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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장편소설)
줄리언 반스 지음
다산책방
 펴냄
12,800 원
11,52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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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할 때
심심할 때
읽으면 좋아요.
#기억
#막장
#변화
#운명
#종말
268쪽 | 2012-03-26
분량 보통인책 | 난이도 쉬운책
상세 정보
<내 말 좀 들어봐>,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작가 줄리언 반스의 장편소설로,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인디펜던트」, 「타임스」 등 영미권 주요 매체들과 평론가들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소개하면서 기억과 윤리의 '심리 스릴러'라는 말을 썼다. 원서로 150페이지 남짓한 이 길지 않은 소설이 독자를 몰아치는 힘과 서스펜스, 섬세하고 정교한 구성력 때문이다.<BR> <BR> 또한 평론가와 저널리스트들은 소설적 완성도와 비극적 테마가 주는 무게로 따질 때, 반스의 이 최신작이 비슷한 길이의 노벨라(경장편)인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에 필적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는 1인칭 화자의 시점에 의존하여 인간의 기억과 시점의 왜곡을 탐색하고, 마침내 진실이 모습을 드러낼 때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는 점에서다. <BR> <BR> 이 작품의 테마인 '왜곡된 기억'은 줄리언 반스가 논픽션인 <두려워할 것은 없다>에서 철학자인 자신의 형 조너선 반스와의 쉽지 않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루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교사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 속 허구의 역사학자인) 라그랑주를 인용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대답하는 지점에서 작가의 성찰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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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09
2부 103
옮긴이의 말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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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보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대표 작가. 1946년 1월 19일 영국 중부 레스터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현대 언어를 공부했고, 1969년부터 3년간 『옥스퍼드 영어 사전』 증보판을 편찬했다. 이후 유수의 문학잡지에서 문학 편집자로 일했고, <옵서버> <뉴 스테이트먼츠>지의 TV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1980년에 출간된 첫 장편소설 『메트로랜드』로 서머싯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해,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태양을 바라보며』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내 말 좀 들어봐』 『고슴도치』 『잉글랜드, 잉글랜드』 『용감한 친구들』 『사랑,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등 11권의 장편소설과 『레몬 테이블』 『크로스 채널』 『맥박』 등 3권의 소설집,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등의 에세이를 펴냈다. 1980년대 초에는 댄 캐바나라는 필명으로 4권의 범죄소설을 쓰기도 했다. 1986년 『플로베르의 앵무새』로 영국 소설가로서는 유일하게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미국 문예 아카데미의 E. M. 포스터상, 1987년 독일 구텐베르크상, 1988년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부르상, 1992년 프랑스 페미나상 등을 받았으며, 1993년 독일의 FVS 재단의 셰익스피어상, 그리고 2004년에는 오스트리아 국가 대상 등을 수상하며 유럽 대부분의 문학상을 석권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는 이례적으로 세 차례에 걸쳐 1988년 슈발리에 문예 훈장, 1995년 오피시에 문예 훈장, 2004년 코망되르 문예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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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글 47
영e님이 이 책을 읽었어요
1주 전
처음부터 책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까지 여주와 남주의 매력에 매료되지 못 했다. 마지막 몇장에서 갑자기 예상치 못 했던 일들이 휘몰아 치는데... 여기에서 마저도 내 예감은 항상 틀린다는게 증명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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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정님이 이 책을 읽었어요
1달 전
⠀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 🔖 그러나 조 헌트 영감이 에이드리언과 논쟁을 벌이면서 한 말은 기억하고 있다. 그는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헨리 8세를 비롯한 기타 등등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에 개인의 삶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 ⠀ 🔖 젊을 때는 서른 살 넘은 사람들이 모두 중년으로 보이고, 쉰살을 넘은 이들은 골동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면서 우리의 생각이 그리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준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결정적이고 그렇게도 역겹던 몇 살 되지도 않는 나이 차가 점차 풍화되어간다. 결국 우리는 모두 '젊지 않음'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로 일괄 통합된다. 내 경우는 그런 문제로 신경 쓰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 🔖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 🔖 인생의 깊이와 세월이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력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20대에서 30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금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폼 잡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우리의 비극까지도. ⠀ 🔖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 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 🖋 작년인가 올해가 기억은 안나지만 엄마들 독서모임에서 선정 된 책이었다. 