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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송지현 소설집)의 표지 이미지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송지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022년 5월 19일 일기를 살펴보자.

"송지현의 책을 챙겼다.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다 읽고 싶어서. 물론 퇴근하고 집에 가서 차분히 읽어도 되지만 난 그저 이 책에 일상을 묻히고 싶었다. 송지현은 "현대의 소설"을 쓰는 작가니까. 마찬가지로 현대를 사는 '나'라는 사람의 일상에 이 책을 묻혀보고 싶었다. 서로가 뒤섞이도록.

송지현에 관해 좀 이야기해볼까. 흥미로운 작가다. 정말이지 "현대의 작가"다. 그가 천착하는 인물들은 뭐랄까··· 너 뭐 돼? 이 말은 요즘 유행이다. 나대는 사람에게, 너 뭐 돼? 대부분의 사람은 실제로 뭐가 안 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해서 뭐 되는 사람도 뭐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수르 장남 정도가 아니라면. 키득키득. 아, 우리는 남이 나보다는 뭐 안 된다고도 다들 생각하지. 그러니까 이 말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유행할 수밖에 없는 말인 것이다. 다시, 송지현의 인물들에게는 아무도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너 뭐 되냐고. 왜냐하면 그들이 뭐가 아무것도 안 되었고 안 되고 있고 안 될 거라는 사실이 모두에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

"생겨나는 것들은 무언가를 멸종시켰다. 하지만 무엇이 멸종되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다시는 들여다볼 수 없는 기억의 퇴적층에 묻혀 사라졌다." (「펑크록 스타일 빨대 디자인에 관한 연구」, 227쪽)

맨 마지막에 수록된 작가의 등단작은 위와 같은 문장들로 마무리된다. 스포라고? 아니다··· 내 생각에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작품은 바로 저 문장들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도 뭐가 안 되어서 아무도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송지현의 소설에 있으니까.

작품마다 배경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고, 오소리도 사람으로 등장하고, 좀비가 된 아버지도 등장하고, 어느 것은 현실적이면서도 어느 것은 환상적이고··· 이렇게 아홉 편 모두가 개성 넘치는데도, 읽다 보면 내 마음은 비슷한 방식으로 자꾸 아려··· "인생 자체가 시체 없는 사건 같"아서 "그냥 계속 졸"리고 "잠만"(198쪽) 온다는 오소리의 말을 들으면서. "아버지,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다른 괴물이야.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어." (108쪽) 좀비 아빠에게 딸이 건네는 말을 들으면서.

하나로 꽉 묶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집을 좋아하는데, 간만에 그런 책을 읽었다. 아홉 편을 따로 읽었을 때보다, 한 번에 한 권의 책으로 읽을 때 분명 뭔가 더 좋은 그런 책. 뿐만 아니다. 나는 송지현에 완전히··· 빠져버렸지. '송지현 월드'에 단단히 발이 묶인 것이다.

*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며칠 내내 송지현에 빠져 살았다. 전작주의 ON. 두 번째 소설집을 읽었고 너무··· 좋았고, 산문집을 읽었고 너무··· 너무··· 좋았다. 해서 33-35 감상은 특별히 송지현 특집으로 준비했다. 세 권 다 책에서 파란색 느낌이 나는 게 재밌다. 표지에도 파란색이 들어 있기도 하고. 아무튼··· 송지현 월드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2022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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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2023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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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2023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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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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