 펼쳐진 노을을 보고 있었다.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영혼은 이어질 수 없다. 그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다른 루이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같은 루이가 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
루이들은 단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나는 할머니의 유해를 우주로 실어 보내 별들에게 돌려주었다.』
📚 공생 가설
와- 진짜 신박하다 신박해!!
스토리를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니, 발상이 너무 참신해서 읽는 내내 재밌었다.
흥분해서 남편한테 줄거리를 신나게 얘기해 줬는데 너무 T적으로 대답해서 괜히 열받았다.
T들은 읽지 말기를.. (ㅋㅋ)
『하지만 만약 공생의 대상이 지구상의 생물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것이 우리의 뇌에 자리 잡았고, 우리의 유년기를 지배했고,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가르쳐왔다면.
인간을 비인간 동물과 구분하는 명백한 특질들이 사실은 인간 밖에서 온 것들이라면.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군요.”
유년기의 기억이 외부 요인에 의해서 상실되는 것이라면 그건 대체 뭘까, 무엇이 아이들의 기억을 데려가는 걸까.
“그들이 기억과 함께 우리를 떠나는 거야.”
뇌에 자리 잡은 그들의 흔적.
막연하고 추상적이지만 끝내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
우리를 가르치고 돌보았던 존재들에 관한 희미한 그리움.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유년기에 우리를 떠난 그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K-드라마적인 요소에 SF를 절묘하게 섞은 작품 같다는 게 처음으로 든 생각이다.
배경은 우주이지만 정서와 분위기는 K-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가족, 그리고 언젠가 가족이 있는 행성에 가는 우주선이 다시 생기기를 바라며 백 번이 넘게 냉동 수면과 각성을 반복하는 여자.
내용은 자체는 뻔할 수 있지만 한 아이의 엄마로서 만날 수 없는 가족의 그리움을 알기에 더욱 슬프게 와닿았다.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
📚 관내 분실
나이가 들수록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이 어렵다.
정말 내가 그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고 있는 걸까,
내 위로가 과연 정말로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보고 너를 이해한다는 듯 말하는 것이 이제는 쉽지 않다.
엄마가 되지 않고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나 역시 엄마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엄마가 아닌 ‘나’라는 삶도 중요하다.
‘나‘와 ’엄마‘라는 두 이름의 인생을 살고 있는 만큼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아이가 있는 한 엄마의 인생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필연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 엄마를 떠올려보면, 그녀의 인생을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내게 엄마는 그냥 엄마일 뿐이다.
뭐라 표현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는 이미 내 엄마였으니까.
여자이고 엄마이기에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_모든 상황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사람을 무너뜨린다.
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그래도 엄마는 분실되었을까.
_엄마는 지민을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도 아이를 가져서 두려웠을까. 그렇지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을까.
그렇게 지민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엄마.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 존재했을 김은하 씨.
지민은 본 적 없는 그녀의 과거를 이제야 상상할 수 있었다.
_“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게 진짜로 엄마의 지난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지민은 한 발짝 다가섰다.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던 은하가 마침내 지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지민은 알 수 있었다.
“이제 … ….”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
#노을건너기
한국 SF 대가 #천선란 작가님의 따뜻한 #청소년소설
창밖의 노을을 올려다보던,
가장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간다.
❝나는 너를 좋아해.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너를 너무 좋아한단다.❞
✔ 어린 시절의 나와 화해하고 싶다면
✔ 마음 속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치유하고 싶다면
✔ 천선란 작가님의 섬세하고 따듯한 문장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 책 소개
우주 비행사 '공효'는
자신의 기억에 따라 구현된
가상의 공간에서
외롭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마주한다.
어린 공효는
창밖의 노을이 집안으로 침범해
붉게 변한 집에 홀로 있는 것을
싫어했다.
공효는 과연 노을을 건너
우주를 보러갈 수 있을까.
✨
"모두가 각자 품고 있는 그 노을을,
무사히 건너 어른이 되기를 바랍니다" _ 작가의 말
🔖 한 줄 소감
나의 어린 시절 고민들이 떠올랐다.
잔잔하고도 짧은 이야기지만
마음이 스르르 녹는 것은
작가의 아름다운 문체와
#리툰 님의 따뜻하고 평화로운 일러스트가 만들어낸
완벽한 조화 덕분인 듯.
추운 겨울, 포장마차의 따뜻한 불빛 아래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뎅국물 한 잔 마신 기분~ 😍
#청소년sf#청소년소설#창비#소설의첫만남#2025_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