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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 바깥에 사는 사람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사람은
가장 바깥에 산다 그곳은 춥다

버스에 외투를 벗어두고 종점에서 내린 적이 있다
다른 나라 더운 도시의 공항이었다
맨발로 비행기에 올라 더 멀리 나는 갔었다

옆자리에는
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의 이어폰에서 찌걱찌걱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같은 이별을 경험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때 그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한 사람은
내가 벗어둔 외투를 챙겨 입고
혹독한 겨울로 무사히 들어갔을까?

버스 종점에서만큼은
커피 자판기가 달빛보다 더 환하면 좋겠다

동전을 넣고 손을 넣었을 때
산 짐승의 배 속에서 꺼낸 심장처럼
뜨끈한 것이 손에 잡히면 좋겠다

어떤 나라에서는 발이 시리지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목적 없이 버스를 탄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는 한없이 걸어야 한다

피로는 크나큰 피로로만이 해결할 수 있다
사랑이 특히 그러했다 그래서

바깥에 사는 사람은
갈 수 있는 한 더 먼 곳으로 가려 한다

# 걸리버
창문 모서리에
은빛 서리가 끼는 아침과
목련이 녹아 흐르는 따사로운 오후
사이를

도무지 묶이지 않는
너무 먼 차이를

맨 처음
일교차라 이름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빈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의 마음으로

커피를 따는 케냐 아가씨의 검은 손과
모닝커피를 내리는 나의 그림자
사이를

다다를 수 없는 너무 먼 대륙을 건넜던
아랍 상인의 검은 슬리퍼를
사랑한다

세계지도를 맨 처음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적어놓은 채로 죽은 어떤 시인의 문장과
오래 살아 이런 꼴을 겪는다는 늙은 아버지의 푸념
사이를

달리기 선수처럼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부친 편지가 돌아와
내 손에서 다시 읽히는
마음으로

출구없는 삶에
문을 그려 넣는 마음이었음을
도처의 소리 소문 없는 죽음들을

사랑한다

계절을 잃어버라 계절어 피는
느닷없는 꽃망울을 바라보는 마음을ㆍ

짧은 시로 올려본다. 너무도 좋은 시들이 긴 탓에ㅎ

#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 김상욱교수가 소개하면서 알게 된 시인 김소연. 바로 시집과 마음사전을 주문했다.
수록된 시들이 한결같이 마음으로 잔잔히 스며듬을 느낀다. 문득 떠오른 예전 친구와의 대화. 그림감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림을 봐도 도통 모르겠다고 친구에게 묻자, 친구 왈~ 나도 첨엔 작가의 의도가 뭘까, 제목이 말하고자 바는 뭘까 아리송했지만, 생각을 버리고 그림감상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느껴지더라, 그래서 작가의 도록도 사서 읽어보니 내 느낌이 마냥 틀리진 않았다면서~
수학자의 아침을 읽으면서 느꼈던 시인의 시어들이 왠지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 보다 보면 읽다 보면 자연스레 채워지는 게 있구나~
김소연시인의 시어들을 접해보길 바란다.
2021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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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녹록지 않음을 분별력 있게 가늠하지 않은 채로, 손쉽게 화해한 태도가 배어 나와 속임수와도 비슷한 뒷맛이 남는다. 사랑을 겪기보다는 사랑을 포장하려는, 그래서 환심을 쉽게 사려는 얇은 상술도 보인다. 따뜻한 문장으로 위로하기란 너무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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