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베개' 중년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람이라면 젊은시절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출판사일 것이다. 나도 젊은 시절 돌베개의 책들과 함께한 시간이 많았고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뜨겁게 했던 추억이다.
이 책은 한때 돌베개 출판사의 대표였던 임승남 선생의 자서전이다. 그 험난했던 시기에 이 세상에 내던져진 한 남자의 기구했던 젊은 시절과 그 속에서도 치열하게 삶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기회와 그 기회를 성실함으로 놓치지 않고 의미있는 사회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필자의 자신의 삶에 대해 꾸미지 않은 순수함이 끝까지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읽게 만드는 거 같다.
어찌보면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운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미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준비해 온 필자의 성실함이 있었다.
온전한 사람도 병신으로 만들고 간첩으로 만들던 그 시절에 온갖 불리한 상황에서도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필자의 내면에 장착된 성실함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큰 어려움 없이 부모의 그늘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꼭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우리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중에서도 돌베개라는 출판사를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조선을 제법 안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좋아해 읽은 책이 여럿이었고 조선을 다룬 영화며 드라마는 빼놓지 않고 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여겼다. 웬만큼 이름난 인물이라면 뒷이야기까지 한참을 떠들 수 있었고, 유명한 사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읽은 책 <용재총화>를 보며 그와 같은 생각이 모두 깨졌으니, 내가 아는 건 역사일 뿐이지 그 시절 세상은 아니었다.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를 산 성현의 책이다. 다재다능하고 자유분방한 양반으로 세조부터 연산군까지 네 임금을 모시며 높은 벼슬까지 올랐다. 거침없는 성격과 높은 안목으로 학문과 예술, 음식과 지리 등을 자유롭게 논하여 탁월한 비평가로 평가됐다. 조선 초기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의 이런 성향과 잘 어울렸다.
평생 많은 저작을 남긴 성현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 책을 묶어냈다. 어린 시절 그 자신이 친구들과 겪은 일부터 민간의 풍속과 각종 풍문, 당대에 유명했던 일화, 사람과 작품에 대한 평론까지 다방면의 글을 한 책에 엮었다.
돌베개가 '우리고전 100선'의 22번째 작품으로 출간한 <용재총화>엔 모두 69편의 글이 실렸는데 그 성격과 내용이 워낙 다양해서 한 책에 실린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가장 큰 가치는 조선을 다룬 다른 책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성현이란 인물이 제 신변잡기부터 친구를 골탕 먹인 일화, 심지어는 온갖 풍문을 수집해 현실감 있게 적어 놓았다보니 자연스레 당대 시대와 사람의 모습이 가까이서 읽힌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선비 윤통이란 자는 익살맞고 입심이 좋은데다 사리사욕 챙기는데 주저함이 없어 남을 자주 속였다. 그가 부패한 중을 속여 제 집을 마련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윤통은 시주를 모으는데 능력이 있는 중을 불러다 절을 세워 덕을 쌓겠다며 함께 절을 만들어보자고 꼬드겼다. 중이 동의하자 윤통이 보시를 청하는 글을 직접 쓰고 중이 절을 짓기 위한 재물을 모았다.
그런데 윤통이 지휘한 공사가 조금 이상했다. 보통 절과 달리 온돌방을 많이 만들어놨고 황무지를 개간해 채소밭까지 마련한 것이다. 어찌됐든 절이 완성됐고 윤통은 중에게 아내와 식구들을 불러다 먼저 불공을 드려야겠다고 청했다.
문제는 찾아온 윤통의 식구들이 병을 핑계로 절에 눌러앉아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세간까지 모두 챙겨와 실제 집인지 절인지 알 길이 없었다. 자연히 중들이 절에 들어올 자리도 없었다. 중은 그제야 속았다고 느껴 관아에 소를 냈지만 유명한 선비였던 윤통을 당해낼 수 없었다는 결말이다. 성현은 윤통이 여든까지 장수했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밖에도 책은 다양한 당시 이야기를 통해 당대 시대상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중국을 오가는 사신과 지방을 감찰하는 관리들이 기생들과 노는 이야기며 기생들이 양반을 꼬드겨 한몫 잡으려는 수작까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가끔은 음탕한 관리를 골탕 먹이는 인물들이 등장해 속 시원한 이야기를 빚어낸다. 당대 명사들까지 실명으로 등장하는 성현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당대 시대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듯싶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건 성현의 비평이다. 성현은 음악가와 음악, 화가와 그림, 문장가와 시, 심지어는 서울의 명소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비평을 감행하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성현의 성향과 취향, 깊이와 안목이 5세기를 초월해 읽는 수준급 비평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 땅에서 비평을 업으로 삼으면서도 조선을 살았던 단 한 명의 비평가도 알지 못했던 나로선 꽤나 충격적인 만남이었다. 어째서 나는 그 긴 시간을 산 모든 이들이 제대로 된 비평을 내놓지 못한 채 숨죽여 살았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나 뿐은 아닐 것이다.
성현이 이 땅의 선배 문장가를 평한 대목을 살펴보자. 그는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뒤로 문장을 잘 짓는다는 명성을 크게 떨쳤다면서도 '시구를 잘 짓긴 하지만 뜻이 정밀하지 않고, 비록 사륙문을 짓는 솜씨가 공교롭긴 하지만 어휘가 정돈되어 있지 않다'고 적고 있다.
