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내 힘만으로는
아니지싶다.
누군가 등을 밀었거나
앞에서 손잡아 이끌었지 싶다.
어찌 내 능력만으로 내 공덕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p.196, '봉화행' 중에서)
요즈음 내가 하고 있는 기도가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이를 구분하는 지혜도 주소서”라는 기도다. 사실 마음의 평정이 필요해 시작한 기도인데, 나태주 시인의 신작 여행시집,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를 읽는 내내 내가 이 기도의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며 나이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를 읽으며, 이 책이 단순히 그가 탄자니아를 여행하는 것, 후원하던 소녀를 만나기 위해 탄자니아를 방문한 여행기만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순간 순간의 소중함과 감사함까지 담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 역시 내 삶에 가진 것에 감사하게 되고, 가지지 못한 것을 욕심내지 않는 평온을 추구하자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
탄자니아의 붉은 흙과 바람, 그리고 햇빛 속에서 느낀 생명을 134편의 시와 62점의 연필화로 표현한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는, 현지에서의 감상, 지나온 삶과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의 몸과 마음이 머물더 장소들을 차례로 떠올린다.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라는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 사실 우리의 모든 순간은 빛나고, 소중한 시절들이었다는 깨달음을 독자에게도 슬쩍 전해준다. 또 여행과 독서, 실패와 질병이 인생을 바꾼다는 말을 읽으며 어쩌면 이 조차도 순간순간을 읽고, 여행하고, 배우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추며 살으라는 가르침은 아닌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 시인이 선함을 나누어준 탄자니아 소녀를 만났으나, 독자인 내가 내 주변인들과 나의 환경, 나의 삶이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 아마 나태주 시인 역시, 그 소녀에게 그저 주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은 나누었으나, 그로인해 스스로의 마음이 더 따뜻해지고 행복해졌을 터. 이런 생각을 하며, 인간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언제나 잔잔하게 아름다웠다. 그런데 오늘의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는 “잔잔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덤덤한 일상의 감사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결국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건 한잔의 커피, 볼을 간지럽히는 바람, 책 한 장의 문장 등이 아닌가. 나도 매일매일을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하고 말할 수 있도록 내게 주어진 매일매일을 만족하고,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가고, 더 감사하며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월든』과 꽤 긴 시간 사투를 벌여왔다. 사투라고 하면 이상하겠지만, 아무튼 나에게 있어 『월든』은 유달리 읽히지 않고, 그러면서도 유달리 포기가 되지 않아 계속 되찾게 되는 책이다. 그 시작은 2017년이었고, 2019년에도 한번, 2022년에 또 다시 읽었다. (시도까지 합치면 2023년, 2024년도 포함할 수 있다.) 때로는 이해 못하는 게 너무 분해서(?) 도전했고, 때로는 좋아하는 작가들이 소로를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또 도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또 『월든』을 읽었다.
솔직히, 『월든』을 두번 째 완독했을 때에도 여전히 문장의 길이나 호흡 등에 지침을 느꼈더랬다. 그런데 세번 째 완독 (바로 지금)을 하면서는 이 느림조차 소로의 의도가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 사실 책을 읽는 속도마저 삶의 태도가 반영되는 것이 아닌가. 항상 많은 책을 갈망하고, 더 많이 읽고 싶어하는 나의 조바심에 내가 소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독서는 단순히 힘든 과정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성급하게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클로츠 출판사에서 출간한 『월든』으로 다시 소로를 만나며, 고독의 가치를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나이를 먹으며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느껴가곤 하는데, 이번 『월든』 을 통해 나의 고독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제야 문득, 소로가 말하는 고독이 결핍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더 깊이 아는 충만이 아닌가 생각했다.
