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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

소설 속 애티커스 핀치 씨의 태도가 훌륭하다던 일용이의 말은 참으로 옳다. 내가 이 소설을 통해 진정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애티커스 핀치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 그는 내게 부족한 덕목들을 거의 온전히 갖추고 있는 멋진 아버지였고, 멋진 변호사였으며, 무엇보다 멋진 인간이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이해해 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이들에겐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으며, 집 안에서 하지 않을 것들은 집 밖에서도 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 세 가지 덕목이 성장소설로서 이 작품이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당연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이 당연한 것만 지키더라도 세상은 참 살만해질 것이라는 점에서 이 덕목들은 결코 쓸모없지 않고, 교훈적인 면에서는 인상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소설 자체로서 이런 덕목들을 기존에 이야기된 정도 이상으로는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독자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못하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은 스카웃이 부 래들리의 집 앞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기까지 호소력있는 이야기들을 엮어나가고 있음에 분명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소설이 나오기 이전에 다른 이들이 발견하고 발전시켜온 주제들을 가져다 쓰는 정도에 불과했고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제외한다면 여타 다른 성장소설들과도 차별화될 수 없는 수준인 것이다.

다시말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같은 유명한 성장소설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이 작품은 그 배경이 되는 40년대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을 다뤘다는 특색을 제외한다면 거의 전적으로 성장소설의 기본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스카웃이 진정한 숙녀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주제의식 역시도 너무나 익숙하고 교훈적인 것이어서 얼마간 물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수준이 앞의 세 작품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흥미로운 유머와 핀치집안 사람들을 위시한 멋진 캐릭터들, 그리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통해 그리 뒤떨어지는 작품이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반적으로 사내아이를 성장소설의 주인공으로 쓰는 게 보통이던 시기였음에도 여자아이인 스카웃을 1인칭 화자로 설정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사내아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보다 주인공이 상당히 조숙해서 제법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부분적으로는 스카웃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조숙하게 여겨진 나머지 소설이 비현실적으로 생각되기도 했지만 내가 여자아이였던 적이 없으니 정확히 현실성을 따져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약간 지나친 부분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퍼 리의 문장 역시도 그리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는데, 물론 번역의 문제를 감안해야 하겠지만, 대개의 번역된 영미권 소설들처럼 이 작품 역시 매력적인 문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경험상 유럽 작품들은 멋진 문장들이 많은데 반해 미국 작품들은 단순하고 이야기 위주일 뿐 문장에 있어서는 유럽 소설들을 따르지 못하는 듯하다. 단순히 해석상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문체만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의 연결, 단어의 사용 등에서도 차이가 어느정도는 있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이 소설을 판단하는 제일의 기준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의 경우에는 이 부분에서 적잖이 실망하고 말았기에 여기에 기록해 둔다.
2023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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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이 거세된 공정에 집착하고, 경쟁에 따른 성과에 호의적이며, 페미니즘에 발작적으로 대응하는 집단이 이대남의 정체성으로 제시된다. 그 원인으로 지목된 건 '남성 마이너리티', 사상 최초로 젊은 남성 집단이 스스로를 차별받는 약자로 여긴다는 진단이다. 살피자니 과연 그럴 법도 하단 생각이 절로 드는 가운데, 이대남을 한심하게 여기는 저자들의 오만한 태도와 해석이 은근히 비어져나와 마음을 불편케 한다.

생각할수록 이대남의 피해의식을 마땅한 결과라 여기게 된다. 그러나 어느 세대라고 스스로가 사회적 과실을 누렸다며 감격해할까. 전쟁을 겪은 이들과 전후세대, 독재와 투쟁한 586, 지난 시대 불평등을 감내해온 여성들까지 모두가 저마다의 짐을 지고서 버텨온 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사회적 자산은 유한하고 성장동력은 꺾여버린 암울한 환경 가운데 시시한 문제에 분노하는 여유없는 세대의 등장이 꼭 한국의 미래인 것만 같아 한숨만 난다.

20대 남자

정한울 외 1명 지음
시사IN북 펴냄

15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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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의 이십대는 우울과 슬픔과 분노로 가득했다고 전한다. 심리상담을 받고 병원을 다니기도 했으나 꾸준하진 않았다. 서른이 넘고 삶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야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정감이며 무덤덤한 마음을 얻는다. 처방받은 약을 먹고 가사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창작 활동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 창작자의 삶이라 해도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하지만 한 편으로 그 삶 가운데서 곡이 태어나는 것이다.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는 곡이.

책은 매 장마다 애리의 노래가 태어난 배경을 적는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 곡의 가사와 함께 곡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QR코드까지 삽입해 놓았다. 말하자면 곡과 에세이의 기묘한 결합이다.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닌 음악가의 글인지라 조금 정돈되지 않고 감성에 따라 마구 나아가는 듯한 인상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특정한 곡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만큼, 읽는 이는 음악과 삶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겠다.

수많은 내가 다른 곳에 살고

애리 지음
편않 펴냄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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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인 감상을 절로 일으키는 그림체 위로 들어찬 글은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세계, 그 순환을 비춘다. 그러나 순환과 재생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닿음,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지식으로는 닿지 못한 연결성을 내보인다.

이야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이세 히데코의 책은 그림책이 그저 십분이면 후딱 넘기게 되는 애들 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만든다. 짧게 보아도 오래도록 생각나는 장면, 그런 순간을 선사한다. 삶에 쉼표를 찍고 물음표를 남긴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와 물음표, 그것이 그림책의 역할이 아닐까. 사색이 귀해진 시대, 여백을 채우는 온갖 콘텐츠들 사이로 그림책을 찾는 이들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알겠다. 이따금 그림책을 펼칠 기회를 가져봐도 좋겠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김소연 지음
천개의바람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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