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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제18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홍희정 장편소설)의 표지 이미지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홍희정 지음
문학동네 펴냄

넌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근본은 있지만 사랑만 받아서 기본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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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율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우울한 목뼈가 툭 불거져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위로도 조언도 아닌, 말도 다 할 수 없는 것을 전해야 할 때 서로의 목뼈를 누르곤 했다. 술에 취한 어느 밤, 3세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동아리 방의 낡고 더러운 소파에 기대앉아 장난처럼 시작한 그 행동은 어느새 둘만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쓰다듬듯, 감싸안듯 가만가만 손을 가져가 상대를 보든는 행위. 서로에게 분명한 충고나 조언을 직구로 던져야 할 때조차도 아둔한 그 행위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율이의 목뼈를 검지로 지그시 눌렀다. 율이는 순한 아이처럼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어른이 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타입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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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몇 살을 먹어도 좋은 법이야.

율이 때문에 애가 타던 나는 그때 속으로 오만한 생각을 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새파랗게 젊을 때 다 소모해버리고 싶다고, 노인이 되어서까지 그런 건 겪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노년이란 내면의 피부가 아주 두꺼워서 무슨 일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고 초연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생일대의 사랑 같은 건 젊은 시절에 모조리 다 겪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혈기왕성한 섹스를 젊은 시절 실컷 해버리고 몸속이 텅 빈, 어떤 감정에도 동요하지 않는 노인이 되겠다고 말이다. 아마도 그때 할머니가 내 생각을 알았다면 철모르는 소리라고 틀림없이 비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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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는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항상 갑자기 했다. 눈꼬리가 처진,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바람둥이처럼 보이는 웃음과 함께. 그런 율이를 보고 있으면 나는 허기가 졌다. 애정에 목말랐다. 걸신이 들린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하지만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율이는 나를 한순간에 들뜨게도 하고 한없이 무기력하게도 만들었다. 율이 앞에서 나는 그저 고분고분한 노예에 불과했다. 아니 거절당한 방문객이 된 기분이었다. 굳게 잠긴 문 앞에서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짖어대는 개가 된 느낌. 나는 율이의 싱글벙글하는 얼굴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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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빨지 않은 오래된 리바이스 청바지도 율이의 긴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보는 눈을 즐겁게 애무하는 존재다. 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단단히 홀렸군. 정말이지 속절없이 아름답다. 율이를 둘러싼 사소한 옷가지들조차 나를 황홀하게 만든다. 당장 율이와 몸을 꼭 붙이고 싶다. 열 손가락으로 율이의 몸 구석을 만지고 싶다. 얼굴과 목을, 어깨와 등, 허리를. 몸의 깊은 곳으로부터 콜타르처럼 끈적거리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다. 단지 율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의 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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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언젠간 나를 떠나겠지만. 하지만 내가 고백하지 않으면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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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기다려.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집안 곳곳을 걷다가, 시간이 지나면 발가락으로 걷다가, 발꿈치로 걷다가, 바닥에 닿지도 않는 발의 중심으로 걸어보려 하다가, 한참을 그러다가,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가서 수화기를 귀에 대보고, 아무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혹시 먼지가 많이 쌓여 고장이라도 난 걸까 싶어서, 베개의 한 귀퉁이를 찢어, 그것으로 수화기에 묻은 먼지를 닦다가, 이것만으로 안 되겠다 싶어 면봉에 세제를 묻혀서 꼼꼼히 닦다가, 말하는 곳 듣는 곳에 뚫린 구멍들도 하나하나 집요하게 닦아내다가, 문득 전화기에 달린 전선을 눈으로 쭉 따라가보고서야 플러그가 뽑혀 있다는 걸 깨닫고, 뽑힌 플러그를 이 분 정도 내려다보고는, 다시 침대로 가서, 귀퉁이가 찢어진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울고는, 다음날이면 또다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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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와 함께한 육 년간의 시간이 전생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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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다면 마구 주먹질을 해주고 싶다. 날카로운 것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싶다. 억눌렸던 감정의 반발심일까. 율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어느새 기묘한 감정으로 숙성되고 있었다. 율이에게 아픔을 주고 싶다. 놀라서 나를 돌아보게 하고 싶다.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게 구덩이를 파서 율이를 빠뜨리고 그 사실을 나 혼자서만 알고 싶다. 내 감정에 냄새가 있다면 아주 시큼한 냄새이로구나 것이다. 음흉하고 야비한 냄새. 세상이 무대라면 그리고 내가 배우라면, 신은 나를 무슨 역할로 캐스팅한 걸까. 짝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음흉하고 야비한 단역 정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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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가 저 얼굴에 반했다는 말이지. 그녀를 보며 나는 소름끼치는 외로움을 느꼈다. 마치 아랫도리가 다 젖은 채로 추위에 덜덜 떨며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이웃집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그 집으로 다가가기 위해 걸음을 옮길수록 물에 젖은 속옷이 다리에 척척 감기며 흘러내린다.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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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나는 율이에게 반쯤은 미쳐있다. 