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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위대한 연설

이소크라테스 외 3명 지음
민음사 펴냄

표지만 보고서 책을 안다고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교과서에 적힌 유명인들 이름은 줄줄 꿰면서도 정작 그가 행한 말과 행동을 모른다면 박식하다고 할 수 없다.

오늘도 거리는 스스로 박식하고 현명하다 자부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이들이 넘쳐난다. 고대 아테네 연설가들의 연설문을 실은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은 우리를 이 같은 무지와 어리석음의 구렁텅이로부터 꺼내줄 밧줄 같은 책이다. 누구나 들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페리클레스부터 뤼시아스, 이소크라테스, 데모스테네스까지 존경받는 네 그리스인의 연설문이 실렸다.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 지도자로 아테네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놓고 스파르타와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이끌었다. 뤼시아스는 당대 아테네 법정연설문 작성자 가운데 가장 명성 높은 인물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혼란한 아테네 정국에서 민주정체의 회복을 위해 애썼다. 플라톤의 경쟁자로 알려진 이소크라테스는 죽는 날까지 범그리스 통합과 동방정복을 꿈꿨다. 그가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에게 보낸 편지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정벌에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이 있다. 마지막으로 데모스테네스는 이소크라테스에 대응하는 인물이다. 전문연설가인 그는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경고하고 아테네가 그리스의 모든 힘을 모아 마케도니아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테네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산 이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아테네가 나아가야 할 길을 연설로써 제시했다. 직접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아테네 사회에서 모든 결정은 시민에 대한 설득을 통해 이뤄졌으므로 말과 글은 국가를 이끄는 가장 큰 무기였다. 이들은 각기 민회와 전몰용사의 장례식, 시민대축전을 축하하는 자리, 법정 등에서 아테네가 처한 현실과 이를 타개할 방안을 이야기했다. 때로는 전쟁을, 때로는 참주의 처벌을, 때로는 저항을 이야기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그리스 전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테네의 부강함이 스파르타를 압도하고 있으며 전력이란 그를 뒷받침하는 부에서 나오기에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페리클레스는 예기치 않은 전염병으로 전쟁을 제안한 그에게 시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자 이를 달래고 전의를 북돋기 위해 연설을 적극 활용했다.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전쟁이 불가피하며, 우리가 전쟁을 기꺼이 받아들일수록 더 약하게 공격하는 적을 가지게 될 것이고, 도시든 개인이든 가장 큰 위험으로부터 가장 큰 영예를 얻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페르시아에 맞섰을 때, 그들은 우리가 가진 만큼의 자원으로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도 버리고 운보다는 지혜로, 힘보다는 용기로 이방인들을 몰아냈고, 이 도시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우리가 그들에 못 미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적들을 막아 내어, 후손들에게 이 도시를 줄어들지 않은 상태로 넘겨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6,37p

뤼시아스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은 30인의 참주가 쿠데타를 통해 아테네를 장악했다 일 년 만에 권력을 잃은 상황에서 법정연설에 나선다. 30인 가운데 한 명인 에라토스테네스에 대한 고발연설로, 민주정 수복 이후 쿠데타 세력을 관대하게 사면하는 분위기 가운데 행한 연설이다. 뤼시아스는 에라토스테네스에게 가문의 재산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형마저 살해당한 인물로 이 연설에서 사적 분노와 참주정에 대한 공분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이 모두 모인 올림피아 축전 연단에서 발표된 연설문을 통해 범 그리스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무려 10년 동안 다듬고 또 다듬은 연설문 ‘시민 대축전에 부쳐’가 아테네인을 자극해 그리스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 페르시아를 향한 정벌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의 뜻이 아테네를 통해 이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에게 기대를 걸었다.

데모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를 통합하고 남쪽으로 눈길을 돌린 필립포스 2세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정치가다. 그는 필립포스 2세의 야욕을 드러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아테네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함선과 병력, 용병의 보충과 보수의 지급, 편제까지를 아우르며 격정적인 연설을 토해낸다.

