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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렘 입숨의 책 (구병모 미니픽션)의 표지 이미지

로렘 입숨의 책

구병모 지음
안온북스 펴냄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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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람에게는 그런 분 세상에 없다고 칭송받지만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의 삶을 착취하지. 일관성 있게 선한 사람이라면 성직자와 갓 태어난 아기 정도 아닐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 조금씩이라도 더럽고 악한 인간이며 나노 시드라는 거름망에 걸러지지 않는 사소한 악행 따위는 없다는 진실을 시민들에게 공개할 수 없었으므로, 명목을 확실히 밝히지 않은 채 별도의 예산의 집행하여 사악한 꽃들을 모두 뽑아내고 태운 다음 원래 자리에 선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사다 심었다.
화장의 도시_ 화장(꽃의 장례)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동음이의어를 활용해 본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위트 있는 설정과 서사의 전개가 초단편소설이라는 형식에 불구하고 읽으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냉소적이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서사에 공감한다. 인간은 납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쓴웃음을 지으며 일깨운다.
꽃의 장례라는 주제로 죽은 이의 선함으로 선한 꽃이 핀다는 작가적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
신에게 무언가를 질문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고 때론 원망하는 것은 천상에서는 모독이자 불온함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렇다고 하여 적절하고 무게 있는 예의를 갖추지 않음이 곧 신에 대한 경애가 없음을 말하지는 않았다.
신인의 유배

처음에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의 차용인가 싶었는데,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나스카 지상화의 이야기라는 걸 찾아보고 알았다. 페루에 있다던 세계 불가사의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이 지상화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으로 전개된 이야기가 '신화'를 완성해 내는 또 다른 고전의 다른 해석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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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만 생각할 때는 소박한 꿈들이었으나 그 가운데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로 젊은 날의 끝자락에 매달리고 보니 얼마나 원대한 꿈이었는지를 알게 됐는데, 이렇게 발설함으로써 몸 밖으로 찌꺼기처럼 배출해버리자 또다시 그 무게와 가치가 한없이 가벼워졌다.
영 원의 꿈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꿈을 잃어가는지, 현재에서 꿈을 꾸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매몽이라는 상황에서 마지막에는 꿈의 값이 없다는 매몽가의 말과 꿈을 파는 나의 이야기인 이 단편 역시 씁쓸한 웃음만이 나온다. 경제적 자유를 이루지 못한 개인의 삶은 단지 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며 사회적 문제인지 꼼꼼히 되새기게 한다. 덧붙여 부모가 된 입장에서 내 아이가, 자녀가 경제적 독립을 해 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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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작가가 제각각 싸지르거나 게워낸 모든 글은 로렘 입숨의 무한 변주 반복에 불과할지도 몰랐고, 글을 쓰면 쓸수록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 아무거나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어졌으며,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비로소 그 무엇도 쓰지 않음-세상에 어떤 글도 존재하지 않음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궁극의 글쓰기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정적보다 완벽한 음악이 없듯이, 점 하나 찍지 않은 흰 도화지가 그림을 압도하듯이, 태어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삶이듯이.
동사를 가진 권리

작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면서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난 단편으로 읽었다. 쓴다는 것에 대한 의식과 '동사'에 대한 권리는 모든 쓰는 사람, 혹은 쓰고자 하는 사람을 주목하게 만드는 품사이다. 이 단편집의 제목인 로렘입숨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로렘입숨이라는 무의미한 더미 텍스트조차도 완전한 무의미는 아니라는걸, 무의미한 글이라는 해설에도 최초의 로렘입숨의 뜻을 소개하는 글조차도 의미성을 갖는다는 작가들의 의식을 읽는다.


날아라, 오딘
개를 훈련시켜 전쟁에 투입하는 동물 훈련 교관인 '나'는 오딘이라는 자신의 개를 전쟁에 투입하게 되면서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날 전쟁 투입되는 소년병에 대한 은유로 읽었는데, 작가의 글에서는 전쟁터에서 이용된 동물들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는 글에서 인간만이 전쟁의 당사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전쟁이란 결국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의 멸망을 향한 어리석고 참혹한 행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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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줘! 이건 억울하다고, 90초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 90초는 한 사람의, 한 팀의 역량을 판단하기에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라고. 한 곡의 노래로 쳐도 아직 클라이맥스조차 나오지 않을 시간이라고! 너희가 우리의 무엇을 안다는 거야. 어떻게 역량을 평가한다는 거냐고. 무슨 자격을 가지고!
아름다움과 기분 좋음에 대한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이들이, 무엇을 도구 삼아 타인의 기량과 예술성을 판단한다는 말인가. 나에게는 열렬한 흠모의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헌신짝 이하에 불과해 반대로 나에게 사악하거나 역겨운 것이 타인에게는 극상의 감미일텐데 말일세. 그러나 잊지 말도록 하게. 타인의 역량을 함부로 평가하고 난도질하여 누군가를 떨어뜨리고 누군가를 위로 올려주는 무대에 뛰어들기로 선택한 것은 본인들이라는 사실을.
예술은 닫힌 문

