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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주의 외

나쓰메 소세키 지음
책세상 펴냄

도쿄대학에서의 강의를 정리한 <문학론> 서문과 관서지방 순회강연 강연록, 학습원에서의 강연, 그리고 죽기 직전인 1916년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점두록>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작품은 한국에 많이 나와 있지만 그의 생각을 보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글은 찾기 어렵기에 이 책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일본 작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소세키의 식견과 통찰은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준이라 놀랐다. 군국주의가 상식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개인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한 <나의 개인주의>나 나름의 방식으로 일본의 개화를 설명한 <현대 일본의 개화>,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주제여서 더욱 흥미로웠던 <내용과 형식>, 낭만주의 문학과 자연주의 문학의 성쇠를 통해 문예와 도덕의 관계를 설명한 <문예와 도덕>, 그리고 여러 소재를 통해 1차대전과 군국주의를 논평한 <점두록> 등 실려 있는 글 모두가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물론 <점두록>의 일부 대목에선 공감하기 어려운 시각도 있었다. 수단과 목적의 경우 수단을 목적 이하의 개념으로 저급하게 치부하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수단과 목적을 <내용과 형식>에서의 형식과 내용으로 확장해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 듯한데, 그렇다면 수단이 목적보다 저급하다는 주장은 자기모순이 아닌가.

그러나 이 같은 단점은 다분히 지엽적일 뿐이어서 전체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독서였다. 특히 당대 지배적 패러다임과 상충하는 사고를 자유롭게 전개하는 열린 사고력과 용기 만큼은 본받고 싶을 정도였다. 군국주의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행하는 만행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제국주의 시대 일본인으로 군국주의를 정면에서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 사상 전체를 폄훼하는 건 가혹하지 않은가 싶다.

좋은 글이었고 좋은 독서였으며 좋은 만남이었다.

-마음에 드는 부분

여러분은 앞으로 모두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합니다. 그러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릴 분도 있을 것이고 곧장 사회에 진출해 활동하실 분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내가 한 차례 경험한 번민(가령 종류는 달라도)을 반복할 경향이 많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나처럼 어딘가로 돌파해나가고 싶어도 돌파할 수 없고, 뭔가 움켜쥐고 싶어도 대머리를 만지듯 미끈미끈해서 답답해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이미 자력으로 길을 개척한 분이 있다면 예외이고, 또 다른 사람 뒤를 따라서 그것으로 만족하며 이미 있는 옛길로 나아가는 사람도 나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안심과 자신감을 확실히 수반한 경우라면) 혹시 그렇지 않다면 아무래도 한번 자신의 곡괭이로 팔 수 있는 곳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만약 팔 수 있는 곳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평생 불유쾌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회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점을 역설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 때문이지 나를 모범으로 삼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의 개인주의>, 56p