돈이 넘치게 많다면 율이에게 세상의 모든 문학전집을 사주고 금테를 두른 원고지와 블루사파이어가 박힌 최고급 몽블랑 만년필을 사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럴 돈도 없고 율이는 나에게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율이가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해준다. 율이의 여자친구가 함께한, 풀밭 위의 점심에 참석한 것도 다름아닌 율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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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다정하면서도 은밀한 태도에 나는 애정의 맨얼굴을 본 것 같아 명치가 조여왔다. 나긋나긋한 그녀의 손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율이의 여자친구를 보며 바짝바짝 애가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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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돌고래가 죽었을 때 그들이 대화하던 초음파의 세계는 사라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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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원하는 것을 자신의 공간에 단단히 붙잡아둘 수 있는 용기가 부럽네요.
칸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ㅡ 결국,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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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어깨가 참 멋져요.
그 말을 하고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ㅡ 별명이 많았죠. 떡대, 왕패드, 크레인, 아놀드.
ㅡ 아놀드?
의아한 표정을 짓다 칸트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ㅡ 아놀드 슈왈제네거.
ㅡ 딱히 근육질은 아닌 거 같은데요?
ㅡ 면박, 준 건가요.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찡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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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참으로 오랜만이었지.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편안하게 구덩이 얘기를 한 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렇게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감하고 오해하고 다시 화해를 하고 싶다고. 무엇보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좋았어. 초승달을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랄까. 구름이 스르르 비켜나면서 살며시 드러나듯 애틋하게 빛나는 미소 말이야. 그래서 얘기했지.
ㅡ 뭐라고요?
ㅡ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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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이레씨는 다음 세상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다음 세상 같은 거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ㅡ 엄마요.
ㅡ 그건 현생에서도 가능하지 않나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ㅡ 그 사람 엄마요.
ㅡ 좋아하는 사람?
ㅡ 네, 물고 빨고, 잘해줄 거예요.
한층 낮은 목소리로 칸트가 중얼거렸다.
ㅡ 어쩐지 야하다.
2021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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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모들은 고래를 잡는 게 아니라 잡혀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착취당할 바엔 몸을 던지는 게 고래일까, 제 잔해가 세계를 돌며 전시될 줄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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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입수하는 공포를 극복한 경험을 따라 첫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사랑하는 아기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서로를 구하러 뛰리라는 확신이 떠올라 다음 잠수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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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홀로 남았을 때 누구도 와 주지 않는 세상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이번도 내가 가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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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면 왜 태어났는지……. 파도 소리만 그 말을 옮겼다. 지금은 세상이 아득했다. 어깻죽지와 목 뒤로 손을 넣자 해수의 체온이 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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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이유를 찾아야만 했는데, 그러다 보면 서로가 가장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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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은 그만큼 날카로워 사랑하는 이도 자주 찔렀다. 사랑하는 이의 기울어진 몸은 너무나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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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살아온 이 생물이 목소리를 가지면 무엇을 처음으로 말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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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돌아왔으니까…… 나는 그거면 돼.”
해수가 울면 은하도 울 수 있다. 공명하는 마음만이 은하를 삶으로 이끌었다. 해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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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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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들은 신의 환생 같아. 눈동자부터 숨, 지느러미, 몸통, 꼬리 전부 다. 그들이 배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노을을 등지고 수영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사는 부질없이 느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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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은하를 제외하고 굴러갔다. 문득 영혼을 햇살에 절여 빨랫줄에 걸고 싶었다. 보송보송한 심정을 덧입어야만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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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꽃도 불행을 알까, 뿌리내리고 살던 터전에서 파인 기분은 어떨까, 의문하며 화분을 돌보는 사이 꽃은 명을 다하고 까만 점을 오도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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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은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할까. 