고려의 김부식에 대해선 '넉넉하지만 화려하지는 않'다고 평하며 정지상은 '찬란하지만 굳건한 기운을 드날리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규보는 '글을 전개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잘 수습하지는 않고', 이인로는 '자구를 잘 단련하지만 글을 펼쳐나가는 필력은 부족하다'고 평가된다. 임춘과 이제현, 이승인, 정몽주, 이색 등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명사들의 글 역시 모두 언급된다.
신숙주, 최항, 이석형,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 서거정, 강희맹, 김수녕 등 조선 선배 문장가에 대해서도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문장가들인 만큼 칭찬이 주를 이루지만 부족한 부분에 대한 평가도 빠지지 않는다.
화가와 음악가에 대해선 더욱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산수화와 인물화에 모두 조예가 깊었던 배련이 인물화로 이름을 날린 최경을 인정하지 않아 둘 사이가 나빴다는 내용을 이 책이 아니라면 어디서 읽을 수 있겠나. 최경의 인물화는 안견의 산수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대 화풍을 주도했던 인물이지만, 강희안과 같이 뛰어난 화가는 늘 배련의 작품을 극찬하곤 하였다고도 적는다.
<몽유도원도>로 잘 알려진 안견의 그림 가운데선 <청산백운도>가 중요하게 언급된다. 성현이 승지이던 시절 궁에서 작품을 직접 보고는 감동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성현은 안견이 <청산백운도>에 대해 늘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평생의 공력이 여기에 있다."
높은 안목으로 서울에서 경치 좋은 곳을 논하는 대목은 새삼 재미있다. 성현이 평가한 물 좋은 동네를 500년 뒤 직접 가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이미 전화기 속 세입자가 된 지 오래다. 이제 사람들은 셔터를 연사해 마음에 드는 순간만 골라낼 수도 있다. 그런 마당에 필름 카페라는 참 불편하고 무능하다. 너무 가까워도, 조금만 어두워도 피사체를 제대로 담지 못한다. 게다가 너무 무겁다. (...) 그럼에도 예측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강렬한 결과물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건 모든 게 완벽하고 안전한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결핍의 산물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필름을 고르고, 뷰 파인더로 피사체를 바라보고, 묵직한 셔터를 누르고 리와인드 레버를 돌려 필름을 꺼내 시간을 묵혀두다가 나만의 빛이 태어나는 순간을 기다린다. (p.182)
며칠이나 늦게 정리하는, 지난 12월 27일, 2023년 마지막 독서 모임 이야기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독서 모임은 각자 책을 고르고, 자신이 읽었던 책을 추천하는 형식의 독모였습니다. 무슨 책을 소개할까 꽤 길게 고민했던 것 같아요.
애정하는 김진영 선생님의 책을 소개해야 할지, 한참 필사하며 읽던 김종원 작가님 책을 소개해야 할지- 그러다 우연히 마음에 닿은 것은 루시드폴의 『모두가 듣는다』였습니다. 사실 너무 좋아하는 출판사인 돌베개에서 너무 돌베개답지 않은 여리여리한 표지의 책이 올라와 있기에, 가만히 들여다보니 감성 끝판왕 루시드폴이더라고요. (이수지 작가님과 「물이 되는 꿈」을 작업하신 그 감성 끝판왕 맞습니다) 그래서 “그래, 연말에는 감성이지”하며 이 책을 냉큼 집어 들었습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연말 답답했던 마음이 눈 녹듯 녹는 기분이었습니다. (고민하던 김종원 작가님의 책도 여러 건 등장했고요.) 감정적인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가슴이 몽글해졌고,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리라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도서소개를 들으며 울컥하는 마음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마음을 담담히 이야기하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소개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좀 억지로 자꾸 웃었고, 독서 모임을 끝으로 이사를 한다는 한 분의 관계에 대한 문장은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과 1년간 독서 모임을 할 수 있었음이 복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바빠져서, 2024년에는 도서모임을 참가할 수 있을지 아닐지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더 하는 것으로 욕심을 부려보고 있습니다.
어느새 새로운 한 해가 왔습니다. 달력이나 다이어리는 어느새 새것을 꺼내 들었고 새로운 기록을 위한 볼펜도 새로 들였지만, 이제는 무조건 새로운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의 삶도 휴대폰으로 들어간 카메라처럼 점점 편리해지고, 빨라지고, 급해지겠지만- 적어도 필름카메라가 남기는 '흔적'처럼- 마음에 무엇인가를 남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모두가 듣는다』를 읽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2023년의 마지막에 『모두가 듣는다』를 읽고- 누군가에게 나눌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물로받은 고정순 작가님의 일력은 2024년 나와 매일함께할 응원이 되겠지요?
이 책은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작가의 어린시절로 앵벌이와 도둑질을 하며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린 시절,
출판업계에서 일을 하면 많은 성장을 이룬 시절,
마지막으로 국가보안법으로 재판을 받고 나와 돌베개와 헤어지기까지의 시절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모두 담은 영화 한편을 본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서 교과서로 보던 근현대사의 기록들과 비교할 수 없이 사실적이고 처절하게 피부로 다가왔다.
마음이 아리고 무거웠다.
몇 장 읽다가 접어둔 전태일 평전을 다시 꺼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전과는 결코 같은 느낌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이토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작가가 너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삶이 지루하거나 삶에 자극을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