가독성도 떨어지고 우울해보이고 어려워서 책 읽기를 포기하고 독서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번에 다시 시도를 했는데 처음 부분은 역시나 잘 읽히지 않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로 넘어가서는 꽤 재미가 있어지고 이것 저것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얼마나 외곡되고 자기 중심적인가. 내가 한 말과 행동이 다른 이에게 상처 주었을 것을 생각하니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인생이란 정답이 없다더니, 그 말이 정답인 것 같다. 어떤 일에 당면 했을 때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세월이 지난 후에는 거짓이었고, 진실이라는 게 단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세월의 깨달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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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윤님이 이 책을 읽었어요
4달 전
소설은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1부)과 불충분한 문서(2부)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자기기만 혹은 회고록)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제외하고 이 작품을 논하긴 힘들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망각이 뒤따른다. 영화 한 편을 본다고 치자. 아무리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한들 시작부터 끝까지 인물들의 대사, 미장센, 카메라 숏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우리는 인상 깊었던 몇 장면만을 뇌에서 편집해서 기억할 뿐이다. 즉,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건 무언가를 망각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 토니 역시 과거에 자신이 베로니카에게 퍼부었던 악담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40년 만에 베로니카와 재회한 토니는 그녀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철없는 몽상에 빠져있다.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말한다. “전혀 감을 못잡네.” 그렇다. 제목과는 달리 소설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감을 못 잡는 건 토니뿐만이 아니다. 토니의 시점에서 서술된 소설을 다 읽고 난 독자의 머릿속 역시 모호함과 불확실성이 지배적이다. 롭슨과 에이드리언이 왜 자살했는지, 사라는 토니에게 어떤 의미로 딸에게 모든 것을 내주지 말라고 말했는지, 그리고 토니에게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엔 무엇이 적혀있는지 끝끝내 어떤 것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이다. 바꿔 말하면 뭔가 일어났다는 사실 외에는 주관적인 이야기라는 말이 된다. 토니의 이야기가 그 증거다. 토니는 1부에 걸쳐서 자신의 과거를―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판단 혹은―회상하지만 2부에선 그 모든 것들이 토니가 스스로 미화시킨 기억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토니의 기억이 잘못되었다고 일깨워주는 베로니카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은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토니에게는 직접적인(법적인) 책임이 없다. 토니는 감정에 휩쓸려서 악담을 퍼부었던 것뿐이고, 실제로 행동한 사람은 에이드리언과 사라, 두 사람이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기억도 100% 틀렸다고 단언 할 수는 없다. 그녀가 토니를 전적으로 원망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토니가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건 사실이니까. 토니도 베로니카도 100% 틀린 게 아니라면 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할까. 사실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토니가 처음으로 사실과 마주한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은 회한이다. 그리고 회한 뒤에 찾아온 건 더 큰 혼란이다. 바꿔 말하면 그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할 때 오히려 명확한 삶의 자세를 유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억이 아닌 망각에 초점을 두고 작품을 감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억은 주관적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을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낸다. 그러나 기억을 신뢰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인간은 기억을 윤색하지 않고는 존속하기 힘든 존재라는 거다. 이 사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다. <올드보이>에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오대수가 최면술사에게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기억을 지우는 데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오대수가 스스로 망각하기를 자처했다는 점이다. 오대수와는 달리 토니는 그저 그 순간 느끼는 깊은 회한에 대해 서술한다. 사실을 알게 되어도 상황이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데서 오는 회한과 무력감을. 사실 이 작품의 주된 정서는 망각보다는 회한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끝끝내 회한하기를 거부하고 망각에 쟁점을 두었던 건 나라는 사람이 시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통해 기억을 측량하지만, 시간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제한하고 규정한다. 그렇기에 코앞에서 벌어지는 역사는 가장 분명한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다. 인류가 시간을 지배하지 않는 한, 망각하고 자기기만에 빠지는 행위는 어쩌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미화시킨 끝에 회한과 혼란을 느꼈던 토니처럼. 토니는 역사를 두 번 규정한다. 젊었을 땐 ‘승자들의 거짓말’로, 노인이 되어서는 ‘승자도 패자도 아닌 살아남은 이들의 회고록’으로. 나는 여전히 하나로 규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가, 우리의 기억이 가변적인 거라면, 그래서 ‘뭔가 일어났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재간이 없다면 ‘history’라는 말은 ‘his story’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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