90초 만에 당락을 결정하는 이야기는 요즘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이라는 생각과 예술이라는 분야를 평가한다는 게 가능한 것인지 또한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특성과 그 시스템의 양날의 검과 같은 대중들의 심리가, 특히나 대중예술이라는 분야의 속성과 제작자와 미디어의 위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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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복수가 횡행하고 법률이나 도리 또한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만신창이가 된 오늘날, 합의에 의해 링 안팎에서 벌어질 수 있는 광기를 제어하고 유사시의 충돌과 유혈을 막을 수 있는 마지노선 같은 역할을 하면서, 그 자신도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지.

그럼에도 주체할 길 없는 분노를 연료로 삶아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상대를 저승길에 동행 삼겠다는 결심과 함께 모든 물질과 지위와 관계를 망설임 없이 던져버리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존재하고,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고 돕는 입회인으로 지금껏 후회 없이 살아왔다.
입회인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미래 사회라는 설정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미디어에서 많이 등장하는 사적 복수라는 주제가 그만큼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는 인식이 크다는 전제가 느껴진다. 무전유죄라는 관용구 표현이 여전히 유용한 사회라는 건, 인간들의 사회는 분쟁이 늘 존재하고 그런 분쟁의 조정과 조율의 필요성에 의해 법이 발생하였지만 그 법의 공정성이 신뢰받지 못한 현상들이 보인다. 그런 까닭에 사적 복수라는 방법에 입회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아빠로 지칭하는 입회인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은 여운이 짙다.



궁서와 하멜른의 남자
이 이야기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의 전개가 연상되었다. '쥐가 있네요?'라는 대사 다음 사건에 대한 복선이자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쥐의 등장으로 다음에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긴장감의 고조라고 할까. 잘 알려진 아동 소설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작가 자신이 경험과 지금의 아파트 거주의 주거문화와 엮어낸 이야기가 흥미롭게 읽게 했다. 쥐라는 존재를 아파트 주거 문화 속에서는 보기 드물지만 마주치는 그 순간 경악스럽다. 공포와 병균의 라이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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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어른이 되면 두 팔을 벌리고 선 나무가 될지도 몰랐다. 깜박 졸던 신의 실수로 식물의 유전자를 가진 무언가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처럼. 두 팔로 나무 그늘을 만들어주고, 머잖아 그것이 하늘까지 뻗어 올라갈지도.
중요한 것은 그 팔의 길이와 쓰임새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가는지에 달려 있을 거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롱슬리브

학창 시절 팔이 유독 긴 친구에 대한 이야기로 우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선한 마음의 가닿음이 느껴졌다. 놀림의 존재나 기이한 존재로 취급될 친구가 걱정되었지만 그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후일 긴팔 옷을 만드는 옷가게 주인이 된 화자의 말들은 서툴지만 선한 마음의 본바탕이, 멀리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응원하는 마음, 그 마음이 전이되어서 나 또한 있었을 롱 슬리브 한 친구를 생각해 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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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지우면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간다는 의미의 이동 또한 지워지며, 어떤 행위도 발생하지 않고 사람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조차 불가능한, 총체적 멈춤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공격성이 사라지면 약탈과 편취도 사라지며, 타인에 대해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인간의 지능이 제로에 수렴되고, 자신의 존속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도 제거된다.
그리하여 원은 공격이라는 말이 반드시 상대를 때리고 찌르는 게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인 무언가를 취하는 행위도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된다.
어째서 언어는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언어가 지시하는 사물이나 사태 또한 마찬가지로 연결되어 있는가. 어째서 하나를 없애면 다른 것이, 또 그와 비슷하거나 연관된 다른 것이, 다른 것과 이어진 다른 것이, 연쇄 다발로 소멸하는가, 결국은 모든 것이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
세상에 태어난 말들

신의 사전을 훔친 원이 하나씩 지워가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들이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게 하는 연속되는 말들의 연결 고리로 이해했다. 작가의 말의 '뜻밖의 조우'가 문학을, 소설을 읽는 의미의 경험이란 걸 굉장히 사유적인 문장으로 말해준다.


