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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얇은 책
출간일
2014.1.12
페이지
172쪽
이럴 때 추천!
행복할 때 , 달달한 로맨스가 필요할 때 , 떠나고 싶을 때 , 고민이 있을 때 , 힐링이 필요할 때 읽으면 좋아요.
상세 정보
벤야민의 가장 왕성한 후계자인 아감벤의 여섯 번째 책. ‘호모 사케르’ 연작을 포함한 일련의 저작들이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현대의 인간 삶/생명이 처한 주권의 아포리아적 상황을 규명하려는 비평이론서에 가깝다면, 『도래하는 공동체』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삶의 형태/형식을 존재론의 관점에서 정식화하는 책이다.
전자의 저서들에서 부정성/수동성의 형태로 암시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 내지는 새로운 삶의 형식이 오히려 출발이 되는 저서에서 긍정성/적극성의 형태로 명시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이후의 다른 저서에서 방사되던 사유의 물줄기에서 거슬러 올라 시원에서 다시 재사유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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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가장 왕성한 후계자인 아감벤의 여섯 번째 책. ‘호모 사케르’ 연작을 포함한 일련의 저작들이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현대의 인간 삶/생명이 처한 주권의 아포리아적 상황을 규명하려는 비평이론서에 가깝다면, 『도래하는 공동체』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삶의 형태/형식을 존재론의 관점에서 정식화하는 책이다.
전자의 저서들에서 부정성/수동성의 형태로 암시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 내지는 새로운 삶의 형식이 오히려 출발이 되는 저서에서 긍정성/적극성의 형태로 명시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이후의 다른 저서에서 방사되던 사유의 물줄기에서 거슬러 올라 시원에서 다시 재사유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출판사 책 소개
벤야민의 가장 왕성한 후계자인 아감벤, 그의 정치철학의 시원과 만나다
“이 작은 책은 지성적 영혼의 천국, 파라디수스 아니마이 인텔리겐티스라 불린다Dit buchelin heizit ein paradis der fornuftigin sele, paradisus animae intelligentis”라는, 마치 신비스런 신탁神託과도 같은 울림을 지닌 말로 시작되는 조르조 아감벤의 여섯 번째 책 『도래하는 공동체』. 1990년에 출간된 이래 그저 풍문으로만 회자되던 이 책이 드디어 한국어로 옮겨져 선보이게 되었다. 이미 우리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 오늘의 세계에서 새로운 정치적 사유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준거가 되는 사상가 아감벤에게 이 책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아감벤에게 있어(비단 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학과 정치철학은 분리될 수 있거나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 『도래하는 공동체』는 그가 본격적인 정치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처음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개의 함축적인 사유의 단상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책은 한마디로 이후 왕성하게 전개되어온 그의 정치철학서들을 이해하는 ‘원천’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19세기 유토피아의 정향을 거쳐 20세기의 공산주의 실험들(현실사회주의로 나타난)이 공공연한 실패로 입증된, ‘역사의 종말’이 이야기되던 바로 그 시기 우리 앞에 난데없이 도래한 이 책을 우리는 전지구화된 스펙터클―자본주의 질서가 경계영역까지 치닫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호모 사케르’ 연작을 포함한 일련의 저작들이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현대의 인간 삶/생명이 처한 주권의 아포리아적 상황을 규명하려는 비평이론서에 가깝다면, 『도래하는 공동체』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삶의 형태/형식을 존재론의 관점에서 정식화하는 책이다. 전자의 저서들에서 부정성/수동성의 형태로 암시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 내지는 새로운 삶의 형식이 오히려 출발이 되는 저서에서 긍정성/적극성의 형태로 명시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이후의 다른 저서에서 방사되던 사유의 물줄기에서 거슬러 올라 시원에서 다시 재사유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선善이 악의 포착에 다름 아니고, 진정성과 고유성이 비진정성과 비고유성 외에 어떤 다른 내용도 갖지 않는다”는 말이 암시하듯,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와 다른 공동성의 유토피아는 대칭의 자리에서 평행을 이루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도래하는’ 공동체는 ‘미래의’ 유토피아로 오해되어서도 안 된다. 혁명은 자본주의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유토피아는 세속화된 세계 밖에서부터 다가오는 어떤 공동체가 아니라 전적으로 세속적인 삶의 형식이며, 자본주의적 물신성의 극한인 ‘정적으로 거꾸로 뒤집힌 사회―스펙터클 시대에서 해방의 계기가 산출되는 비전이다.