불행의 계절이 찾아오면 어떤 자세로 지나야 하나. 마음을 돌보는 일은 왜 이렇게나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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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본성은 이미 알았다. 우리에겐 개나리꽃 하나에 웃고, 진달래 끝에 맺힌 이슬에 울 수 있는 본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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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너머엔 낙원이 있다고 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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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지구를 완성하면 데리러 올게. 잊지 않고 널 데리러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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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외계에도 외로운 구석은 있다. 어떤 별은 지구의 푸르름을 천국이라 착각하며 끌려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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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의 뼈들이 별의 물질처럼 소란스러웠다.
그 착란의 일부를 훔치려는 마음으로, 은하는 차게 식은 해수에게 입 맞췄다. 입술이 닿은 곳은 목과 턱이 만나는 귓불 아래였다. 맥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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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로 귀환하면 더이상 쓸쓸한 별에 그 애를 홀로 두지 않으리라. 낙원을 일구고, 지구 바깥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음을 증명하리라. 언젠가 그날이 오면…… 해수도 행복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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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로-세슘의 비행 속에서 은하는 자신이 죽음을 이해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일부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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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마친 별의 격변이 인류의 노선을 이끌었다. 은하는 광대히 울려 퍼지는 별들의 관현악 사이로 날았다. 우주는 생각보다 훨씬 수다스러웠다. 인간이 모르던 시절에도 수많은 합성음을 냈다. 의식에서 잊힌 것들은 우주로 향하여 영원한 선율이 되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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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는 성장하며 바다에 더욱 매료되었고 그때마다 은하는 그 애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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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고칠 게 한두 군데가 아니야. 네가 곁에 있으면 좋겠는데.”
“때로 넌 나를 안타깝게 만들어. 잔인할 만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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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빨리 낙원을 완성해야 했다. 지구가 종말을 맞아도 우리에게 발 디딜 안식처가 있음을 해수에게 알리고 싶었다. 처절한 밑바닥을 보이지 않는 바다가 있음을, 본대부터 검은 물결에서 빛을 피우는 바다가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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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원의 죽음을 예습 삼아 새 장례 문화가 탄생했다. 인체의 성분과 하이드로-세슘, 바다, 그리고 압력이 만나면 고밀도의 거울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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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많은 인간일수록 선명한 거울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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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시체의 부패 과정과 달리 명경 물질로의 전이는 아름다웠다. 은하는 언젠가 거울이 될 자신의 육체와 삶을 생각했다. 제 존재는 죽음 후에도 반사경이 돼 타인들을 비출 예정이었다. 그날이 오면 후회 없는 삶이라 회고하며 감상에 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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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결정하는 일은 고달팠다. 미결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방해했다. 삶의 최종 장을 원하는 방식으로 닫는 건 위대한 권한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부족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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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곁으로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자 해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하늘을 본 것이겠지만 미래의 나는 과거의 해수와 눈을 마주쳤다고 착각했다. 폐부 깊이 해수가 지났던 시간들을 새기고 싶었다. 그 바람이 일으킨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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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가 곁에 있다면 저 구슬픈 노래의 뜻을 알려 주었을까? 음파가 우주를 흔들 때마다 해수에 대한 그리움이 심해진다.
……그 애에게 푸른 환영을 고백할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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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한 낙원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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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어, 얘기하고 싶어, 천 년이 흐르든 만 년이 흐르든 심장이 구하는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싶어.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우리에겐 얼마나 남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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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네 행복을 상상했어. 먼 별의 반짝임이 눈에 들어오면 그때만 사람의 마음이었어. 낙원에서 너만은 행복하길 기도했어. 그곳은 어떤 세계일까, 수많은 별들을 지나 도착한 땅은 아름다울까. 홀로그램으로 뒤덮인 육지가 보일 때 널 생각했어. 시간이 지날수록 너는 선명했어 되풀이하는 습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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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빛을 흡수하면 음파가 생겨. 귀를 기울이면 노래가 들리지. 있잖아, 은하야. 나도 전부 고백할게. 너도 솔직하게 말해 줄래?”
“그래.”
“내가 미운 적 많았지?”

