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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세트 - 전21권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 펴냄
부동산은 한국 사회의 도화선이다. '임대차 3법'을 둘러싼 논란부터 갈수록 심화되는 자산불평등 이슈까지 부동산만큼 한국사회의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문제도 없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부동산제도는 한반도에 국가가 세워진 이래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다. 주로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보다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토가 중심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국가와 기득권 계층이 토지의 소유권과 사용권을 두고 힘겨루기를 벌였다. 대부분 실제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선 10세기를 전후해 토지 부족 현상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고려시대였다. 토지는 제한적이지만 자본은 축적되고 사람은 늘어났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경종은 취임 직후 전시과 제도를 시행해 모든 국토를 조사해 대장에 등록하고 토지에 대한 경작권만을 나누고자 했다. 일부 토지에 대해선 상속과 매매를 허용하지 않는 개혁책도 내놓았다. 물론 지켜질 리 만무했다.
이후 1000여 년이 더 흐르는 동안 상황은 대체로 악화됐다. 토지는 그대로인데 인구는 늘고 자본은 축적됐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견디다 못해 왕조까지 엎어졌다.
건국과 함께 주목할 만한 개혁도 있었다. 조선 초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로, 대규모 토지개혁을 통해 민심을 되돌리려는 조치였다. 조선 초 정도전과 대한민국 독립 이후 이승만의 토지개혁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가 많았으나 적어도 토지개혁을 통한 경제불평등 해소가 시급하다는 데 사회적 공감대가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개혁 이전에 가장 극심하게 마련이다. 대한민국 독립 이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의 토지 문제는 불공정의 절정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소작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자기 노동으로 얻은 산물의 상당량을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지주에게 가져다 바치면서도 당연한 줄만 알았다. 그러면서도 지주님과 나랏님에게 마음을 다했다.
한국 최초의 대하소설 작가로 꼽히는 박경리가 대표작 제목을 <토지>로 지은 데는 이런 인식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까지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부를 쌓아올린 지주 최씨 일가를 중심으로 약 한 세기에 걸친 이야기를 담아낸 소설 이야기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친 최씨 일가 서사에서 중심에 선 인물은 단연 최서희다. 재산을 노린 악당들에게 비명에 살해당한 최치수의 딸로, 대가 끊긴 최씨 일가의 마지막 적통이다. 먼 친척에게 전 재산을 강탈당한 최서희는 따르는 하인과 소작농들을 이끌고 먼 간도 땅으로 건너가 재기에 성공한다.
최서희가 재기한 비결은 투기에 있다. 러시아와 일본이 자웅을 겨루는 전란의 시기, 콩과 같은 농작물을 사재기하고 개발되지 않은 간도 용정 땅 요지를 사들여 비싸게 팔아 부를 이룩했다. 그렇게 얻은 부를 바탕으로 일본 고위층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얻은 부로 최서희는 잃어버린 고향 땅을 모조리 사들인다.
긴 시간적 배경을 둔 작품답게 소설은 여러 대에 걸쳐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다룬다. 총 5부의 방대한 분량 가운데 인물들은 나고 살아가다 죽어가며 다시 새로운 인물이 그 자리를 채운다. 기약 없이 새로운 사건이 터지고 시대는 변화한다. 모든 사건 뒤에 끝내 남는 것은 결국 토지뿐이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 간 박경리가 주목한 건 땅 그 자체였다. 사람은 살다 죽고 잊히는 데 토지만은 그대로 남아서 삶의 근간이 된다. 서희는 제가 가진 땅에서 난 양식으로 의병을 도왔고, 피난민을 후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땅 그 자체는 지켜내려 한다.
흥미로운 건 그간 영화와 드라마로 영상화 된 <토지>가 각 시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1974년 제작된 동명 영화와 1979년 방영된 동명 드라마에선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가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배우 김지미가 최서희 역을 맡은 1974년작 영화에선 '불로소득을 올리는 지주 대신 직접 노동하는 소작인들에게 땅과 곡식이 돌아가야 한다'는 서희의 주장이 나온다. 1979년 드라마에서는 소작세를 두고 지주인 최씨 일가와 소작인들이 갈등을 벌이는 내용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반면 1987년과 2005년 방영된 드라마 <토지>에선 이와 같은 내용이 약화되거나 사라졌다. 2005년 드라마의 결말에서 서희가 마을사람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내용이 나오긴 하지만 이야기 전반에선 실제 노동하는 자와 토지소유주 사이의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소설이 처음 나온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토지>를 소화한 방식은 한국에서 부동산을 바라보는 시각과도 연결돼 있다. 1970년 한국보다 2020년 한국에서 토지불평등은 더욱 심화됐지만, 문제의식은 훨씬 작아진 듯 보인다. 불로소득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경제정의에 대한 인식은 언론지상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반면 '건물주'는 초등학생들에게 선망하는 직업이 된 지 오래다.