마치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연상시키듯, 『도래하는 공동체』는 계시적인 섬광의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자유로운 인류의 행복 추구가 메시아적 방향과 반대로 나아가는 듯 보이지만, “자신의 길을 가는 어떤 힘이 반대로 향한 길에 있는 다른 힘을 촉진할 수 있는 것처럼 세속적인 것의 세속적 질서 역시 메시아적 왕국의 도래를 촉진할 수 있다.”(벤야민) “어떤 실체나 본질이 상정되지 않고 존재의 가능성 그 자체가 긍정되는 인간의 삶이 가능하게 되는 그곳”, “주권도 법도 그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삶”의 형상들이 잠언과 예언처럼 19개의 단편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 신비한 작은 책에서 새로운 공동성의 유토피아로 가는 입구에 다다르기를 바랄 뿐이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산문의prose’ 안개의 땅으로 이끌다
우리는 지금의 세계의 질서와는 다른 무엇인가―새로운 공동체와 삶의 형식―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상 끝까지 밀어붙인 이 디스토피아적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떤 최후의 공동체의 도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구원이 도래한다면 그것은 이 어둠의 밖에서인가 내부인가. 아니면 일체의 구분과 단절을 무화시키는 경계의 포착에서인가.
모든 책은 고유한 시간을 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여기 한국어로 선보이는 조르조 아감벤의 『도래하는 공동체La comunit? che viene』는 그 책의 고유한 시간성에 어긋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0년 이탈리아어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그의 초기 저작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스무 권 이상의 단행본을 내놓은 사상가가 여섯 번째로 발표한 작품으로서, 본격적인 정치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처음으로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래하는 공동체』는 아감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 준 ‘호모 사케르’ 연작들이 탄생하는 정치철학 시기의 출발 선상에 있는 책이라 불러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 작가의 책들이 쓰인 순서대로 번역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오히려 드문 일이라 하더라도, 『도래하는 공동체』가 이렇게 그 뒤에 발표된 책들보다 늦게 번역된 것은, 과장하자면 마치 『자본』이 번역되고 난 뒤 『공산당 선언』이 번역되는 상황과도 같은 어떤 뒤늦은 ‘도래’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뒤늦은 도래에 힘입어 번역 독자들은 뜻밖에도, 원문의 독자들과는 다른 시간성을 경험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아감벤의 유수의 한국어본(현재 번역된 아감벤의 저서들은 『유아기와 역사』를 제외하면 모두 『도래하는 공동체』 이후에 나온 책들이다)을 손에 쥐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감벤 정치철학의 원천으로 비약해볼 수 있는 어떤 카이로스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도래하는 공동체』는 많은 것을 약속하는 책이다. 그러나 그 약속을 실현하는 책은 아니다. 즉, 『도래하는 공동체』는 제목이 암시하듯, 어떤 ‘도래하는 공동체’를 모색하고 선언하고 예고하지만, 그 ‘도래하는 공동체’의 모색과 선언과 예고는 필연적으로 아감벤의 앞으로의, 즉 도래하는 저작들에게로 계속해서 전가된다. 이런 점에서 『도래하는 공동체』는 이후 전개될 아감벤의 정치적 프로그램의 ‘모색’이자 ‘선언’이자 ‘예고’로 읽힐 수 있다. 이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이 작은 책에는 그가 그 후 집필한 큼직큼직한 저작에서 상술되고 심화될 테마들, 예컨대 잠재성, 바틀비, 사케르, 예, 삶의 형태/형식, 세속화, 자유로운 사용, 스펙터클 등이 압축적이면서도 암시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의 다수의 저서에서 기다랗고 폭넓게 방사되는 사유의 물줄기들이 『도래하는 공동체』에는 어떤 파편적인 결정 상태로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도래하는 공동체』는 이론적 비판서라기보다는 정언적 선언에 가깝다. 『호모 사케르』, 『예외 상태』와 같은 저작들이 문헌학적이면서도 정치철학적인 비판 정신에서 현대의 인간 삶/생명이 처한 주권의 아포리아적 상황을 논한다면, 『도래하는 공동체』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삶의 형태/형식을 존재론의 관점에서 정식화한다. 그렇다면 전자의 저서들에서 부정성/수동성의 형태로 암시되었던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 내지는 새로운 삶의 형태/형식은 후자의 저서에서 긍정성/적극성의 형태로 명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도래하는 공동체』가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관심이 두드러지는 저서들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도래하는 공동체』는 20세기 공산주의 실험의 공공연한 실패를 목도하면서 1980년대 초 프랑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 코뮌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사유의 흐름에 합류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특이성(블랑쇼와 낭시에게는 타자)들이 동일성과 전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성을 이룰 수 있는지의 문제로 요약된다. 