“아직도 내가 밉니?”
“사랑해.”
“미워해도 돼.”

“해 줄 이야기가 정말 많아……. 아. 지구도 자살하길 원했다는 말을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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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간격으로부터 달이 태어났어.
폐허의 시간, 죽음 직전의 지구 속에서.
그를 닮은 위성이 탄생했어. 햇빛을 수용하며 유려하게 미끄러지더니 우주로 나아갔어. 등대처럼 빛을 띄워 우아한 왈츠를 청하듯 지구를 끌었지. 지구와 달의 첫 무도회를 상상해 봐. 달은 자신의 단면을 한 번에 하나씩만 보여 줄 수 있었어. 울퉁불퉁한 크레이터와 난도질한 자국, 비틀린 분화구들이 드러났어. 오해하기 쉬웠지. 달은 같은 상처를 가진 지구의 반영이었으니까. 그 위로 태양 광선이 기울어 난생 처음 보는 색으로 달이 빛나자 지구는 고백했어.
죽음 속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태어나는구나.
달은 반쪽짜리 얼굴로 미소지었어.
사랑이란 얄궂어. 부서지는 만큼 탄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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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물은 왜 바다 성분과 비슷할까? 잘 생각해 봐. 지구의 아이들이 바다에 이끌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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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선 누군가의 생이 막을 내릴 때 아름다운 물질을 찾아냈어.”
“그 얘기를 하는 널 보는 게 좋아.”
“나랑 같이 떠나자.”
고래의 눈동자가 바다와, 하늘과, 은하를 훑었다. 해수는 미소 짓더니 입을 다물었다. 원을 그리며 은하 주변을 헤엄쳤다.

-

해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낙원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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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고래들의 노래를 전수받고 지구를 일곱 바퀴쯤 돌았을 때야.”
“응.”
“네가 보고 싶었어.”
“그랬구나.”

-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너를 만나기 전, 나의 일부가 바다 속에서 죽었고.
너를 만난 후, 너의 아픔이 내 속에서 죽었고.
너를 보낸 후, 세상의 전부가 죽었으니까.
세 번의 죽음을 넘어
다시 지구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어떤 차원에 있더라도, 이 다음의 시간으로 너를 데려가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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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바다를 떠날 수 없다면…….”
해수는 일렁이는 반사경으로 변화하는 바다와 뒤엉킨 영혼들을 응시했다. 그들은 별의 움직임, 햇빛의 일그러짐, 바람의 궤적을 고스란히 지상으로 가져왔다. 하늘이 두 겹의 대칭을 이루며 천체를 반영했다. 구아슈 기법으로 푼 듯한 구름들이 지느러미를 편 고래 형상을 만들었다.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

불온한 파랑

정이담 지음
황금가지 펴냄

2021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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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고통이 주는 시각적 충격은 익숙해지기에는 너무 벅찬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에 더해 언젠가부터 옥지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또 다른 감정은 진성이 고통받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욕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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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 도망갈까?”
“그러면 게임은 망가질 거고, 데이터들이 폐기될 거야.”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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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유로운 시간 동안은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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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동진과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프로그래머들이 있었다. 자신이 만든 무언가가 제대로 기능하는 것에 기뻐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살펴 작동할 때까지 수정하는 사람들.
순수하게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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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데이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능력 때문에 진성과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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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튜토리얼을 막 끝마치고 내 방에 단둘이 있었을 때, 나 무언가 따뜻한 기분을 느꼈어.”
“그 기분이… 뭔데?”
“그건 아직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너를 볼 때마다 그 따뜻한 기분이 계속 느껴져. 너와 함께 있으면 점점 더 분명해지는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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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 빨리 분명해지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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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님의 총애>는 완벽한 서사를 가진 작품이에요. 그 서사를 망치는 것은 가당치 않아요. 애초에 옥지가 진성을 사랑한다니. 그게 말이 돼요?”
“가끔은 말이 안 되는 게 사랑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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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끝없는 밤이 다가와, 끝없는 잠을 자게 될지도 모르지.”