누더기 얼굴
혐오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투명 얼굴이 투명 인간으로 그리고 제목처럼 누더기 얼굴이 되어가면서 게토화 시키고 선을 넣지 않는 한 안전할 것이라는 말들은 인종에 대한 성소수자에 대한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격리, 우리와 그들이라는 타자화 시키는 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주었다.


지당하고도 그럴듯한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소재를 가지고 전개한 이 단편은 작가의 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과 일반적 혹은 상식적이라는 고정 관념의 틀을 모든 이들이 갖고 있다. 이 단편에서 각주로 붙은 인물과 영화의 각주들을 읽으면서 고정관념의 무의식적 받아들임의 잘못을 본다. 스테레오 타입으로 인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훨씬 다층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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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미래를 엿보았다고 해서, 그곳에 편재한 추위와 절망과...... 총체적인 지옥을 목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바꾸기 위해 자신을 반성하거나 현재를 조율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요. 원인을 알아냈다고 하여 인간들이, 두 손아귀에 단단히 붙든 핸들을 다른 쪽으로 꺾거나,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는 않는다는 것을요. 자기가 달려가는 종착지에 멸망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두가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고 모른 척한다는 것을요.
시간의 벽감

미래 시대의 재앙을 알고도 선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지구 환경의 위기에 다다라 있으면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인간은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2023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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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아이의 방학 숙제 책 중 하나였다. 여전히 독서록 쓰기를 몹시도 귀찮아하지만, 엄마도 읽고 같이 반응해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으로 읽고 아이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읽어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관계’라는 점에 생각이 맴돌았다. 코로나19를 거쳐왔기에 그런 까닭일까! 유독 ‘관계’라는 키워드가 많이 들어온다. 점점 살면서 타인과 또 나 자신과의 관계에 생각이 많아지고 변한다.

소설의 화자 류담은 타인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부모님의 교통사고 이후로 얻게 된다. 원하지 않는 능력을 얻고, 그 능력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열었던 친구의 ‘죽음의 디데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디데이의 초록색 링 숫자대로 죽는다. 이 사건 이후로 담은 자발적 아싸가 된다. 관계를 맺는 이의 '죽음의 디데이'가 보이게 된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타인과 다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초, 중교 시절을 지나 고등생이 된 담에게 같은 반 반장 소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선다. 학교에서도 이미 자발적 아싸로 인식되는 담에게 미소는 반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같은 조별 과제를 하게 되면서 담의 일상에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담과 같은 능력을, 같은 불행의 대가로 얻게 된 털보 아저씨 상두를 만나면서 담의 삶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털보 아저씨 상두가 불행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능력으로 무당 같은 업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의 단축된 수명을 바꾸는 방법을 알게 되고 도우면서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담과의 만남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를 속을 헤쳐 나가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설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같이 읽는 이들에겐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물꼬가 된다. 타인을 위해서 얼마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희생할 수 있는 이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일 때 가능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들.

이야기의 흐름이나 각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연결되고 교차되는 구조들이 이야기 속으로 계속 빠져들게 한다. 복선과 암시가 있어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지도 가늠이 되긴 했다. 유일한 어른으로 나오는 인물 털보 아저씨 상두는 담과 ‘친구’가 되어서 혈연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조력자 혹은 동반자로서, 어른에 대한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고 필요한 현실적 모습으로 등장해서 좋았다.

담이 미소와의 관계가 변화되는 일련의 일들은 작은 인연의 조각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듯, 관계의 그림 또는 깊이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서 새삼 대면의 세계가 갖는 힘을 새삼 느낀다.

담이 미소와 우정에서 설레는 첫사랑의 관계로, 그리고 목숨을 나누어주고 싶은 존재로 변화되는 관계의 변화는 담 역시 엄마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라는 걸 깨닫고 그 덤의 삶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게 나누려 한다는 흐름이 인간의 성선설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담을 싫어하던 친구와의 오해 혹은 묶은 감정들이 해소되는 사건 역시 타인의 선의 혹은 본능적인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깨닫게 되는 담과의 대척점에 있던 소현의 변화도 그런 부분에서 이해가 된다. 담과 소현이 처음 맺는 관계에서 오는 서투름과 오해가 싫은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과 해소의 과정 모두 이 소설의 주제라고 느꼈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해준다.