각종 경제지표는 한국사회의 부동산과 그로 인한 이익이 극소수에게 쏠리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남기업 등이 진행한 '부동산과 불평등 그리고 국토보유세' 연구에선 2013년 기준 개인 토지 소유자 상위 1%가 전체 개인 소유지의 26%(상위 10%는 65% 보유)를, 법인 토지 소유자 상위 1%가 전체 법인 소유지의 75%를 가졌다고 분석했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2018년 경제정의실천연합이 국세청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상위 1% 다주택자가 보유한 주택은 2007년 37만 채에서 2017년 94만 채로 크게 늘었다. 2017년 기준 상위 1%의 1인당 연간 부동산임대소득은 3억4000만원이 넘는다.
하지만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갈수록 적어진다. 2018년 프랑스 정부의 유류세 인상 조치에서 촉발돼 전 유럽에서 경제불평등 심화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로까지 확대된 노란조끼 운동, 2011년 미국에서 금융자본의 탐욕과 경제불평등 심화를 지적한 월가점령 시위 등이 있었지만 한국에선 이와 비슷한 규모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다.
최근 화제를 모은 조세저항 시위와 부동산 규제 규탄집회 등을 보며 가만히 생각해본다. 2020년 오늘, <토지>가 다시 한 번 영상화 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지를. 원작 소설보다 더 적극적으로 불로소득의 문제를 전면으로 끌어낸 1970년대 작품들은 얼마만큼 용감했던 것인지를. 그리고 우리는 과연 흐른 시간만큼 진보해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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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님의 인생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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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감독 이은혜와 마주 앉은 일이 있다. 그는 영화제가 끝나면 곧 출국할 예정이라 했는데, 한국에선 결혼을 할 수가 없는 때문이라 했다. 동성 간 결혼을 한국은 막고, 미국은 허용한단 이야기. 그러고보면 몇년 전 그런 뉴스를 접한 것도 같았다.
2015년 미국 연방 대법원 결정으로 50개 주 모두에서 합법화된 동성결혼 이야기를 나는 저기 케냐 북부 자연보호구역에서 기린 개체수가 급감한다는 사실처럼 여겼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테니까. 그러나 가까운 이들마저, 존중하고 존경하는 이들까지도 동성애에 혐오를 감추지 않으니 나는 이것이 더는 내 문제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혐오가 인간을 잠식하는 비결이 무지와 무관심, 쫄보근성에 있단 걸 알기에 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레즈비언도 산부인과도 관심 없는 내게 이 또한 사람과 병원의 이야기란 걸 알게 해줬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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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의 일기장을 구했대도 이따위로 써놨다면 고이 덮으리. 나의 사랑이 부족하다 힐난한다면 그 사랑마저 반납하리. 책장을 건너 사랑을 이루기엔 내 인내심이 턱없이 박약하니.
당대 사교계가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가를 들춘다. 문제는 독자로 하여금 그 의미없음을 모자란 인물의 관점에 갇혀 동행토록 한다는 것. 전권에 걸쳐 독자는 이 덜떨어진 놈이 후회하는 일생을 그 시야에 갇힌 채 함께 걸어야 한다. 오로지 가석방 없는 12년 형을 받고 비좁은 감방 2인실에 경멸하는 인간과 함께 갇혔다 만기출소한 이만이 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나이 먹어 시든 여자와 타고 나길 못난 여자를 향한, 또 멍청해 재미 없는 남자와 성공 못해 돈 없는 남자에 대한 모욕적 묘사가 많다. 찾아가 한 따까리 하고 싶은데 일방적으로 들어야 한다. 심지어 품위 있는 척 쓰는 꼴은 참아내질 못하겠다.
드디어 디뎠다. 문학의 바닥을.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1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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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간 9편의 영화를 내놓고 은퇴한 벨라 타르다. 타르의 세계를 구성한 작품들은 슬로우시네마의 거장이란 평가와 함께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독자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했다. <사탄탱고>는 <토리노의 말>과 함께 타르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며, 그 지루함과 난해함에 있어 악명이 자자한 작품. 러닝타임 내내 졸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시네필임이 검증된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실린 글은 벨라 타르의 특징들, 이를테면 롱 쇼트의 적극적 활용, 시간과 날씨를 그대로 반영하는 선택, 관객의 의식을 프레임 바깥으로 확장케 하는 연출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영화를 찍는다는 행위가 벨라 타르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케 하고, 그가 그를 어떻게 감당했는지를 확인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벨라 타르가 영화예술계, 나아가 관객에게 어떤 가치를 갖는지를 사유하게끔 이끈다. 한국 유일 벨라 타르, 또 <사탄 탱고>의 입문서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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