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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이어 공간과 도시를 사유하는 유현준 교수의 책이다. 이 책에는 전작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다 말하지 못한 건축과 도시에 비친 우리의 모습과, 건축가로서 실제로 우리를 둘러싼 공간들을 디자인하면서 알게 된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매 페이지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책이다. 인간과 건축과 공간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인문학적 시선을 가질 수 있구나 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총12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축물의 진정한 의미는 건축물이 사람과 맺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나와는 동떨어진 물질로만 건축물을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는 건축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같은 집이지만 사용자에 따라 다른 집이 된다. 건축물의 의미는 사용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배제하고 그 건축물을 이해하거나 평가하기는 어렵다. 사람과 건축은 불가분의 관계다. 건축과 사람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면서 의미를 규정한다.
1994년 놀라운 발견이 하나 있었다. '괴베클리 테페'라는 터키 남동부 샤늘르우르파 외렌직에 있는 신석기 시대 유적이다.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이 건축물은 기원전 1만~8천 년경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스톤헨지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6천 년 이상이나 앞서 지어졌다. 알타미라 동굴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기원전 3만 5천 년부터 기원전 1만 1천 년 사이의 구석기 시대다. 그러니 괴베클리 테페는 구석기 때 인류가 동굴에 살다가 동굴 밖에 나오면서 짓기 시작한 최초의 건축물이다.
기후와 연결해서 살펴보면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 지어진 것이다. 형태를 살펴보면 T 자형으로 생긴 돌기둥들이 가운데 서 있고 그 주변을 돌로 쌓아서 만든 벽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다. 고고학자들은 이 건축물이 집이 아니라 장례식을 치렀던 신전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돌 하나의 무게가 자그마치 15톤 정도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불을 사용하긴 했지만 바퀴는 없었고 짐을 운반할 가축도 없었다는 점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온전히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지어진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건축물이 기원전 7천 년경에 시작된 농업혁명 이전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도시 발생에 관한 기존의 정설은 수렵 채집의 시기가 지나고 농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한곳에 머물러 살게 되어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괴베클리 테페의 발견으로 이 순서가 뒤바뀌게 되었다. 괴베클리 테페는 농업혁명이 시작된 시점보다 수천년 먼저 지어졌다.
이 건축물을 지으려면 60~70명의 사람이 6개월에서 1년 동안 매달려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 건축물을 지으면서 한곳에서 생활하려면 지속적인 식량 공급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이 시작됐다는 가설이다. 농업으로 건축이 시작된 게 아니라, 건축을 하기 위해 농업을 시작한 것으로 시각이 바뀌었다.
괴베클리 테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아직도 우리 인류의 문명 형성 과정을 정확히 모른다. 지금껏 우리는 농사를 짓게 되면서 건축과 문명이 시작된 줄로 알았다. 농업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로 인해 우리는 그 당시 종교성이 우선이었고,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라는 자의식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교육하고 힘을 합치기 위해서 힘든 석조 건축을 시작하고, 그로 인해 농업혁명이 일어났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고 있다.
언제 또 어떤 유물이 발견되어 이 가설이 뒤집어질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건축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자신을 알아 갈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의 유적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건축을 관심 있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개천에서 용나기
한국에서 담장이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을 꼽자면 두 가지가 있다. 학교와 교도소다. 둘 다 담을 넘으면 큰일 난다. 학교와 교도소 둘 다 운동장 하나에 4~5층짜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창문 크기를 빼고는 공간 구성상의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 학교 건축은 교도소 혹은 연병장과 막사의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 12년 동안 생활한 아이들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교실로 구성된 대형 교사에서 12년 동안 키워지는 아이들을 보면 닭장 안에 갇혀 지내는 양계장 닭이 떠오른다. 남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실에서 자라난 사람은 똑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할 것이다.
학교의 전체주의적인 성향은 최근 들어 더 심화되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똑같은 교복을 입고 다닌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밥을 배급받아 먹는다.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밥을 배급받아 먹는 곳은 교도소와 군대와 학교밖에 없다. 학교는 점점 교도소와 비슷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군대는 2년이면 제대하지만 학교는 12년을 다녀야 한다. 공간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12년 동안 아이들을 수감 상태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꽃다발을 주기보다는 두부를 먹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양계장 같은 학교에서 12년 동안 커 온 아이들에게 졸업한 다음에 창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닭으로 키우고 독수리처럼 날라고 하는 격이다.
