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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장혜령 (지은이) 지음
문학동네 펴냄

초원장 여관의 정오
카운터 여자는 낮잠

얇은 벽 너머
한 사내가
구토하는 소리를 듣는 정오

느티나무 아래
벤치의 노인들이
말없이 한 방향을 바라보는 정오

양말 가게 남자가
수굿한 뒷모습으로
아들의 수학 문제에 열중하는 정오

우동집 앞
당신에게서 돌아서는 정오
돌아서 걷기 시작하는 정오

가는 비 내리고
손차양 한 사람들이
하나둘 처마 밑으로 모여드는 정오

신호대기 중인
버스기사가 창밖으로 내민
흰 손에서

날갯짓하는 작은 새의
심장소리를 듣는

거리의 나무에
빛이 무늬를 새겼다
사라지는

불시에
이별을 예감하는 정오

- ‘이별하는 정오’, 장혜령


그것은
물고기의 아가미 또는
지난밤에 깎은 사과 껍질

​안쪽에서 만져진다

​두꺼운 외투를 열어 보이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생각했다
겨울에도 철 지난 얇은 옷을 고집하는
가난하고 또 우아한, 어떤 취향에 관해

​그들이 오래된 만큼
내 생각도 오래도록 이어졌고

​빌려온 책을 읽을 때마다

​누군가 몸속에 잠깐 불을 켰다
여긴 누구였을까

​물결처럼 밀려왔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잠든다
떨어진 모과처럼 여기저기 뒹굴며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겨울, 청어와 모래, 작은 북과 캐스터네츠, 빗방울과 앵두와­••••••

​길을 잃을 때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것의 목록을 적는다

​실패가 거듭될 때,
매일 입술에서 닳아 없어지는
이름들처럼
걷잡을 수 없이 얇아질 때
그래서, 살고 있는 그것을 만질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
흔들리는 한
모두 같은 물속일 거야

​물결의 말이다

- ‘물결의 말’, 장혜령
2022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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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1 Corinthians 13


말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만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느꼈다.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p. 28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지음
열린책들 펴냄

읽고있어요
2023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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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이렇게 은밀한 일을 벌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갑자기 죽어 버리면 그런 비밀이 전부 까발려져 마치 살아있던 것 자체가 커다란 음모였던 양 보이게 되는 걸까. - ‘음모’ - p. 171

인내상자

미야베 미유키 지음
북스피어 펴냄

2023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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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소소한 논쟁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 - p. 71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약속과 의무라는 규약 너머의 행동이 필요하다. 이것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폭력과 파괴, 선택과 충돌이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극복할 수 있을까. - p. 115

…스크롤!

정지돈 (지은이) 지음
민음사 펴냄

2023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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