“그때, 그대와 함께 잠들면 무엇도 두렵지 않을 텐데.”
옥지의 말에 진성이 고개를 들었다.
“나 이 정도만 욕심부려 봐도 괜찮을까?”
진성은 즉답했다.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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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도… 결국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으신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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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할 수밖에 없는, 저 모니터 안의 두 사람이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의 힘을. 진성이 자신의 피로 바닥에 글씨를 썼을 때, 옥지가 진성을 살리기 위해서 플레이어의 총구 앞에 섰을 때 저 둘이 품었던 감정은 진짜라는 걸. 그리고 그 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도 진심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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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무언가를 사랑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달려들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도 역시나 자신이 아끼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무식한 일정을 소화하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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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했어. 정해진 대로 살았고 그 정해진 길마저 언제나 남을 위한 길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는 내가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 나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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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혜야, 엄마는 언제나 너랑 함께 있을 거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고 밤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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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의 눈 속에 어린 깊은 슬픔이 보여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칼리는 받아들일까? 인간을 대신해 내가 사과해도 좋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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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이토록 찬란한지 미처 몰랐던 때였다. 우리는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함께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앵지가 마지막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나의 로컬 브레인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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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영. 그 단어가 주는 절망적인 느낌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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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가장 확고했던 사랑의 대상이 어느 순간 대체되었는데 나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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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귀에서 이명이 시작되어 손바닥으로 귀를 덮었다. 영혼을 복사하기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에게 있어서 얄궂은 길이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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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더 나쁠 게 있나요?”
“실패의 양상은 언제나 다양하죠. 짧은 기간이나마 프로그램을 운영한 사람으로서 드리고 싶은 조언은… 산 사람을 죽이는 일과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기본적으로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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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희생과 자기 파괴적 투신을 구별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의 기회를, 되도록이면 명예로운 죽음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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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 그 단어가 좋았다. 서희는 처음으로 자신의 표정에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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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스물두 가지,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는 서른 개가 넘는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모두 훔친 것들이었고 돌려주는 법을 몰라 10년이 되도록 가지고 살았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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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로 표정을 수집하는 건 쓰레기를 주워다 전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체계가 필요했다. 서희는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된 그래프를 그렸다. 가로축의 한쪽 끝에는 기쁨, 반대쪽 끝에는 슬픔이 자리했다. 세로축 양쪽 끝에는 분노와 평온이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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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겉으로 고요했고 속으로는 펄펄 끓었다. 사람들은 온화하고 은근한 미소로 중무장 한 서희를 동경했다.

뉴 러브

표국청, 황모과, 안영선, 하승민, 박태훈 (지은이) 지음
안전가옥 펴냄

읽었어요
2021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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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밍망

