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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브래디 미카코 (지은이), 정수윤 (옮긴이) 지음
은행나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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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블룸은 감정적 엠퍼시와 인지적 엠퍼시의 차이를 논하며 둘 중 위험한 것은 감정적 엠퍼시라고 지적했다. 이는 1950년대 심리학자들이 주장한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것은 진짜 엠퍼시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맥이 닿는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을 상상하면 범인을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극단적인 목소리가 SNS에 떠돌고, 용의자를 호송하는 차량에 계란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도 냉정하게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이 되어본다면, 당사자들은 불행한 사건을 잊고 하루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자꾸 사건이 뉴스가 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해자에게 복수할 마음을 먹는 것은 자신의 상상과 분노를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겠다며 실은 자기 신발을 신고 타인의 영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꼴이다.

“무슨 말을 했든지, 생각을 언어로 꺼낸다는 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 나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지만, 누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줬기 때문에 그 애는 자기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사과했잖아. 그래서 나, 오후는 굉장히 기분 좋게 보냈어.”
언어는 사람을 불행하게도 분노하게도 만들지만, 동시에 화해시키고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 아이가 사과하지 않았더라면 아이의 마음에는 같은 반 친구에 대한 어두운 감정이 깃들었으리라. 딱딱하게 굳어가고 검고 불온한 무언가가 “미안해”라는 말 한 마디로 사르르 녹아버렸다.
“실은 나도 좀 반성했어. 그 애, 자폐증이 있거든. 그래서 솔직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 애가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던 거야. 그건 내 안에 있는 편견이었어.”
그 소년이 코로나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게 아시아인이라고 믿었다면, 아이는 아이대로 자폐증 소년에게 항의해봐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언어는 자기가 믿고 있던 것을 녹인다. 딱딱하게 굳은 것, 얼어버린 것, 불변이라고 여겼던 것을 녹여서, 바꾼다. 누군가의 신발을 신기 위해서는 자기 신발을 벗어야 하듯, 사람이 바뀔 때는 고리타분한 나를 녹일 필요가 있다. 언어에는 그것을 녹이는 힘이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이 가능한 사람들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걸어놓은 저주를 풀 필요가 있다. 타인이 만들어놓은 상자 속에 있으면서 타인이 멋대로 붙인 라는 라벨이나 같은 원료 목록을 붙이는 것을, 그러한 저주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분류한 상자의 원료 목록을 쉽게 믿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맛이 전혀 나지 않는데도 원료 목록 향신료 이름을 보고 “그러고 보니 분명 그런 맛이 난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원료 목록에는 두개골 두께, 유전자의 염색체, 여성 뇌 남성 뇌 등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역사적으로 차별이나 편견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언설에 이용되어 왔다.

더 나쁜 건 이 원료 목록이 과학적 증거가 되어 자주 상식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카무라 다카유키의 에서 ‘어떠한 사회의 상식은 다른 사회나 다른 시대에는 통용하지 않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고 썼다.
상자의 내용물을 설명하는 원료 목록이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이는 차별을 옹호하는 이들이 자기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쓴 것이다. 사카구치 안고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가엾고 나약한 존재이므로, 누군가를 배제하건 차별하건 정당한 근거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2022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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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에선 기세가 팔 할이야. 실령 승부에선 지더라도 기세에서 밀리면 안 돼. 차라리 감춰. 니 생가, 감정, 숨소리까지,,,, 그 어떤 것도 상대에게 드러내지 마."

"모든 것은 체력이다... 불쑥 손이 나가는 경솔함, 대충 타협하려는 안일함, 조급히 승부를 보려는 오만함... 모두 체력이 무너지며 나오는 패배의 수순이다. 실력도 집중력도, 심지어 정신력조차도 종국에 체력에서 나온다. 이기고 싶다면 마지막 한 수까지 버텨낼 체력부터 길러."

"그렇게 견디다가 이기는 거요. 쓰라린 상처에 진물이 나고, 딱지가 내려앉고, 새살이 돋고! 그렇게 참다 보면 한 번쯤은 기회가 오거든.... 조국수. 바둑판 위에선, 한 번 피하기 시작하면 갈 곳이 없습니다."

승부 각본집

윤종빈 외 1명 지음
스튜디오오드리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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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계속 살게 도와주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종교가 있으면 자살이 ‘그릇된 짓’이라는 생각이 윤리적 저지책 역할을 한다. 물론 죽음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미칠 영향이나 모방 자살 염려도 자살을 저지한다. 또 앞에서 봤듯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진화적 항상성(내부와 외부의 자극에도 형태와 생리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것 - 옮긴이)이라는 자기 보존 본능도 있다.
인지 붕괴에 빠지면 이런 장벽들이 하나씩 무너진다. 의미 있는 생각을 하는 사고력을 잃고,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만 몰두한다. 정상일 때는 고통의 숨은 의미를 찾는 생각이나 영적인 생각을 낳는 추상적인 사고를 한다. 그런데 자살 앞에서는 이런 사고가 놀랍도록 사라진다. 슈나이드먼은 "자살학에서 가장 위험한 어휘는 네 글자로 된 단어(욕설 fuck을 의미 - 옮긴이)뿐이다." 라고 말했다. 달리 말해 자살 의향자는 모아니면 도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에 젖는다. 상황이 흑백이 되었고, 은유적 미묘함 따윈 없이 오직 죽기 아니면 살기밖에 없다.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제시 베링 (지은이), 공경희 (옮긴이) 지음
더퀘스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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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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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게임'이라니,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인간은 믿으면 안 돼."
신발장에서 로퍼를 꺼내는 마토는 웬일로 저기압이었다. 5교시 수학 시간에 하시모토 선생님이 잡담을 하다 꺼낸 한마디가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 대학 입시에 취업 준비에 육아. 앞으로 많은 시험대가 너희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뭐든지 즐기지 않으면 손해야. 인생은 게임 같은 법이니까.
"마토는 그런 사고방식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어? 내가? 에이, 무슨 소리야, 고다. 오히려 그런 사고방식은 싫어하는 편이랄까."
"왜?"
"인생은 무를 수 없잖아."

지뢰 글리코

아오사키 유고 지음
리드비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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