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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홍희정 지음
문학동네 펴냄
넌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근본은 있지만 사랑만 받아서 기본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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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율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우울한 목뼈가 툭 불거져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위로도 조언도 아닌, 말도 다 할 수 없는 것을 전해야 할 때 서로의 목뼈를 누르곤 했다. 술에 취한 어느 밤, 3세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동아리 방의 낡고 더러운 소파에 기대앉아 장난처럼 시작한 그 행동은 어느새 둘만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쓰다듬듯, 감싸안듯 가만가만 손을 가져가 상대를 보든는 행위. 서로에게 분명한 충고나 조언을 직구로 던져야 할 때조차도 아둔한 그 행위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율이의 목뼈를 검지로 지그시 눌렀다. 율이는 순한 아이처럼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어른이 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타입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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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몇 살을 먹어도 좋은 법이야.
율이 때문에 애가 타던 나는 그때 속으로 오만한 생각을 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새파랗게 젊을 때 다 소모해버리고 싶다고, 노인이 되어서까지 그런 건 겪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노년이란 내면의 피부가 아주 두꺼워서 무슨 일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고 초연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생일대의 사랑 같은 건 젊은 시절에 모조리 다 겪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혈기왕성한 섹스를 젊은 시절 실컷 해버리고 몸속이 텅 빈, 어떤 감정에도 동요하지 않는 노인이 되겠다고 말이다. 아마도 그때 할머니가 내 생각을 알았다면 철모르는 소리라고 틀림없이 비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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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는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항상 갑자기 했다. 눈꼬리가 처진,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바람둥이처럼 보이는 웃음과 함께. 그런 율이를 보고 있으면 나는 허기가 졌다. 애정에 목말랐다. 걸신이 들린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하지만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율이는 나를 한순간에 들뜨게도 하고 한없이 무기력하게도 만들었다. 율이 앞에서 나는 그저 고분고분한 노예에 불과했다. 아니 거절당한 방문객이 된 기분이었다. 굳게 잠긴 문 앞에서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짖어대는 개가 된 느낌. 나는 율이의 싱글벙글하는 얼굴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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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빨지 않은 오래된 리바이스 청바지도 율이의 긴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보는 눈을 즐겁게 애무하는 존재다. 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단단히 홀렸군. 정말이지 속절없이 아름답다. 율이를 둘러싼 사소한 옷가지들조차 나를 황홀하게 만든다. 당장 율이와 몸을 꼭 붙이고 싶다. 열 손가락으로 율이의 몸 구석을 만지고 싶다. 얼굴과 목을, 어깨와 등, 허리를. 몸의 깊은 곳으로부터 콜타르처럼 끈적거리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다. 단지 율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의 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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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언젠간 나를 떠나겠지만. 하지만 내가 고백하지 않으면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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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기다려.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집안 곳곳을 걷다가, 시간이 지나면 발가락으로 걷다가, 발꿈치로 걷다가, 바닥에 닿지도 않는 발의 중심으로 걸어보려 하다가, 한참을 그러다가,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가서 수화기를 귀에 대보고, 아무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혹시 먼지가 많이 쌓여 고장이라도 난 걸까 싶어서, 베개의 한 귀퉁이를 찢어, 그것으로 수화기에 묻은 먼지를 닦다가, 이것만으로 안 되겠다 싶어 면봉에 세제를 묻혀서 꼼꼼히 닦다가, 말하는 곳 듣는 곳에 뚫린 구멍들도 하나하나 집요하게 닦아내다가, 문득 전화기에 달린 전선을 눈으로 쭉 따라가보고서야 플러그가 뽑혀 있다는 걸 깨닫고, 뽑힌 플러그를 이 분 정도 내려다보고는, 다시 침대로 가서, 귀퉁이가 찢어진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울고는, 다음날이면 또다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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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와 함께한 육 년간의 시간이 전생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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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다면 마구 주먹질을 해주고 싶다. 날카로운 것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싶다. 억눌렸던 감정의 반발심일까. 율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어느새 기묘한 감정으로 숙성되고 있었다. 율이에게 아픔을 주고 싶다. 놀라서 나를 돌아보게 하고 싶다.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게 구덩이를 파서 율이를 빠뜨리고 그 사실을 나 혼자서만 알고 싶다. 내 감정에 냄새가 있다면 아주 시큼한 냄새이로구나 것이다. 음흉하고 야비한 냄새. 세상이 무대라면 그리고 내가 배우라면, 신은 나를 무슨 역할로 캐스팅한 걸까. 짝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음흉하고 야비한 단역 정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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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가 저 얼굴에 반했다는 말이지. 그녀를 보며 나는 소름끼치는 외로움을 느꼈다. 마치 아랫도리가 다 젖은 채로 추위에 덜덜 떨며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이웃집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그 집으로 다가가기 위해 걸음을 옮길수록 물에 젖은 속옷이 다리에 척척 감기며 흘러내린다.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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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나는 율이에게 반쯤은 미쳐있다. 돈이 넘치게 많다면 율이에게 세상의 모든 문학전집을 사주고 금테를 두른 원고지와 블루사파이어가 박힌 최고급 몽블랑 만년필을 사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럴 돈도 없고 율이는 나에게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율이가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해준다. 율이의 여자친구가 함께한, 풀밭 위의 점심에 참석한 것도 다름아닌 율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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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다정하면서도 은밀한 태도에 나는 애정의 맨얼굴을 본 것 같아 명치가 조여왔다. 나긋나긋한 그녀의 손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율이의 여자친구를 보며 바짝바짝 애가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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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돌고래가 죽었을 때 그들이 대화하던 초음파의 세계는 사라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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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원하는 것을 자신의 공간에 단단히 붙잡아둘 수 있는 용기가 부럽네요.
칸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ㅡ 결국,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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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어깨가 참 멋져요.
그 말을 하고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ㅡ 별명이 많았죠. 떡대, 왕패드, 크레인, 아놀드.
ㅡ 아놀드?
의아한 표정을 짓다 칸트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ㅡ 아놀드 슈왈제네거.
ㅡ 딱히 근육질은 아닌 거 같은데요?
ㅡ 면박, 준 건가요.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찡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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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참으로 오랜만이었지.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편안하게 구덩이 얘기를 한 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렇게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감하고 오해하고 다시 화해를 하고 싶다고. 무엇보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좋았어. 초승달을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랄까. 구름이 스르르 비켜나면서 살며시 드러나듯 애틋하게 빛나는 미소 말이야. 그래서 얘기했지.
ㅡ 뭐라고요?
ㅡ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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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이레씨는 다음 세상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다음 세상 같은 거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ㅡ 엄마요.
ㅡ 그건 현생에서도 가능하지 않나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ㅡ 그 사람 엄마요.
ㅡ 좋아하는 사람?
ㅡ 네, 물고 빨고, 잘해줄 거예요.
한층 낮은 목소리로 칸트가 중얼거렸다.
ㅡ 어쩐지 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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