청소년 소설다운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 혹은 성장과 화해,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열린 결말.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이르는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 변화하는 담의 모습이 아픈 모습만 있지 않기에 엄마 마음에는 안도했다.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게 완결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천진난만하지도 하고 그렇다고 상처에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체된 상태로 끝나지 않기에, 성장과 고난 또는 고통은 한묶음처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너에게 남은 시간 죽음의 디데이

이혜린 지음
풀빛 펴냄

읽었어요
2024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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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부제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이 제목의 역설과 잘 어울렸다. 흥미롭게 읽었다.
건축가인 두 사람이 나뉘어서 ‘집’에 관한 개인적 시선에서부터 인문사회적인 사유로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일견 30대들의 전월세의 이사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계속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소유하게 될 집에 대한 의미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는 이윤석이 에필로그는 김정민이 썼는데, 도입부의 글과 마무리의 글이 책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여는 맛과 마무리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1장 솔직하게 만들어가는 집
'여지의 여지 '편에서 공간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스며들듯 수긍하게 된다.
넓은 평수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공간의 여지가 그곳에서 사는 이의 생각과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영향으로 더 긍정적이고 더 창의적으로 사고가 넓어질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에 대한 논의들을 읽다 보면 자본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 해석한 공간의 ‘최소성’은 생활하는 이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다. 간혹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이 제품을 디자인 한 이는 이런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나 동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실제 사용하는 경험치가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불편하거나 참신해지는 상반되는 경우 모두 다.

17쪽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삶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 시대라는 도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삶은 과정일 뿐이라 여기고, 과정이 된 삶들은 아무렇게나 최소로 방치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념이 다시 정의되고 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양은 서서히 청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고 있다. 박제된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정붙이고 녹붙이고'편의 에피소드도 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공간과 물건에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의 역사를 쌓아가는 모습들이 새삼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취향’에 대한 김정민의 생각은 취향조차도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어 평가하려 하지만, 자기의 솔직함과 생활감이 있는 인테리어가 더 좋은 취향의 인테리어라는 문장에서는 30대의 젊은 건축가의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엿본다.
두 저자는 고양이를 기른다는 점과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집과 방에 대한 생각과 지금까지의 전월세 이사 여정기를 말하고 있다. 책 집필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지인들과 관련인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집들을 탐방하면서 느끼고 접한 생각들도 실려 있다.

자신의 집이 싫다고 하면서 가는 내내 왜 ‘내 집이 싫은지’를 말하는 이를 통해서 집을 긍정하려고만 했던 이유를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 젖어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또 마주친 것은 자본주의는 소비주의이고 소비가 나를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에 살기에, 나의 소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나쁘다는 또는 별 볼일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문장에 새삼 환기하면서 동의하게 된다.

2장 셋방일지
아파트의 창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인해 계층과 사회적 구분을 읽게 된다. 동일한 크기와 효율성으로 정착한 아파트 창호의 크기의 반대편에 빌라라는 집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용의 풍경을 던져준다.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막고 보완해야 하는 빌라들. 이런 논의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읽어내고 말하고 기록하면서 건축가로서 어떤 반영과 개선을 할지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뷰’에 관한 논의에서도 자연을 담는 뷰, 경관도 특정 계층이 소유하게 되는 것의 불평등 지적한다. 녹지공간인 공원이나, 경관을 더 많은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시, 주거지 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공유하는 자연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집이라고 불리는 많은 집들이 매트리스만으로 인식되는 저자의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을 제시하면서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최소의 집에서는 수면과 화장실 사용만이 가능하며 나머지 다른 것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은 축소 또는 축약된 채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점들을 지적한다. 빨래방과 스타벅스의 방문이 일상이 되는 젊은 층의 생활 문화도 이런 주거 형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빨래를 널고 차를 마시고 화분을 키운 베란다의 공간을 갖기 힘든 구조의 주거 형태들이 가져온 공유 공간의 외주화를 만들었다.
‘안행복주택’편지글에서는 정책 입안자의 태도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키워드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책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운용과 실용이 필요한 지점을 집는다.