원래 의무를 수반하지 않는 권력이라는 형태가 세상에 있을리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높은 단상 위에서 여러분을 내려다보며 1시간이나 2시간 동안 내가 말하는 것을 정숙하게 듣기를 요구할 권리를 보유한 이상, 내 쪽에서도 여러분을 정숙하게 할 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령 평범한 강연을 한다고 할지라도 나의 태도나 모습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의를 갖추게 할 만큼의 인성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단지 "나는 손님이고 여러분은 주인입니다. 그러니 얌전하게 굴어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것은 형식적인 예절에 그치는 것으로 정신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 말하지면 인습과 같은 형태이므로 전연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본다면, 여러분은 교실에서 때때로 선생님께 꾸중을 듣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꾸중만 하는 선생님이 있다고 한다면 그 선생님은 수업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꾸중하는 대신 혼신의 힘을 다해 지도해주어야 합니다. 꾸중할 권리를 갖는 선생님은 가르칠 의무도 지니고 있을 것이므로 선생님은 규율을 가다듬기 위해,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권리를 충분히 행사할 것입니다. 대신 그 권리와 분리할 수 없는 의무도 다하지 않으면 교사의 직분을 수행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금력도 똑같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금력가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금전이라는 것은 지극히 보배로운 것으로 무엇에라도 자유자재로 통용됩니다. 예컨대 내가 여기에서 투기를 해서 10만 엔을 벌었다면 그 10만 엔으로 가옥을 세울 수도 있고, 책을 살 수도 있고, 화류계를 흔드는 일도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형태로라도 변화시켜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금력을 인간의 정신을 사는 수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끔찍하지 않습니까? 즉 그것을 휘둘러 인간의 덕의심을 사서 독점하는, 이를테면 그 사람의 혼을 추락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투기로 번 돈이 덕의적, 윤리적으로 커다란 위력을 가지고 작용한다면 적당치 못한 응용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돈이 그렇게 활동하는 이상은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돈을 소유한 사람이 상당한 덕의심을 지니고 그것을 덕의상 해가 없도록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 외에 인간의 마음속 부패를 막을 길은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금력은 반드시 책임이 수반되어 융통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정도로 부자니까 이것을 이런 방면에 이렇게 사용하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고, 저 사회에 저렇게 사용하면 저런 영향이 미친다고 납득할 만한 견식을 양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견식에 따라 책임을 지고 우리의 부를 조치하지 않으면 사회에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자기 자신에게도 미안해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개인주의> 중에서.
2024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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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의 이십대는 우울과 슬픔과 분노로 가득했다고 전한다. 심리상담을 받고 병원을 다니기도 했으나 꾸준하진 않았다. 서른이 넘고 삶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야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정감이며 무덤덤한 마음을 얻는다. 처방받은 약을 먹고 가사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창작 활동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 창작자의 삶이라 해도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하지만 한 편으로 그 삶 가운데서 곡이 태어나는 것이다.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는 곡이.

책은 매 장마다 애리의 노래가 태어난 배경을 적는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 곡의 가사와 함께 곡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QR코드까지 삽입해 놓았다. 말하자면 곡과 에세이의 기묘한 결합이다.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닌 음악가의 글인지라 조금 정돈되지 않고 감성에 따라 마구 나아가는 듯한 인상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특정한 곡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만큼, 읽는 이는 음악과 삶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겠다.

수많은 내가 다른 곳에 살고

애리 지음
편않 펴냄

1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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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인 감상을 절로 일으키는 그림체 위로 들어찬 글은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세계, 그 순환을 비춘다. 그러나 순환과 재생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닿음,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지식으로는 닿지 못한 연결성을 내보인다.

이야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이세 히데코의 책은 그림책이 그저 십분이면 후딱 넘기게 되는 애들 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만든다. 짧게 보아도 오래도록 생각나는 장면, 그런 순간을 선사한다. 삶에 쉼표를 찍고 물음표를 남긴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와 물음표, 그것이 그림책의 역할이 아닐까. 사색이 귀해진 시대, 여백을 채우는 온갖 콘텐츠들 사이로 그림책을 찾는 이들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알겠다. 이따금 그림책을 펼칠 기회를 가져봐도 좋겠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김소연 지음
천개의바람 펴냄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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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버린 희우와 이유를 모른 채 남겨졌던 주인공의 멈춰진 삶이 수십 년 만에 만나 움직이게 되는 이야기다. 다가선 죽음 앞에서 용기를 낸 그들이 제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을 힘껏 껴안고 나아간다. 길, 이편에서 저편으로 나아가는 좁은 문이 그들 사이에서 명멸한다.

<길, 저쪽>은 예술로써 전해지는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사진으로, 희우는 글로써, 또 희우의 뒤에 만난 건축가는 건축으로써 이야기한다. 각자의 작품이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작품으로써 저의 고난과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전한다. 예술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어 서로를 만나고 이해하게 한다. 마침내 그로써 각자의 예술 또한 이편에서 저편으로 넘어서는 순간을 맞이한다.

1986년 태어난 나의 평안한 삶 가운데, 1986년 수레바퀴 아래 깔려 부러지고 이지러진 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음을 실감한다. 역사의 발전과 희생의 가치를 믿는 이들의 수고로움을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모두가 정찬의 소설 <길, 저쪽>이 이뤄낸 아름다움이다.

길, 저쪽

정찬 지음
창비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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