또 과거에 『월든』을 읽으며 한참이나 머물렀던 소리의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과거의 나는 "소리들"을 두고, 글씨만 읽고 소리를 듣지 못한 나를 많이 생각해보게 했었는데, 이번에 『월든』을 읽는데 그때의 감상 위로 나의 소리, 내 주변의 소리, 가족의 소리, 내가 살아온 시간들의 소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는 연결과 소비를 요구하지만, 오히려 소로의 말처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용기"야말로 불필요한 소리들을 들어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소로가 만들어내는 자발적인 불편함이 어떤 집중을 가져오는지를 느끼며, 나도 더욱 본질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 소로가 말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해서 귀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우리는 그것들을 놓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소로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돈보다 귀한 시간, 자연 속에서 끝없이 성찰하라 말하는 그의 메시지, 한 발 거리두고 조금 더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그의 시각적 거리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느끼며 이것이 『월든』의 매력임을 조금 느낀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나는 『월든』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고 무겁게만 느꼈던 첫번째 독서, 여전히 나는 알지 못했다는 결핍을 주는 두번째 독서를 지나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조차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번 독서를 경험하며, 오히려 나는 이로인해 또 『월든』을 찾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의 정석도 아닌 『월든』을 왜 이렇게 앞장만 읽다 지쳤던가. 욕심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삶의 어러 계절, 조금씩 느끼고 만나야 하는 책은 아니었나 싶다. 『월든』을 그저 "자연 속에서 느끼는 단순한 삶"이라 느꼈던 어린 나에게, 그때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깨닫기엔 너무 어렸던 것 뿐이라고 토닥여주고 싶다.
혹시 나처럼, 여전히 『월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온 사람이 있다면 조바심을 내지 말아달라고 말해주고 싶다. 분명 힘들긴 했으나 『월든』을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질문과 만나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나는 정말 나에게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준 『월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또 한번 새 계절을 맞을 나의 곁에도 『월든』이 꼭 필요한 질문을 던져주기를.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에 불과하다. 서 있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그런데 계속 앉아만 있으면 심심하니까 앞에 책을 펼치고 그것을 보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뇌는 쉽게 얻은 쾌락에 대해 고통을 수반하도록 구성되었고, 중독으로 이어지면 우울증, 무기력증, 자살 충동 같은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애나 렘키 교수는 완전한 단절이 어렵다면 쾌락을 추구하기 전에 고통을 겪는 방법을 제안한다. 독서, 글쓰기, 공부, 운동, 찬물 샤워 등의 고통스러운 활동을 먼저 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으로 기쁨과 쾌락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즉, 쾌락을 먼저 선택하면 빚내서 도파민을 사용하는 것과 같고, 고통을 먼저 선택하면 저축한 도파민을 사용하는 것과 같아서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원리다.
오늘 하루,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시간을 보냈는가? 오늘 하루 내가 한 일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활동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나? 이런 일상이 반복된다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 나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만족할 수 있겠는가?
본능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일을 하는 Work Hard의 패러다임은 본능이 원해서, 자기 자신이 좋아서 하는 Think Hard의 패러다임의 효율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 일이 삶의 수단이 되는 것보다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야 보다 의미 있고 삶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내게 독서는 밤하늘에 별을 쏘아 올리는 일이다. 어느 독서는 북극성이고 남십자성이 되어 삶의 지표이며 길잡이가 된다. 물론 존재하는 모든 건 사멸하게 마련이고, 그 빛조차 마침내는 흐려질 것을 안다. 그렇다 해서 어디 쓸모없는 돌덩이를 내 귀한 별들에 댈 수 있을까.
독서가 필연적으로 비독서로 귀결된다는 주장은 맞는 얘길지도 모르겠다. 태어난 모든 것의 귀착은 죽음이니까.
그러나 적어도 빛을 내고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독서는 독서로 남는다. 그 동안엔 좋은 독서와 겉만 핥는 독서, 독서를 참칭하는 이 책 속 무수한 흉내내기가 결코 같을 수 없다.
고의적 어그로든 아니든 간에 궤변으로 가득한 책이다. 읽지 않는 것도, 대충 훑어보거나 다른 이의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도 독서와 매 한가지란 주장엔 퉤퉤퉤, 홀리한 아밀라이스를 뿌려줄 일.
되도 않는 일로 통빡 굴리지 말자. 안 읽은 책은 읽지 않았다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