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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철학이 묻고 심리학이 답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의 표지 이미지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로랑 베그 지음
부키 펴냄

# 환경은 행동에 영향을 준다

자신의 행동과 결정이 일관적이고 외부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봤던 것 같다. 오후에 어떤 선택을 했다면 오전에도 동일한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분에서도 결정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랑 있든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어떠한가? 하물며 조명의 밝기 정도에 따라도 행동이 달라진다. 자신이 얼마나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부분을 인정한다면 환경에 덜 휘둘릴 수 있고 오히려 환경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사기꾼이 왜 존재하는가? 대상자의 환경을 조작해 그 사람의 행동을 원하는 데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 환경은 행동 결과를 해석한다

내가 똑같은 행동을 해도 A사회에서는 도덕적일 수 있고 B사회에서는 아닐 수 있다. 같은 농담에 민수는 웃지만 철수는 화낼 수 있다. 이렇게 환경이 주는 피드백이 나에게 쌓여 다시 나의 다음 행동을 결정짓는다.


# 정리

나는 축적된 과거 경험과 현재의 환경에 의해 선택을 하고 행동한다. 그 선택은 새로운 환경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또 다음 행동의 밑거름이 된다. 이렇게 끝없이 순환한다. 정신에는 제1계층 유전 계층(진화심리학)과 제2계층 정보 계층(사회심리학, 밈, 환경 학습)이 있다고 생각한다. 생후의 경험들은 2계층에 계속 쌓여나간다. 나의 모든 결정과 행동은 1계층과 2계층을 관통하여 일어난다. 여기서 고유한 자아와 영혼은 어디쯤에 있을까? 나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내가 지나온 환경을 완전 똑같이 겪는다면 딱 지금의 나와 같은 사고를 가지지 않을까? 유전자와 (지나온, 마주한) 환경이 행동을 결정하니 동일한 전철을 밝게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아와 영혼은 재현될 수 있다.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겠지만 우린 유전자와 경험의 집합체일 뿐이다.

(2020.10.08에 쓴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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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밀고 당김의 연속이네, 자넨 이것이 되고 싶지만 다른 것을 해야만 하자. 이런 것이 자네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자넨 너무나 잘 알아. 또 어떤 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자. 그걸 당연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야. 밀고 당김의 긴장은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과 비슷해.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중간에서 살지”

”무슨 레슬링 경기 같네요.”

”레슬링 경기라… 그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묘사해도 좋겠지.”

교수님은 웃음을 터뜨린다.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공감한다 내 인생도 레슬링 경기 같다. 내 우측 홍코너에는 모리 교수가 말하는 사회의 통념과 커리어 그리고 돈이 있다. 좌측 청코너에는 모리가 말한 삶의 핵심(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삶의 골수) 그리고 기여가 있다.

어른이 되고 사회에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홍코너의 힘은 강해졌다. 청코너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으로 인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홍코너에게 짓눌려 가려진 청코너의 존재를 거의 잊을 뻔했다. 그러다가 4년전 우연히 독서모임을 만났다. 그 후 다양한 책을 읽고 대화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짓눌려있던 청코너가 조금씩 꿈틀댔다. 도약하기 위해 호흡을 갈무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매달 모임에 나갈 때마다 청코너에 힘이 보태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홍코너를 밀어내며 조금씩 일어섰다. 2년이 흘렀다. 마침내 청코너는 우뚝 섰고 그 기세를 몰아 홍코너를 누르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됐다. 나는 그렇게 퇴사를 하고 백수가 됐다. 1년 정도의 기간을 잡아 독서에 집중하고 생각하기 위해서 말이다.

1년의 시간동안 다양한 작가들이 청코너에게 응원의 말을 해주고 지나갔다. 이제 청코너의 힘이 너무 강해져 오히려 홍코너를 짓눌려 버렸다. 나는 돈과 소비를 어느정도는 증오하기 시작했고. 돈버는 일에 열심히인 사람들을 사회의 노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책들이 청코너에만 힘을 실어준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중용을 얘기하며 청코너와 홍코너 모두를 격려해 주었다.

백수의 기간이 지나 다시 일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홍코너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청코너를 짓눌러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청코너가 너무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일과 삶 그 조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홍코너와 청코너는 균형 있게 합을 주고받으며 즐기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레슬링이 아닌 왈츠를 추는 것 처럼 보인다. 이제 누가 우세하냐 열세하냐 아니라, 어느쪽이 리드하냐로 느낌이 바뀌어가고 있다.

앞으로 내 삶은 균형을 유지하되 청코너가 리드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난 계속 독서모임에 참여할 것이다. 청코너에게 사랑을 주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언제 다시 홍코너가 주도권을 잡을지 모른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살림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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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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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옥한 사랑

선함의 뿌리를 찾아가 보니 ‘사랑’이란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고 있다.

선함의 열매는 땅에 떨어져 ‘사랑’이란 토양을 더욱 비옥하게 만든다.

더욱 비옥해진 토양에서 선함이란 나무는 더 잘 자란다.

이렇게 선함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오래도록 말이다.

선함의 나무는 군집을 이뤘다. 서로의 뿌리가 엉켜 사랑을 주고받는다.

사랑의 토양을 함께 가꾸고 함께 열매를 맺는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이 선한 나무 군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토양에는 울타리가 없어요. 누구든 들어와 뿌리를 내려요. 아주 비옥하답니다. 함께 가꿔 가요”

살던 곳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이 소식들 듣고 몰려와 뿌리를 내린다.

선하지 않던 나무도 ‘사랑’의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으니 선한 나무로 변한다.

새로온 나무 중에는 어린 나무들도 있다.

어른 나무들이 가지를 한껏 펼쳐 무자비한 벌목꾼들이 볼 수 없게 가려준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아주 가끔은 토양을 더럽히는 나무가 들어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무를 거르고자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모두를 불신하느니 모두를 신뢰하고 가끔 상처받는 편이 낫다.

믿음을 가지고 울타리를 열어놓아야 한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생각의힘 펴냄

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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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생각의힘 펴냄

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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