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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언어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언어는 어떻게 창조되고 진화했는가)의 표지 이미지

진화하는 언어

닉 채터 외 1명 지음
웨일북(whalebooks) 펴냄

# 인간들의 언어 무도회에 난입한 몸치 AI

저자들은 언어가 ‘기술적 특이점’에서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한다. 나도 그 부분은 설득이 됐다. 저자들이 우려하는 우려는 ‘수직 성장’, 즉 기술 자체의 혁신으로 특이점으로 나아가는 위험이라면 ‘수직 성장의 위험’ 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걱정되는 것은 ‘수평 성장의 위험’이다. 내가 말하는 ‘수평 성장’이란, 기술이 보편화되고 많이 쓰이는 것이다. 옆으로 퍼지는 형태다. 특이점에 도달하지 않은 기술이라도 이런 전파성은 우리에게 큰 위험을 끼친다. 실제로 GPT-3는 2022년 11월 오픈배타 후 2달 만에 월 사용자 1억이라는 경이로운 숫자에 도달했다. 이것은 인스타그램이 1억 명에 도달한 속도보다 15배 빠르다. 그 후 여러 회사에서 AI를 경쟁적으로 발표하고 있고, 인터넷은 AI가 쓴 글들로 범벅이 되고 있다. 너도나도 블로그나 유부트 콘텐츠들을 AI로 자동 생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다.

나는 이제는 진정으로 언어가 오염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그 이유는 AI가 쓴 글을 다시 AI가 학습하고 그것으로 AI가 글을 쓰는 상황이 점점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도 나오듯이 “기계가 세계 정복에 착수했다”를 여러 단계로 번역했을시 “장비는 세계 지배로 설정된다”라는 어이없는 문장이 나온다. 이 현상을 인터넷에 모든 글에 투영해보자. AI가 글을 쓰고 다시 AI가 그것을 학습하는 행위가 반복된다면 정말 "두 개의 눈을 가진 발(foot)인 주인공인 1600년대 미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통치하는 역사를 다룬" 에세이가 나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참혹할 것이다. 왜냐하면 AI는 언어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첫 번째 AI가 글에 사소한 실수를 한다면, 두 번째 AI는 그 실수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학습하고 글을 쓸 것이다. 안타깝게도 거기에 실수들이 누적된다면, 마치 진화처럼 사소한 실수들이 쌓여 언어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 GPT-3에게는 사람들이 쓴 글들은 ‘자원’이다. 그렇게 본다면 처음으로 콘텐츠 시장에 도약 중인 지금이 가장 ‘자원’이 가장 깨끗한 황금기일 것이다. 앞으로 스스로 더럽혀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처음 깨끗한 물을 찾은 인간은 가장 깨끗한 물을 누리고, 더 많은 사람이 찾으면서 물은 점점 오염되고, 결국에는 발길이 뚝 끊기게 되듯 말이다.

사고실험으로 극한의 상황을 설정해보자. 지구에 사람이 다 사라졌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서버들에 전기는 계속 공급되고 있다. AI 들은 사람이 사라지기 전 설정해놨던 주기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또 AI는 그 글들을 가지고 학습한다. 이렇게 백 년이 흐른다고 하자, (저자들이 말했듯 100년이 흐른다고 해도 ‘특이점’에 도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전 세계 AI들은 자기들끼리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또 학습하는 행위를 수도 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글을 본다면 아마 아무 의미도 없이 형편없을 것이다. 한글일 경우 이런 형태일 지도 모른다. “가 거 당신 하늘 1889초 고양이했다.”

여기에 저항하는 방법은, 사람들의 손에서 나온 글이 AI보다 쓴 글의 양에 밀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의 손을 타면 ‘제스처 게임’을 거친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의 윤곽이 잡히게 된다. 이 경쟁은 어떻게 보면 언어를 다듬는 것과 흩트려 놓는 측의 싸움이다. 사람이 쓴 글의 양이 우세하다면 AI도 현재 빙산의 숨겨진 부분을 희미하게라도 모방하여 언어의 쓰임을 계속 다듬어 나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AI가 콘텐츠 생산을 도맡으며 사람은 점점 소비만 하는 역할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창조 욕구가 있으므로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인터넷에 업로드되는 글의 비율이 (AI)51:49(인간)만 되더라도, 이 사소한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고, 결국 인터넷에는 아래는 텅 빈 ‘빙산의 일각’만 떠다니게 될 것이다.

위처럼 인터넷의 언어가 오염된다고 가정했을 때, 이것은 당연히 인간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 책에서 까발린 “GPT3는 구조적으로 진정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경험적으로 GPT3가 보여주는 놀라움에 사롭잡혀 있고, 정말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AI 소식을 부풀리며 퍼나르는 매체들도 한몫할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현실로 인해서, 사람들은 GPT3와 언어적 춤을 추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얼마 전 원어민 친구 사귀지 말고 GPT를 통해서 영어 공부하라는 영상도 봤다. 또한 언어를 학습해야 할 어린아이들도 바쁜 부모를 대신해 GPT3와의 대화나 인터넷으로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오염된 언어들이 사람들에게 유입될 것이다. 오염된 언어라도 사람끼리의 ‘제스처 게임’이 누적되면 다시 형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서로 대화하기보다. 집에서 인터넷과 AI로 모든 것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바로잡을 기회도 사라질 것이다. 최대한 잦은 ‘제스처 게임’을 하는 것이 우리 언어를 지키는 방법이다.