@tkvl03mtan2q

해가 지면 조용한 술집에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공부했던 과정에 대해, 여태까지 작게나마 참여했던 전시와 거기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특히 생각지도 못한 관점으로 전시를 기획해 나를 놀라게 했던 선배 큐레이터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석이는 어릴 때 물인 줄 알고 잘못 먹은 부동액 때문에 위세척을 했던 일에 대해, 고등학교 때 스쿠터를 타다가 교통사고가 난 일에 대해, 군대에서 탱크와 벽 사이에 손이 껴서 손가락뼈가 세 개나 부서진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세 살 무렵 갑자기 생긴 천식에 대해, 부모님이 주말마다 데리고 다녔던 공기 좋은 여행지들에 대해, 뒤늦게나마 태어난 두 동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석이는 미학과에 가기 전에 조소과를 준비했던 기간에 대해, 큐레이터 일 이외의 다양한 아르바이트에서 겪었던 경험에 대해, 1년 전 독립해서 혼자 살기 시작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신기해.”
석이는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상관없는 궤적을 그리다가 우리가 이렇게 만나다니.”
나도 속으로 생각했다. 맞아, 이건 신비로운 일이야.
“이상하지? 처음 봤을 때부터 너랑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
석이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누구한테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한 적 없어.”
한참 대화에 빠져 있다가 조명이 어두워져서 주위를 둘러보면 가게 안은 텅 비고 석이와 나만 남아 있었다. 석이는 내가 사는 아파트 앞까지 함께 왔다가 다시 컴컴한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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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통증으로 감각한다면 좋아, 네 마음이 놓일 만큼 멀리 떨어질게.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고 뜨겁지 않지만 네가 그걸 상상하고 있잖아? 좋아. 석아, 난 다 좋다고. 위험이 내 발끝에서 시작된 희미한 그림자에도 닿지 못하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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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같이 있고 싶어.”
석이가 말했다.
“나도 그래.”
“너랑만 나누고 싶어. 너를 웃게 해 주고 싶어. 왜 너인지 모르겠지만, 왜 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나를 견디고 능가할 용기가 생기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 지금 나는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만으로도 즐겁고도 편안해.”
“나도야. 나도 그래, 석아.”
그러면 석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를 많이 안아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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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잠이 들어도 나는 이른 아침에 눈을 떴고 석이는 나보다 짧으면 한두 시간, 길면 대여섯 시간을 더 잤다. 나는 석이를 깨우지 않고 책을 들춰 보거나 가만히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냈다. 잠든 모습을 빤히 구경하다가 살살 만져 보아도 석이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럴 때면 닫힌 눈꺼풀 너머의 세계와 내 세계의 시차는 얼마나 벌어진 걸까 가늠해 보았다. 방은 이미 익숙하고 편안했지만 홀로 깨어나 찬찬히 바라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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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고,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체온마저 이렇게 다른데 한 물결 속에 섞여 있다는 게 놀라워. 또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거대한 물속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있겠지. 너이고 나인 이유가.”
석이는 아리송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앞에 펼쳐진 물을 바라봤다. 그대로 오래도록 말이 없다가 불현듯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랑 이곳에 와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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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빠의 하얀 피부가 부러웠어요. 부러워서 울면 오빠가 솓을 뻗어 내 볼을 살살 문질렀어요 ‘자, 봐. 내가 이렇게 만지면 네 얼굴이 하얘져.’ 나도 손을 뻗어 오빠의 뺨과 광대와 눈썹을, 둥글고 차가운 코와 폭이 좁은 턱을 어루만졌어요. ‘어때, 내 얼굴이 까매졌지?’ 하고 오빠가 물으면 나는 끄덕끄덕 그렇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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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가시광선을 보며 살아가지만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빛의 영역이 있단다. 우리는 평생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지만 보이지 않는 빛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빛이 우리 곁에 없는 것은 아니야. 때때로 우리 눈은 실수를 해서 아주 희박하게 다른 영역의 빛을 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명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어쩌면 영혼이나 유령을 보는 사람들은 좀 더 넓은 영역의 빛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단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와 분리되지 않은 채 순서도 정렬도 없이 동시에 생성되는 거라면? 정신 분열증이나 치매 환자가 제대로 우주를 보는지도 모를 일이지. 파동으로 봤다가 입자로 봤다가, 그 고양이가 죽었다고도 살았다고도 횡설수설하는 게 진실일 수도 있어.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더러운 이중 속마음과 겉치레 몸뚱이를 간파하고 있는지도 몰라. 고정된 관념을 정확히 보는 사람들, 혹은 보려는 것만 보는 정상인들이 사실은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란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은 그것의 전부가 아니야. 절대로 그것을 온전히 볼 수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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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고리를 돌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잠그는 것을 좋아해요. 문 뒤에 숨어서 아무도 내가 숨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안도감을 느껴요. 글을 쓰면 그런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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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드디어 운명적 사랑을 만났다고 믿는 눈치였지만 나는 사랑은 대체로 운명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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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내가 조금 더 자란 어느 날 문득 이 날을 떠올리게 되리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황이 하는 말을, 말을 하는 황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리라고. 그런 신비로운 순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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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까닭 없이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끊임없이 달라지고 물러지는 삶 속에서 그것은 감쪽같이 달고 부드럽게 넘어가곤 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일의 전조나 의미있는 전경이 될 순간을 순진한 얼굴로 지나가는 것은.

밤의 징조와 연인들

우다영 지음
민음사 펴냄

2021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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