2400년 전 아테네에선 말로써 사람을 설득하고 공동체의 나아갈 바를 정하는 정치체제가 확립됐다. 민중(Demos)이 힘(Kratia)을 갖는 민주주의였다. 설득과 사고의 기술인 수사학과 철학이 고도로 발달해 이 체제의 근간을 이뤘다.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에 실린 각각의 연설은 고대 아테네 문명의 정수이며, 활자로만 남아 있던 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 생생한 말과 글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대 아테네가 처한 위기를 돌파하려는 이 치열한 연설들이 수많은 물음표 가운데 포위된 우리의 오늘에 하나의 해법이 되어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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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가 오로지 소비에서 끝나지 않는단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하여 우리는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더 많은 생산에서 끝나지 않고 더 많이 폐기해야 한다. 그리하여 합리적 소비를 막기 위한 온갖 술수가 동원된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 경제규모의 확장이 인류를 구원하리란 믿음이 곳곳에서 깨져나간다. 자본주의의 실패 또한 수습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에너지 수급과 쓰레기 처리, 생산부터 폐기에 이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문제를 인류는 감당치 못하고 있다. 문학이 자리를 틀고 앉아 매일 하던 이야기만 반복한대서야 세상과 유리된 오락과 구분할 수 없는 일이다. 문학이 인간의 사상과 예술, 지성의 정수로써 작가와 독자를 잇는 창이라면, 이런 작품이야말로 기꺼이 제 역할을 모색하는 책이라 할 것이다.

실린 작품의 착상이며 구성, 완성도에 일부 아쉬움이 있지만, 적어도 근래 한국 문학 가운데 흔치 않은 시도란 건 분명하다.

최소한의 나

이준희 외 6명 지음
득수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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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아끼는 이들이 파리를 가면 반드시 찾는 곳이 있다. 바로 카페. 레 뒤 마고, 카페 드 플로르, 르 프로코프, 르 돔, 본 프랑케트, 르 타부 같은 곳들. 그저 카페인 것 만이 아니다. 가게마다 유명한 작가들, 이를테면 샤르트르와 보부아르, 카뮈, 콕토, 랭보, 헤밍웨이, 카파와 브레송,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같은 이들과 얽힌 사연이 한가득이다. 이곳을 찾는 건 예술과 역사, 낭만과 아름다움을 만나는 일이다.

책은 한반도, 특히 모던 열풍이 일던 1920년대 이후 십수년 간 이 땅에서도 명사들이 카페를 찾아 교유하고 작품을 빚던 시기가 있었단 걸 알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굴곡진 역사는 저기 파리처럼 우리의 공간을 지켜내지 못했고, 그나마 남은 건물들마저 지켜내지 못했음을 일깨운다. 그마저도 이를 기억하는 이가 없다. 이 얼마나 빡치고 쪽팔린 일인가 말이다.

개화기 한국 커피역사 이야기

김시현, 윤여태 (지은이) 지음
피아리스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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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주제를 다룬 24편의 글이 그가 발표한 소설과 시, 극본에 깔린 저자의 인간관이며 세계관을 알기 쉽게 드러낸다.

온갖 압제와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육체와 정신의 진정한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이 비교적 깔끔한 구성 아래 들어찬 게 특징적이다. 날카로운 시각과 흥미로운 사유 사이로, 마광수의 저술에 기대하게 되는 것, 즉 과격하여 무리하게 느껴지는 논리 전개를 마주하는 재미 또한 상당하다.

물론 공감하는 대목보단 반박하고 싶어지는 부분이 훨씬 많은 책이다. 그것이 그대로 마광수를 읽는 즐거움이란 걸 그의 애독자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남이 듣기 좋은 글만 쓰는 것이 미덕이고 더 나은 작가인양 추켜세워지는 세태 가운데서, 웬만한 비판쯤엔 즐기듯 부딪치는 그의 글이 매력을 뿜어낸다.

책 가운데 여러 면모를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조금의 불편에도 한없이 민감한 오늘의 독자에게 이곳이 어떻고 저곳이 저렇다며 뜯기고 씹힐 구석이 수두룩한 걸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의 작가는 더 자극적이고 파격적이며 거침없는 생각을 활자로 적지 못하게 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이르고 만다. 그렇다면 그건 과연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류는 진보하지 않는다는 마광수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론

마광수 (지은이) 지음
책마루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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