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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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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람에게는 그런 분 세상에 없다고 칭송받지만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의 삶을 착취하지. 일관성 있게 선한 사람이라면 성직자와 갓 태어난 아기 정도 아닐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 조금씩이라도 더럽고 악한 인간이며 나노 시드라는 거름망에 걸러지지 않는 사소한 악행 따위는 없다는 진실을 시민들에게 공개할 수 없었으므로, 명목을 확실히 밝히지 않은 채 별도의 예산의 집행하여 사악한 꽃들을 모두 뽑아내고 태운 다음 원래 자리에 선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사다 심었다.
화장의 도시_ 화장(꽃의 장례)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동음이의어를 활용해 본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위트 있는 설정과 서사의 전개가 초단편소설이라는 형식에 불구하고 읽으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냉소적이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서사에 공감한다. 인간은 납작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쓴웃음을 지으며 일깨운다.
꽃의 장례라는 주제로 죽은 이의 선함으로 선한 꽃이 핀다는 작가적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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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무언가를 질문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고 때론 원망하는 것은 천상에서는 모독이자 불온함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렇다고 하여 적절하고 무게 있는 예의를 갖추지 않음이 곧 신에 대한 경애가 없음을 말하지는 않았다.
신인의 유배
처음에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의 차용인가 싶었는데,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나스카 지상화의 이야기라는 걸 찾아보고 알았다. 페루에 있다던 세계 불가사의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이 지상화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으로 전개된 이야기가 '신화'를 완성해 내는 또 다른 고전의 다른 해석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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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만 생각할 때는 소박한 꿈들이었으나 그 가운데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로 젊은 날의 끝자락에 매달리고 보니 얼마나 원대한 꿈이었는지를 알게 됐는데, 이렇게 발설함으로써 몸 밖으로 찌꺼기처럼 배출해버리자 또다시 그 무게와 가치가 한없이 가벼워졌다.
영 원의 꿈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꿈을 잃어가는지, 현재에서 꿈을 꾸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매몽이라는 상황에서 마지막에는 꿈의 값이 없다는 매몽가의 말과 꿈을 파는 나의 이야기인 이 단편 역시 씁쓸한 웃음만이 나온다. 경제적 자유를 이루지 못한 개인의 삶은 단지 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며 사회적 문제인지 꼼꼼히 되새기게 한다. 덧붙여 부모가 된 입장에서 내 아이가, 자녀가 경제적 독립을 해 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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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작가가 제각각 싸지르거나 게워낸 모든 글은 로렘 입숨의 무한 변주 반복에 불과할지도 몰랐고, 글을 쓰면 쓸수록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 아무거나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어졌으며,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비로소 그 무엇도 쓰지 않음-세상에 어떤 글도 존재하지 않음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궁극의 글쓰기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정적보다 완벽한 음악이 없듯이, 점 하나 찍지 않은 흰 도화지가 그림을 압도하듯이, 태어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삶이듯이.
동사를 가진 권리
작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면서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난 단편으로 읽었다. 쓴다는 것에 대한 의식과 '동사'에 대한 권리는 모든 쓰는 사람, 혹은 쓰고자 하는 사람을 주목하게 만드는 품사이다. 이 단편집의 제목인 로렘입숨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로렘입숨이라는 무의미한 더미 텍스트조차도 완전한 무의미는 아니라는걸, 무의미한 글이라는 해설에도 최초의 로렘입숨의 뜻을 소개하는 글조차도 의미성을 갖는다는 작가들의 의식을 읽는다.
날아라, 오딘
개를 훈련시켜 전쟁에 투입하는 동물 훈련 교관인 '나'는 오딘이라는 자신의 개를 전쟁에 투입하게 되면서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날 전쟁 투입되는 소년병에 대한 은유로 읽었는데, 작가의 글에서는 전쟁터에서 이용된 동물들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는 글에서 인간만이 전쟁의 당사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전쟁이란 결국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의 멸망을 향한 어리석고 참혹한 행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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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줘! 이건 억울하다고, 90초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 90초는 한 사람의, 한 팀의 역량을 판단하기에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라고. 한 곡의 노래로 쳐도 아직 클라이맥스조차 나오지 않을 시간이라고! 너희가 우리의 무엇을 안다는 거야. 어떻게 역량을 평가한다는 거냐고. 무슨 자격을 가지고!
아름다움과 기분 좋음에 대한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이들이, 무엇을 도구 삼아 타인의 기량과 예술성을 판단한다는 말인가. 나에게는 열렬한 흠모의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헌신짝 이하에 불과해 반대로 나에게 사악하거나 역겨운 것이 타인에게는 극상의 감미일텐데 말일세. 그러나 잊지 말도록 하게. 타인의 역량을 함부로 평가하고 난도질하여 누군가를 떨어뜨리고 누군가를 위로 올려주는 무대에 뛰어들기로 선택한 것은 본인들이라는 사실을.