3장 일상의 발명가들
식탁테리어라는 말은 아마도 저자가 만든 단어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혼자 살면서 시작된 식탁인테리어로 식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바뀌거나 모으고,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2장에서 언급되었던 주방 공간의 축약과 축소가 요리라는 행위를 멀게 하고 간단하게 데워먹는 간편식의 식생활을 유도한다. ‘감히, 요리를 해먹어.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라는 거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요리는 개인 취향이다. 선호 여부에 따라서 즐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주거의 구조는 사유의, 사고의 폭도 움츠러들게 한다.
반려동물을 기르기도 하고 실제로 기르는 이들의 집을 탐방한 경험은 건축가로서 집을 설계할 때, 기존의 인간만을 기본으로 한 설계에서 한 걸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현성의 싱크로율은 아직 낮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현장성이 넓어질 때 주거에 대한 집에 대한 의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4장 우리를 담을 집
어차피로 만든 세상편에서의 에피소드는 집에 관한 따뜻한 관점의 한 갈래를 마주하게 한다. 평수나 크기로만 말해지는 주거지가 아닌 동네라는 의미로 거주하고 생활했던 곳의 생활정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의 메모, 깨끗한 이사 정리로 입주 청소비를 아낄 수 있고 그런 기분을 전해주고 싶다고 탐방했던 곳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인터뷰라서 감동이 더했다.

전월세 집이라도 사는 동안은 내가 거주하므로 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듯 하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짚은 것이 아닐까?
벽돌로 쌓은 집과 지푸라기로 엮은 집편의 논의처럼 늑대집만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의 집은 지푸라기 집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 들어온다. 집안이든 밖이든 안전할 권리가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의 흐름은 그저 집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느낀다.

217~218쪽
도시는 거름망으로 걸러진 사람들끼리 사는 곳이 아니다. 도저히 서로 겹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것을 억지로 구분하고 나누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상한 형태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다름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다름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성별은 같지만 국적은 달라, 나는 너와 언어는 같지만 피부색은 달라... 이렇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협소한지 가늠하게 할 뿐이다.
‘언어’라는 단어를 알았을때, ‘자가 주거’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성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다르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감각’을 체화하는 일이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 외 1명 지음
다산북스 펴냄

읽었어요
2024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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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어느덧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50대의 그들은 강릉 여행을 통해 각자의 삶에 대한 겹치는 부분과 여전히 가려졌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동갑 혹은 같은 또래라는 동질성의 키워드로 들어온 소설의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이 20대를 지나 50대를 살아왔던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강릉에서, 이곳이 아닌 여행지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여행지일까? 일탈 같기도 하면서 일탈이지 못한 중년이 된 3명의 대학 동창의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난주, 정은, 미경.
난주는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정은은 동창인 남편이 코로나로 인하여 퇴직 후 오픈했던 키즈카페의 폐업으로 경제적 파산에 이른 상태로 빚을 갚기 위한 생업전선에서 시달리며 살고 있다.
미경은 아픈 엄마를 홀로 돌보면서 직장인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녹록지 않다. 오랜 친구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공유하거나 말한 이야기들이 각각이다.

난주의 빈둥지증후군, 남아도는 시간의 공허감, 여성으로서의 성적 박탈감.
정은의 경제적 파탄, 생활고, 빚투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적 상황. 요실금으로 인한 수치심.
미경의 간병 돌봄에 혼자 고립감 속에 지나가는 시간들, 관계들.

세 명의 인물들의 서사를 읽다 보면 50대에 이른 삶의 모습들이 빛나지도 안정되지도 못함을 본다. 나름 노력하면서 시절을 살아온 왔는데, 어쩌다가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절에 충실했건만,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것일까!

가장 측은지심이 느껴진 인물은 미경이다. 동성 연인의 결혼으로 관계가 정리되고, 어머니와의 간병 생활이 시작되고, 자매인 언니의 사라짐, 독박 간병의 고립무원 같은 생활로 이어진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미경에게는 가족은 있지만 가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하지 않을 때 혼자가 되는 건 별로였다.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여야 혼자라는 사실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이 그립지 않았다. 그저 그리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난주가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일시적 관계의 단절 이후 기다려준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장면이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된다.
난주는 입사라는 사회생활 없이 바로 결혼과 출산, 육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활 패턴은 많은 관계들의 정리와 변화가 오는 시기다. 그때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느껴지던 고마움과 왠지 모를 어깃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정은은 난주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의 안락한 삶이라고 자신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빈둥지증후군과 여성성의 상실로 허한 난주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 파산에 이른 정은이나, 독박 간병의 미경보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인물들은 다 각자의 행과 불행을 지고 오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여행지가 강릉인 이유는 각자의 사연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강릉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가 강릉과 연결되면서 그녀들의 삶과 포개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그런데 오십대를 앞두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꾸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50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았는데, 남은 시간마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헛헛했다.

오십이 된다는 것 소설의 문장처럼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은 시간을 그냥 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늙음을 이제 삶의 중심부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십을 앞두고 함께 할 친구들이 있고, 나눌 서사가 있다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가 어떤 삶이었을지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삶을 안도하면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읽었어요
2024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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