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포에지 41권. 최승자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시인이 골몰했던 정신의 세계, 타로 카드와 음양오행과 신비주의의 세계로 향했던 출발점이며 분수령이 된 것이 이 시집이다. 제목 <연인들>은 타로 카드에서 대비밀, 혹은 메이저 아르카나로 알려진 22장의 카드 중 6번 ‘Lovers’에서 따왔다.
나더러 안녕하냐고요?
그러엄, 안녕하죠.
내 하루의 밥상은
언젠가 당신이 했던 말 한마디로 진수성찬이 되고요,
내 한 해의 의상은
당신이 보내주는 한 번의 미소로 충분하고요,
전 지금 부엌에서 당근을 씻고 있거든요.
세계의 모든 당근들에 대해
시를 쓸까 말까 생각하는 중이에요.
우연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다시 한번 물어주시겠어요,
나더러 안녕하냐고?
그러엄, 안녕하죠.
똑딱똑딱 일사불란하게
세계의 모든 시계들이 함께 가고 있잖아요?
- ‘안부’, 최승자
누가 펼쳐놓았나.
아무것도 씌어져 있지 않은 이 빈 공책.
그 위에 깊은 눈이 내려 침묵조차,
침묵이 걸어간 발자국조차 지워져버린
이 태초의 빈 공책을.
아니 그것은 내가 지워버린 공책이다.
나는 내가 써왔던 텍스트를 모두 지워버렸다.
이제 나는 더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라고
그 위에다 나는 쓰지 않는다.
나는 다만 지워버렸고,
지워버렸다고 말할 뿐이다.
지워져버린 공책 위에 쌓인 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보고, 그리고 안다.
이제 그 위로 소리 없이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그리고 그 공책은 영원히 닫혀질 것임을.
- ‘빈 공책 - 한 추억을 위한 소묘’, 최승자
끝 모를 고요와 가벼움을 원하는
어떤 것이 내 안에 있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부풀어오르고,
다시 가라앉았다
부풀어오르는,
무게 없는 이것,
이름할 수 없이 환한 덩어리,
몸속의 몸, 빛의 몸.
몸속이 바닷속처럼 환해진다
- ‘연인들 3 - 몸속의 몸’, 최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