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식 축산체계의 부정적 측면을 일깨우고, 채식의 필요를 말한다. 한국인, 나아가 세계인들이 공장식 축산이란 폭력적 체계로부터 필요 이상의 육류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있음을 내보이려 한다. 돼지를 사육하는 한국의 농장들을 찾아 그 실태를 살핌으로써 소비자가 알지 못하는 진실이 있음을 일깨우려 든다. 다분히 계몽적인 태도로 제가 본 것과 믿는 것을 써나가는 작가의 심정을 생각한다.
평생을 육식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 나 역시 상당부분 그의 인식에 동의할 밖에 없다. 그건 한국의 축산체계가 지나칠 만큼 폭력적인 대규모 공장식 축산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며, 이것이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이 같은 체계가 자연의 균형을 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돈과 효율만을 쫓는 산업은 기형적인 양계장과 축사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를 너무 많은 질병이 있었고, 그로부터 역시 폭력적인 너무 많은 살처분이 이뤄졌다.
책은 한 축산업체 공장을 찾은 뒤 그와 같은 현실을 눈앞에서 보여주면 사람들이 육식을 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말한 장면이 아닌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면 육식을 하지 않기로 하는 이가 꽤 될 것이라고 여긴다. 다름 아닌 살처분이다.
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군인과 공무원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살해하는 일에 내몰리는 현실은 한국사회에 실재하는 비극이자 매트릭스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 같은 진실에 닿지 못한 채 제가 눈감고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채식을 하는 이들과 문제를 알리는 이들을 도리어 조롱하기까지 한다. 스스로 고기를 먹는 삶을 선택해 살아가는 나조차도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이와 같은 장면을 나는 몇차례 씩이나 눈앞에서 목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대로 좋은가. 이 모든 죄악을 죄악인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 그건 정말이지 틀려먹은 태도가 아닌가. 우리는 선한 인간이거나 적어도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악당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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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병폐가 긍정의 과잉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타인으로부터의 강제가 아닌, 스스로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통하여 끝나지 않는 고통을 받고 마는 것이 긍정의 과잉이 보이는 병폐란 것이다. 책에 따르면 지난시대는 국가며 사회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던 규율시대였고, 생산성의 한계와 직면하여서 오늘날엔 성과시대로 옮겨온 상태다. 복종하기만 하는 이보다는 스스로가 자유롭다 믿는 이의 생산성이 좋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자기주도적 삶을 살고 진정한 자신이 되라는 신화를 통하여서 사회는 개인에게 교묘한 방식으로 성과를 압박한다. 성과시대의 개인은 규율시대의 복종주체가 아닌 성과주체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저 자신을 채찍질해 끝없는 성취를 향하여 저를 몰아세운다. 이로부터 저자는 할 수 있음으로부터 고통 받는 개인을 이 시대의 인간적 전형으로 추출해낸다.
단점이 없는 저술인 건 아니다. 철학과 생명과학이라는 이질적 체계를 상호작용하는 무엇으로 대하며 도입하는 첫 장은 마케팅적으로는 효과를 발휘했을지라도 타 분야에 대한 저자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항생제의 발명으로 박테리아며 바이러스의 시대가 끝났다는 주장이 무색하게도 10년 뒤 전 세계를 코로나19가 휩쓸었다. 과학의 발달에도 인류가 정복한 바이러스는 천연두 단 한 가지에 불과하다. 미시의 세계는 인간의 오만을 거듭 몰아치고 있다. 저자가 글을 쓸 당시에도 가축관련 전염병의 창궐이며 인수공통전염병의 위협, 균에 시달리는 식물의 멸종이 극심한 시기였다. 저자가 이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면역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서로 다른 두 학문이 데칼코마니 수준의 상호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을 테다.
뿐만 아니다. 저자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제 논리로 주장을 충실히 보충하는 대신 여러 학자의 이름과 문장을 가져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이중 대다수가 철학계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이며, 그들의 주장 중에선 책에서 인용된 것과 달리 볼 수 있는 부분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라며 사색과 멈춤의 상징처럼 제시되는 니체에게서 모험과 역동성과 진취성과 엄격함과 혹독함에 대한 숭상 같은 요소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이름의 인용으로 독자를 윽박지르는 서술 대신에 보다 친근하고 차분한 전개를 이루었다면 이 책이 더 많은 이에게 호응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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