예술은 닫힌 문
90초 만에 당락을 결정하는 이야기는 요즘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이라는 생각과 예술이라는 분야를 평가한다는 게 가능한 것인지 또한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특성과 그 시스템의 양날의 검과 같은 대중들의 심리가, 특히나 대중예술이라는 분야의 속성과 제작자와 미디어의 위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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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복수가 횡행하고 법률이나 도리 또한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만신창이가 된 오늘날, 합의에 의해 링 안팎에서 벌어질 수 있는 광기를 제어하고 유사시의 충돌과 유혈을 막을 수 있는 마지노선 같은 역할을 하면서, 그 자신도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지.
그럼에도 주체할 길 없는 분노를 연료로 삶아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상대를 저승길에 동행 삼겠다는 결심과 함께 모든 물질과 지위와 관계를 망설임 없이 던져버리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존재하고,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고 돕는 입회인으로 지금껏 후회 없이 살아왔다.
입회인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미래 사회라는 설정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미디어에서 많이 등장하는 사적 복수라는 주제가 그만큼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는 인식이 크다는 전제가 느껴진다. 무전유죄라는 관용구 표현이 여전히 유용한 사회라는 건, 인간들의 사회는 분쟁이 늘 존재하고 그런 분쟁의 조정과 조율의 필요성에 의해 법이 발생하였지만 그 법의 공정성이 신뢰받지 못한 현상들이 보인다. 그런 까닭에 사적 복수라는 방법에 입회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아빠로 지칭하는 입회인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은 여운이 짙다.
궁서와 하멜른의 남자
이 이야기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의 전개가 연상되었다. '쥐가 있네요?'라는 대사 다음 사건에 대한 복선이자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쥐의 등장으로 다음에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긴장감의 고조라고 할까. 잘 알려진 아동 소설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작가 자신이 경험과 지금의 아파트 거주의 주거문화와 엮어낸 이야기가 흥미롭게 읽게 했다. 쥐라는 존재를 아파트 주거 문화 속에서는 보기 드물지만 마주치는 그 순간 경악스럽다. 공포와 병균의 라이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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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어른이 되면 두 팔을 벌리고 선 나무가 될지도 몰랐다. 깜박 졸던 신의 실수로 식물의 유전자를 가진 무언가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처럼. 두 팔로 나무 그늘을 만들어주고, 머잖아 그것이 하늘까지 뻗어 올라갈지도.
중요한 것은 그 팔의 길이와 쓰임새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가는지에 달려 있을 거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롱슬리브
학창 시절 팔이 유독 긴 친구에 대한 이야기로 우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선한 마음의 가닿음이 느껴졌다. 놀림의 존재나 기이한 존재로 취급될 친구가 걱정되었지만 그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후일 긴팔 옷을 만드는 옷가게 주인이 된 화자의 말들은 서툴지만 선한 마음의 본바탕이, 멀리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응원하는 마음, 그 마음이 전이되어서 나 또한 있었을 롱 슬리브 한 친구를 생각해 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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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지우면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간다는 의미의 이동 또한 지워지며, 어떤 행위도 발생하지 않고 사람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조차 불가능한, 총체적 멈춤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공격성이 사라지면 약탈과 편취도 사라지며, 타인에 대해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인간의 지능이 제로에 수렴되고, 자신의 존속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도 제거된다.
그리하여 원은 공격이라는 말이 반드시 상대를 때리고 찌르는 게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인 무언가를 취하는 행위도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된다.
어째서 언어는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언어가 지시하는 사물이나 사태 또한 마찬가지로 연결되어 있는가. 어째서 하나를 없애면 다른 것이, 또 그와 비슷하거나 연관된 다른 것이, 다른 것과 이어진 다른 것이, 연쇄 다발로 소멸하는가, 결국은 모든 것이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
세상에 태어난 말들
신의 사전을 훔친 원이 하나씩 지워가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들이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게 하는 연속되는 말들의 연결 고리로 이해했다. 작가의 말의 '뜻밖의 조우'가 문학을, 소설을 읽는 의미의 경험이란 걸 굉장히 사유적인 문장으로 말해준다.
누더기 얼굴
혐오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투명 얼굴이 투명 인간으로 그리고 제목처럼 누더기 얼굴이 되어가면서 게토화 시키고 선을 넣지 않는 한 안전할 것이라는 말들은 인종에 대한 성소수자에 대한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격리, 우리와 그들이라는 타자화 시키는 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주었다.
지당하고도 그럴듯한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소재를 가지고 전개한 이 단편은 작가의 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과 일반적 혹은 상식적이라는 고정 관념의 틀을 모든 이들이 갖고 있다. 이 단편에서 각주로 붙은 인물과 영화의 각주들을 읽으면서 고정관념의 무의식적 받아들임의 잘못을 본다. 스테레오 타입으로 인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이 발생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훨씬 다층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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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미래를 엿보았다고 해서, 그곳에 편재한 추위와 절망과...... 총체적인 지옥을 목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바꾸기 위해 자신을 반성하거나 현재를 조율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요. 원인을 알아냈다고 하여 인간들이, 두 손아귀에 단단히 붙든 핸들을 다른 쪽으로 꺾거나,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는 않는다는 것을요. 자기가 달려가는 종착지에 멸망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두가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고 모른 척한다는 것을요.
시간의 벽감
미래 시대의 재앙을 알고도 선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지구 환경의 위기에 다다라 있으면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인간은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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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님의 인생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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