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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레리뇽 고원 (선함의 뿌리를 찾아서)의 표지 이미지

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생각의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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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밀고 당김의 연속이네, 자넨 이것이 되고 싶지만 다른 것을 해야만 하자. 이런 것이 자네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자넨 너무나 잘 알아. 또 어떤 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자. 그걸 당연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야. 밀고 당김의 긴장은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과 비슷해.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중간에서 살지”

”무슨 레슬링 경기 같네요.”

”레슬링 경기라… 그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묘사해도 좋겠지.”

교수님은 웃음을 터뜨린다.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공감한다 내 인생도 레슬링 경기 같다. 내 우측 홍코너에는 모리 교수가 말하는 사회의 통념과 커리어 그리고 돈이 있다. 좌측 청코너에는 모리가 말한 삶의 핵심(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삶의 골수) 그리고 기여가 있다.

어른이 되고 사회에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홍코너의 힘은 강해졌다. 청코너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으로 인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홍코너에게 짓눌려 가려진 청코너의 존재를 거의 잊을 뻔했다. 그러다가 4년전 우연히 독서모임을 만났다. 그 후 다양한 책을 읽고 대화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짓눌려있던 청코너가 조금씩 꿈틀댔다. 도약하기 위해 호흡을 갈무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매달 모임에 나갈 때마다 청코너에 힘이 보태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홍코너를 밀어내며 조금씩 일어섰다. 2년이 흘렀다. 마침내 청코너는 우뚝 섰고 그 기세를 몰아 홍코너를 누르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됐다. 나는 그렇게 퇴사를 하고 백수가 됐다. 1년 정도의 기간을 잡아 독서에 집중하고 생각하기 위해서 말이다.

1년의 시간동안 다양한 작가들이 청코너에게 응원의 말을 해주고 지나갔다. 이제 청코너의 힘이 너무 강해져 오히려 홍코너를 짓눌려 버렸다. 나는 돈과 소비를 어느정도는 증오하기 시작했고. 돈버는 일에 열심히인 사람들을 사회의 노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책들이 청코너에만 힘을 실어준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중용을 얘기하며 청코너와 홍코너 모두를 격려해 주었다.

백수의 기간이 지나 다시 일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홍코너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청코너를 짓눌러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청코너가 너무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일과 삶 그 조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홍코너와 청코너는 균형 있게 합을 주고받으며 즐기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레슬링이 아닌 왈츠를 추는 것 처럼 보인다. 이제 누가 우세하냐 열세하냐 아니라, 어느쪽이 리드하냐로 느낌이 바뀌어가고 있다.

앞으로 내 삶은 균형을 유지하되 청코너가 리드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난 계속 독서모임에 참여할 것이다. 청코너에게 사랑을 주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언제 다시 홍코너가 주도권을 잡을지 모른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살림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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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nik

# 비옥한 사랑

선함의 뿌리를 찾아가 보니 ‘사랑’이란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고 있다.

선함의 열매는 땅에 떨어져 ‘사랑’이란 토양을 더욱 비옥하게 만든다.

더욱 비옥해진 토양에서 선함이란 나무는 더 잘 자란다.

이렇게 선함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오래도록 말이다.

선함의 나무는 군집을 이뤘다. 서로의 뿌리가 엉켜 사랑을 주고받는다.

사랑의 토양을 함께 가꾸고 함께 열매를 맺는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이 선한 나무 군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토양에는 울타리가 없어요. 누구든 들어와 뿌리를 내려요. 아주 비옥하답니다. 함께 가꿔 가요”

살던 곳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이 소식들 듣고 몰려와 뿌리를 내린다.

선하지 않던 나무도 ‘사랑’의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으니 선한 나무로 변한다.

새로온 나무 중에는 어린 나무들도 있다.

어른 나무들이 가지를 한껏 펼쳐 무자비한 벌목꾼들이 볼 수 없게 가려준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아주 가끔은 토양을 더럽히는 나무가 들어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무를 거르고자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모두를 불신하느니 모두를 신뢰하고 가끔 상처받는 편이 낫다.

