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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문학동네 펴냄

현대법을 인정하고 적용하지 않는, 오로지 ‘카눈canon'이라는 관습법만을 광적으로 믿고 실천해 나가는 알바니아의 산악지대. 이들은 피로 점철된 숙명적 복수와 폭력의 순환고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공인 그로즈그 역시 카눈의 원환 속 가해자이자 희생양이 되어 기원을 알 수 없는, ’애초에 증오심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느껴질 정도‘로 식어버린 복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그는 끊임없는 회의감을 가지면서 자신은 그저 관습법의 규칙을 따르는 한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음에 치욕감과 체념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랐을 때에, 그리고 따라야만 할 때 동반되는 타인들의 ‘관심’에 만족감을 느끼는 이중적 태도를 지닌다.

한편, 작가 베시안은 근대적 지식인의 시각으로 전근대적인 카눈을 찬양하며 자신의 부인 디안과 함께 이 곳으로 신혼여행을 온다. 카눈에 따라 ’반신‘적인 그들은 ‘화덕에 올려놓은 냄비의 뚜껑을 열지만 않으면’ 살인도 가능할 정도의 권력을 지닌다. 그러나 베시안과 달리 디안은 마을의 ‘피 관리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 ‘자신에게 늘 신성한 법’이었던 것을 무너뜨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는 피에 대한 납세와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그조르그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그로즈그 역시 죽음 앞에서 그녀와의 마주침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디안이 점점 카논의 규칙 아래 전염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베시안은 그가 디안에게 가지고 있던 지적 우월감의 패배를 맛보며, 그저 ‘피비린내나는 연극’을 관람하는 저속한 관중으로 전락한다. 한편, 그조르그는 다가오는 생의 마지막을 디안이 탄 마차를 찾아 나서는 길로 매듭짓는다.

근대적인 체계에서 보호받으며 전근대적인 것에서 그리스 비극의 요소를 발견해 나가며 죽음과 야만을 찬미하는 베시안은, 계몽의 대상인 자신의 부인의 영혼을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그조르그에게 빼앗긴다. 타자에 대한 소유와 관조, 그것은 기필코 패착이다.

#영화원작
2022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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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이나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은 자주 그렇듯이 객관적인 상황에 의해서 더 이상 그 실체를 유지하지 못할 때 비로소 자신의 악마적인 성격을, 자신의 진정으로 파괴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지요.” (13쪽)

이 책은 1967년, 아도르노가 파시즘의 잔재인 극우주의, 그리고 그에 동반된 프로파간다 현상에 대해 분석한 강의의 녹음본과 강연 준비 원고를 복원한 것이다.
그는 극우주의와 파시즘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짜임새 있는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탄탄한 사상적 토대보다는 ‘무조건적인 지배‘와 ’무조건적인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극우주의 운동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정교한 프로파간다의 전파와 확립을 통해 규모를 키우고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러한 ‘비합리적 목적과 합리적 수단의 결탁’은 수단이 목적을 점점 대체해 나가고, 이는 곧 프로파간다가 곧 목적 그 자체, 정치적인 실천, ’사태의 본질‘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도르노는 프로파간다의 트릭으로 1. 구체주의 (’숫자’를 바탕으로 한 통계적 수치의 선택적 활용 및 오용), 2. 형식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공적 목표를 가진 것처럼 꾸밈), 3. 실용주의 (이념의 내용보다는 이념이 ‘있음’을 중시하는, ‘사람이 그래도 생각은 있어야지’라는 태도) 를 제시한다. 이러한 속임수들은 정신적 기반이 부재한 (사상 아닌) 사상들을 전파하고, 그에 반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유용하게 사용된다. 결국 이렇게 분별력이 없어지고 정동이 지배한 사회에서는, 폴 발레리의 말처럼, ”누군가가 자신보다 영리하면 그는 그렇게 궤변가가 된다.“(34쪽)

아도르노는 당시의 상황에서 극우주의가 독일을 지배하는 경우 다른 국가들에게 외면받고 뒤처지면서 정치의 입지가 줄어들 것을 경고하고, 이러한 상태가 ‘분노’라는 폭력적 정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이 10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는 전세계적인 극단주의의 열풍•국제기구의 무능•국제협약에서의 탈퇴 및 기만적인 위반•끊임없는 무력 전쟁의 진행과 발발 위기 속에 놓여 있다. 게다가 미디어라는 더욱 강력한 ‘합리적 수단’이 등장하면서, 단순하고 짧은 음모론들이 진실처럼 전파되며, 이를 경고하는 사람들은 ‘진지충’으로 전락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 우울한 사회철학가의 50여 년 전의 경고를 보며 무엇을 떠올려야 할까.
‘파시즘 운동’은 ‘스스로의 개념에 오늘까지도 여전히 제대로 부합하지 못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상처이자 흉터’이다. (18쪽)

#얇은책

신극우주의의 양상

테오도어 W. 아도르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022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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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1세계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흐름의 공식 담론에서 배제된 국가가 ’생존 전략‘으로 채택한 마약 카르텔•납치 사업 등의 지하 경제를 폭력과 결부하여 설명해 나간다. 고도로 개인주의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소외된 남성들은 고전적 남성성 상실의 위협에 대한 공포에 대한 하나의 응답처럽 폭력을 받아들이고, 미디어의 미화되고 스펙터클화된 고도로 선정적인 폭력의 이미지는 신체•생명을 소비가 가능한 상품으로 탈바꿈한다. 동시에 폭력에 대한 열광은 범죄를 하나의 대중문화로 만들면서 소속감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도록 하면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극단적인 방식을 채택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헤게모니적이고 원초적인 남성성에 복종하는 것은 타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까지 파괴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무기•약물•액션•죽음에 대한 광기와 숭배는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세계를 형성한다.

한국은 더이상 마약 청정국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극심한 국제 사회의 변동과 갈등 속에서 언제까지고 (나름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전세계의 경제적•안보적 불안 속에서 유명인 뿐만 아니라 미성년자까지 약물에 가까워진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나, 마약이 역사적으로 전쟁과 노동력 착취에 십분 활용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변형된 형태의 고어 자본주의가 우리나라를 지배하여 피로 물든 끔찍한 생명정치 이데올로기를 형성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SNS와 암호화된 메신저 등을 통해 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약물의 판매가 이루어지며, 인터넷 기사창을 한창 도배했던 ‘대리구매’는 약물과 성매매의 연결고리를 잘 보여준다. 금기에 대한 위반은 약물•성•폭력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본능이다.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좌절감을 너무도 쉽게 공격성으로 표출하게 될 것이고, 이런 광폭함의 결과들은 인류를 점멸의 길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ㅎㄷㄷ

고어 자본주의

사야크 발렌시아 (지은이), 최이슬기 (옮긴이) 지음
워크룸프레스(Workroom) 펴냄

2022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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