교실의 낮은 천장고도 문제다. 미네소타대 경영학과 조운 메이어스 - 레비 교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3미터 이상 높이의 천장이 있는 공간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나온다고 한다. 2.4미터, 2.7미터, 3미터의 천장이 있는 공간에서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3미터 천장고에서 시험을 친 학생이 낮은 천정고의 학생에 비해 창의적 문제를 2배나 더 많이 풀었다는 연구 결과다. 이처럼 높은 천장이 있는 공간은 창의력을 향상시킨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의 교실 높이는 교육부에서 지정한 2.6미터로 동일하다. 우리의 학교에는 3미터가 넘는 경사 지붕의 교실도 있어야 하고 둥그런 천장의 교실도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다양한 모양의 천장이 있는 교실에서 공부하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1인 가구가 사는 도시
아파트의 경우에도 10년 전에는 4인 가구가 주류였고, 중산층은 30평형대 아파트에 사는 것이 기준이었다. 이 경우 한 사람은 자신의 방과 더불어 거실 / 부엌 공간을 사용하게 된다. 일인당 약 20평가량의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1인 가구는 원룸에 살게 되면서 8평 이하의 공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인당 사용 공간이 3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과거에는 자기 방을 열고 나가면 거실이라는 공공의 공간에서 다른 사람, 즉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1인 가구는 여유 공간을 찾을 수 없는 원룸에 갇혀 살고, SNS를 이용해 사람을 만난다. 사용하는 공간보다 더 작은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살게 된 것이다.
부모와 살면 친구를 집에 초대할 수 없고, 원룸에 살면 공간이 작아 초대할 수가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디 편하게 앉아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한 끼 식사비 정도로 비싼 커피 값을 지불하고 카페에 앉아야 한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변화에 맞는 우리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 돈이 많은 사람만 갈 수 있는 공간들로 채워 갈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무료로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들이 다양하게 많아져야 한다.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의 부족은 청소년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중학생들은 왜 편의점을 찾는가? 요즘 학생들은 항시 감시를 받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생님과 학부모가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 만났다. 학교와 가정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자녀 세대의 자유와 독립이 가능했던 시절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학원에 5분만 늦어도 학부모에게 문자가 도착한다. 학원은 고객인 학부모들과 공조하여 전방위로 학생을 감시한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아이들은 공간적으로 부모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1990년대에 삐삐가 보급되면서 직장인들이 상사에게 더 시달리게 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핵가족 형태도 청소년에게는 불리한 구조다. 청소년에게는 감시에서 벗어난 사적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학생이 스타벅스에 가듯 10대들은 편의점에 간다. 천 원에 과자 한 봉지를 사면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편의점은 점원과 CCTV 덕분에 안전하다. 중학생들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자신들만의 안전한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바로 편의점이다. PC방도 이들의 용돈 내에서 빌릴 수 있는 공간이다. 1,500원가량이면 한 시간 동안 PC방을 전세 낼 수 있다. 학원과 집에서 그들만의 사적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은 PC방이나 편의점에 삼삼오오 모여 부모의 감시를 벗어난 자신들만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쇼핑몰에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는 이유
대형 쇼핑몰에는 변화하는 자연이 없다 보니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쇼핑몰은 몇 년에 한 번씩 대대적인 인테리어 리모델링을 한다. 그리고 더 잦은 변화를 위해 수시로 변화하는 콘텐츠인 멀티플렉스 극장을 도입한다. 계절이 바뀌는 대신 상영하는 영화를 바꿔 주는 것이다.
로마는 천 년 이상 지속됐는데 몽골제국은 150년 만에 망한 까닭은?
건축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몽골제국이 빨리 망한 것은 건축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제국이 정복지를 통치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집트는 피라미드, 로마는 콜로세움, 중국은 만리장성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했다. 그런데 몽골인은 유목 민족이다. 유목민은 목초지를 따라 계속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텐트에서 지냈고, 무거운 건물을 짓지 않았다. 반면 로마인들은 정복지마다 콜로세움 같은 원형경기장을 지었다. 그렇다면 무거운 건축물을 남기는 것이 왜 제국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까?
무거운 돌을 이용한 거석문화는 권력의 상징이다. 더 무거운 건축물일수록 더 큰 권력을 나타낸다. 영국의 스톤헨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도 모두 같은 이유에서 건축된 것이다. 만리장성의 총길이는 9천 킬로미터에 달하는데, 전체 만리장성에서 한 군데만 뚫리면 8,999킬로미터의 만리장성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럼에도 그 거대하고 긴 장성을 건축한 것은 실질적인 방어보다는 ‘안팎으로’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밖으로는 주변 민족을 위협하고, 안으로는 반란을 꿈꾸는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서 말이다.
책의 마무리에서 저자가 바라는 점은 이렇다. 앞으로는 시에서 공원을 만든다면 어디에 들어서는 것이 좋은지 우리들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건축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아파트가 재개발될 때 대형 상가가 들어오는 게 좋은지, 아니면 연도형 가게가 있는 거리를 만드는 게 좋은지 생각해 보고 주민 회의에서 의견을 내야 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 스스로가 자신이 살 곳을 더 화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도시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
힐링이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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