저자들은 이것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에서는 GPT-3의 수직적 위험, 그 자체의 특이점 가능성에 대해서만 다뤘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터넷 역사상 가장 사용자가 가파르게 상승한 서비스가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서는 2022년 2월에 출간됐으며, 당시는 GPT-3가 오픈베타를 하며 일반 사용자의 눈에 띄기 9달 전이었다. 저자들은 아마 일부 기술자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질 ‘클로즈 배타’에 참여해서 기능적인 위험성만 검토한 것 같다. 그리고 저자들은 언어가 파괴되고 있다는 걱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위안을 줬는데, 오래전의 걱정과 지금의 걱정을 동일선상에서 봐야 할지 모르겠다. 언어가 파괴된다는 걱정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서의 언어적 춤의 오해였을 것이다. 서로 변칙적인 춤을 잠시간 이해하지 못하거나 스텝이 순간적으로 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들만의 언어 무도회에 춤을 출 줄 모르는 AI가 난입했다. 그런데 그 몸치 AI가 무도회를 장악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오해해왔던 걱정과는 완전 다른 차원의 위험이다.

(2023.06.15에 쓴 독후감)
2023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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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대의 균형

인간의 조건인 노동, 작업, 행위를 나의 삶과 현대에 빗대어 생각해 보자.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유 다음으로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지금은 노동의 영역이 대부분을 집어삼킨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인간의 조건이 균형이 잘 맞는 시대가 있었을까? 균형이 잘 맞는 것을 시각적으로 생각하면 3개의 다리가 균형을 이룬 삼각대로 볼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들에게 노동 측면을 넘기면서 다리 하나를 잃었다. 현대는 작업과 행위라는 두 개의 다리가 짧아져 삼각대가 거의 꼬꾸라진 상태다. 나 자신의 삼각대는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작업과 행위를 되찾으려면 노동이 어떻게 그것들을 집어삼켰는지 이해해야 한다. 노동이 삶의 필연적인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거라면 1차원 적으로는 채집하고 수확하고, 요리하고, 거처를 마련하는 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화폐가 생기고 이후에는 사적 영역의 확장으로 경제학이 생기면서, ‘노동’이란 것은 1차원 적인 생존 활동과 분리되어 화폐라는 매개체를 가지게 되었다.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가정처럼 분업이 생기고, 호모 파베르도 삶의 필연성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려는 노동으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아렌트가 마지막 남은 것은 예술이라고 했던 것 같다. 예술은 그래도 아직 ‘값어치’보단 ‘가치’로서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도 호모 파베르들의 작품이 필연성의 해결과 아예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든 100% 노동 100% 작업 100% 행위는 없다. 단지 고대 호모 파베르들의 생물학적 필연성은 노예들이 안보이는 영역에서 해결해 줬기 때문에, 돈보다는 명예와 자아실현에 중점을 뒀을 것이다. 행위는 현재 영역 자체가 많이 없어졌기도 하며, 그나마 남아있는 행위들도 돈을 벌기 위한 수단들로 많이 변화되었다.

현대의 문제는 그런 작업과 행위를 꿀꺽한 노동의 비대에 있다. 필연성을 해결하는 정도를 넘어서도 노동에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면 필요 이상의 돈이 모이게 되고, 그것은 사치로 이어지거나 끝없는 축적으로 가게 된다. 인간의 조건 측면에서 보면 노동은 필연성을 해결하는 정도로 하고, 남은 에너지는 작업과 행위로 쓰여야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자라면서 달리 진정한 ‘작업’ 과 ‘행위’ 방법에 대해 배울 곳이 없다. 그래서 잉여 자원이 생겨도 그나마 익숙한 노동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작업’ 과 ‘행위’는 무엇인가? 순수한 사유로부터 나와야 한다. 왜 순수한 것을 붙였는가? (필연성을 해결하기 위해)돈을 위한 ‘작업’과 ‘행위’에도 사유가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잘 팔리는 것, 돈이 되는 것을 생각해야 되고 그런 방향은 순수한 사유가 아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유 자체가 배제될 수 있다. 단순히 복제품을 생산하거나 자극적이 말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실 ‘작업’과 ‘행위’가 노동에 먹혔다기보다는 ‘노동스럽게 되었다’ 가 맞을 것이다. 게다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인 아닌 ‘작업’ 마저도, 아렌트가 말한 것 처럼 사유가 배제되고 쉼과 힐링의 목적이 되면서 ‘취미’화 되어가고 있다. 본래 진정한 작업이란 자신을 짜내고 치열하게 사유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나는 삼각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노예를 데리고 있지 않으며, 삶의 필연성을 직접 해결해야 하기에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필요하다. 또한 1차원 적인 노동 행위도 필요한데, 요리와 재배 등의 원초적인 생기를 만끽해야한다. 그리고 필연성을 해결하고 남은 에너지로는 작업을 해야하는데, 나에게는 글을 쓰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행위인데, 내게는 독서모임이 가장 순수한 행위의 장터이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돈도 안되는 걸 뭐하려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 모임이 가지는 힘은 크다. 그 외에도 사람 사이에 크고 작은 다양한 행위들에 힘을 쏟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이다. 아렌트가 사유가 모든 활동을 능가한다는 이유가 있다. ‘사유’는 작업과 행위의 원천이다. 이것이 부실하면 좋은 작업과 행위도 나올 수 없다. 이 사유를 기르기 위해서는 독서가 큰 자양분이 된다. 사유가 길러지고 강해진다면 좋은 작업과 행위는 새어나오게 되어 있다.