이러한 공동체 논의를 점화한 낭시에게 공동체가 어떤 공통된 실체를 토대로 기획될 수 있는 과제나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의 한계를 노출하는 무위의 움직임으로 열리는 것이라면, 아감벤이 이 책에서 직접 거론하기도 하는 블랑쇼의 ‘부정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라는 어떤 비움과 부재로 특징지어진다. 낭시와 블랑쇼가 ‘함께 있음’의 문제를 사유하기 위해서 바타유가 제시한 타인의 죽음에 대한 경험에서 출발하고 있다면, 아감벤에게 있어 그 문제는 ‘임의적 특이성’의 형상을 발굴해냄으로써 가닥이 잡힐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념적으로 쉽게 잡히지 않는, 아니 개념이나 실체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그 ‘임의적 특이성’의 형상들은 놀랍게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것은 바로 열아홉 편의 단상에서 매번 새롭게 등장한다. 바틀비의 “차라리 쓰지 않겠다”는 비잠재성의 잠재성에서, 축복과 저주 너머에 있는 고성소의 주민들과 로베르트 발저의 인물들에게서, 특수도 보편도 아닌 예라는 존재에서, 외부의 내부라는 한계의 장소에서, 공통성과 고유성, 잠재성과 행위가 상호 침투하는 ‘필체’에서, 조건 없는 대리가능성에 의해 형성되는 바달리야 공동체와 아죠에서, 종도 개체도 아닌 얼굴에서, 어떤 속성이나 본질을 상정하지 않고 존재 자신을 산출하는 생성 습성에서, 완전성에 잠재성을 덧붙이는 후광의 형상에서, 무명의 동명이의성을 구성하는 순수한 이름, 즉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에서, 아무런 정체성도 내세우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공통성을 시위하는 톈안먼 사건에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그렇게’로 존재하는 존재에서 ‘임의적 특이성’은 노정된다.
이러한 ‘임의적 특이성’이 불러내는 ‘도래하는 공동체’는 어떤 실체나 본질이 상정되지 않고 존재의 가능성 그 자체가 긍정되는 인간의 삶이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는 곳일 것이다. 아감벤은 이 책에서 어떤 정체성에도 귀속되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삶의 형태/형식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곧 존재의 윤리라는 그의 정치철학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저 습성이 우리를 엄습한다거나 우리를 정립하지 않고 우리를 산출할 때 그것은 윤리적이다. 자기 자신의 습성에서 산출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진정으로 가능한 유일한 행복이다.”(48쪽) 그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 역량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삶이다. 이러한 ‘행복한 삶’에 대한 아감벤의 생각은 이후에 주권 권력을 비판하는 맥락에서는 “주권도 법도 그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삶, 동물적 삶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구분이 무효화되는 삶에 대한 비전으로 이어진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연상케 하는 『도래하는 공동체』의 압축적이면서도 때로는 이미지적인 글쓰기는 단절적이면서도 계시적인 섬광의 논리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낯선 신학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벤야민과 유사하다. 그의 사상 전반에 깊숙이 깔려 있는 신학적 사유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아감벤이 독일의 문예지 「문학들Literaturen」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것이 가르쳐준다. 그는 벤야민이 『파사젠베르크』의 인식론 관련 메모에 남긴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책들은 전혀 신학적인 몸짓을 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신학과 대결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한 번은 이렇게 썼다. ‘내가 신학과 맺는 관계는 압지가 잉크와 맺는 관계와 같다.’ 종이는 잉크를 빨아들이고 종이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한 방울의 잉크도 남아있지 않다. 바로 이런 것이 내가 신학과 맺는 관계이다. 나는 신학을 흠뻑 빨아들였다. 그러면 더 이상 신학은 없을 것이다. 잉크가 모조리 날아가 버렸으니까.” 비판의 대상을 오히려 흡수·합체함으로써 그 대상을 극복하려는 이러한 사유 태도는 아감벤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런 점이 그가 주조하는 많은 개념들, 특히 ‘스펙터클’, ‘호모 사케르’, ‘소시민’, ‘종말’ 등과 같은 형상들이 애매성을 띠는 이유이며 또, 논쟁적인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이 아감벤 사유의 이러한 애매성을 해소해주기 보다는 심화해주고 논쟁에 부쳐주기를 바란다.
-이상은 「옮긴이의 말」에서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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