만약 이대로 모든 활동이 노동화 되고 잉여 자원으로 사치와 고통 없는 취미만 남는 사회(또는 개인)가 된다면, 아렌트의 말처럼 바보들의 천국이 되어버릴 것이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지은이), 이진우 (옮긴이) 지음
한길사 펴냄

2024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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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레슬링

”인생은 밀고 당김의 연속이네, 자넨 이것이 되고 싶지만 다른 것을 해야만 하자. 이런 것이 자네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자넨 너무나 잘 알아. 또 어떤 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자. 그걸 당연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야. 밀고 당김의 긴장은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과 비슷해.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중간에서 살지”

”무슨 레슬링 경기 같네요.”

”레슬링 경기라… 그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묘사해도 좋겠지.”

교수님은 웃음을 터뜨린다.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공감한다 내 인생도 레슬링 경기 같다. 내 우측 홍코너에는 모리 교수가 말하는 사회의 통념과 커리어 그리고 돈이 있다. 좌측 청코너에는 모리가 말한 삶의 핵심(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삶의 골수) 그리고 기여가 있다.

어른이 되고 사회에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홍코너의 힘은 강해졌다. 청코너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으로 인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홍코너에게 짓눌려 가려진 청코너의 존재를 거의 잊을 뻔했다. 그러다가 4년전 우연히 독서모임을 만났다. 그 후 다양한 책을 읽고 대화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짓눌려있던 청코너가 조금씩 꿈틀댔다. 도약하기 위해 호흡을 갈무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매달 모임에 나갈 때마다 청코너에 힘이 보태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홍코너를 밀어내며 조금씩 일어섰다. 2년이 흘렀다. 마침내 청코너는 우뚝 섰고 그 기세를 몰아 홍코너를 누르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됐다. 나는 그렇게 퇴사를 하고 백수가 됐다. 1년 정도의 기간을 잡아 독서에 집중하고 생각하기 위해서 말이다.

1년의 시간동안 다양한 작가들이 청코너에게 응원의 말을 해주고 지나갔다. 이제 청코너의 힘이 너무 강해져 오히려 홍코너를 짓눌려 버렸다. 나는 돈과 소비를 어느정도는 증오하기 시작했고. 돈버는 일에 열심히인 사람들을 사회의 노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책들이 청코너에만 힘을 실어준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중용을 얘기하며 청코너와 홍코너 모두를 격려해 주었다.

백수의 기간이 지나 다시 일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홍코너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청코너를 짓눌러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청코너가 너무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일과 삶 그 조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홍코너와 청코너는 균형 있게 합을 주고받으며 즐기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레슬링이 아닌 왈츠를 추는 것 처럼 보인다. 이제 누가 우세하냐 열세하냐 아니라, 어느쪽이 리드하냐로 느낌이 바뀌어가고 있다.

앞으로 내 삶은 균형을 유지하되 청코너가 리드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난 계속 독서모임에 참여할 것이다. 청코너에게 사랑을 주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언제 다시 홍코너가 주도권을 잡을지 모른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살림 펴냄

2024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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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옥한 사랑

선함의 뿌리를 찾아가 보니 ‘사랑’이란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고 있다.

선함의 열매는 땅에 떨어져 ‘사랑’이란 토양을 더욱 비옥하게 만든다.

더욱 비옥해진 토양에서 선함이란 나무는 더 잘 자란다.

이렇게 선함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오래도록 말이다.

선함의 나무는 군집을 이뤘다. 서로의 뿌리가 엉켜 사랑을 주고받는다.

사랑의 토양을 함께 가꾸고 함께 열매를 맺는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이 선한 나무 군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토양에는 울타리가 없어요. 누구든 들어와 뿌리를 내려요. 아주 비옥하답니다. 함께 가꿔 가요”

살던 곳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이 소식들 듣고 몰려와 뿌리를 내린다.

선하지 않던 나무도 ‘사랑’의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으니 선한 나무로 변한다.

새로온 나무 중에는 어린 나무들도 있다.

어른 나무들이 가지를 한껏 펼쳐 무자비한 벌목꾼들이 볼 수 없게 가려준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아주 가끔은 토양을 더럽히는 나무가 들어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무를 거르고자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모두를 불신하느니 모두를 신뢰하고 가끔 상처받는 편이 낫다.

믿음을 가지고 울타리를 열어놓아야 한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생각의힘 펴냄

2024년 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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