믿음을 가지고 울타리를 열어놓아야 한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생각의힘 펴냄

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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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적 진화의 극치! 오픈소스

WEIRD 심리와 그에 따른 문화적 진화가 극단으로 효율화 되어 있는 곳은 바로 오픈소스(open source)라고 생각한다. 오픈소스는 말 그대로 공개된 프로그래밍 코드(소스)이다.

1993년 이전에는 운영체제 같은 프로그램들은 모두 특정 회사나 대학교 연구실에서 개발됐다.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완성된 결과물만 받아서 사용했지, 프로그램의 코드를 직접 볼 수 없었다. 마치 우리가 냉장고를 구매할 때 냉장고 설계도는 받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프로그램 코드들은 각 공동체 내에서만 수정됐으며 그렇기에 발전 속도가 더뎠다. 대표적으로 운영체제 UNIX 가 있다. 상용으로 팔리고 있었고, 돈을 받고 팔아야 하기에 당연히 설계도를 공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3년 핀란드 청년 리누스 토발즈에 의해 LINUX 라는 운영체제가 세상에 나온다. LINUX 는 UNIX 와 정반대의 전략을 취했다. 설계도를 누구나 볼 수 있고 수정도 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 그리고 당연히 무료였다. 전 세계의 수백 수천 명의 개발자들이 달려들어 코드를 함께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기성 개발자들은 의심했다. 본디 운영체제 개발이란 소수의 전문가가 코드를 꼼꼼하게 잘 설계해야 하는데, 지리적으로도 떨어진 수천명의 난잡한 기여로 고품질의 운영체제를 만들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엄청난 품질의 운영체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소수의 천재들이 30년 동안 만들어왔던 UNIX 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수천 명의 개발자가 수년 동안 만든 LINUX 에게 밀렸다. 이 수천 명 중에는 아마추어와 학생들도 많았을 것이다. 집단지성이 극도로 발휘된 것이다. 지금도 여러분이 사용하는 웹과 앱의 서버는 상당수 LINUX 에서 돌아가고 있다. LINUX 가 바로 오픈소스의 첫 성공 사례이며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LINUX의 성공 이후로 오픈소스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인터넷에 코드를 공개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현재는 사실 오픈소스 위에 IT 기술이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이 알려진 프로그래밍 언어들과 인프라 기술은 대부분 오픈소스이다. 그리고 그 기술들로 우리가 사용하는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Python 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도 오픈소스인데 나는 이 언어의 코드를 바꾸자는 제안을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오픈소스는 항상 열려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코드 변경을 할 수 있다. 내가 제안한 것이 python 관리자들에게 승인된다면, 나는 전 세계 프로그램의 기반이 되는 기술에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16세기에 유럽 편지공화국에서 서로 생각에 대한 기여를 하고 명망을 얻었던 것 처럼. 오픈소스에 기여한 개발자도 명망을 얻는다.

2005년에 코드 버전 관리 도구 Git 그리고 2008년에는 Git 호스팅 서비스 GitHub이 나오면서 오픈소스는 문화적 진화의 효율을 극단으로 끌어올리게 된다. 코드의 모든 변경 사항이 기록되어 코드 한줄 한줄의 히스토리를 전부 추적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이전에도 코드 버전 관리 도구는 있었지만 git 만큼 좋지 않았다). 누가 언제 어디를 수정 했는지도 알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문화적 진화에서 누가 어떻게 얼마나 기여했는지 판단하는 게 항상 문제였다. 기여도의 경계선이 굉장히 모호했고, 누군가 기여를 가로챌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픈소스는 누가 언제 무엇을 기여했는지 데이터로 남기 때문에 너무도 명료해진다. 탈취당할 걱정 없이 마음 놓고 기여할 수 있게 됐다. 한마디로 내가 기여한 만큼의 명망이 보장된다는 말이고. 이것은 재능 기여를 더욱 유도한다.

저자 조지프 헨릭은 문화적 진화의 중요한 요인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는 정신을 몰두하는 인구가 많을수록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LINUX 의 사례로 설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세대를 뛰어넘는 개인들의 상호연결이 더 확대될수록 문화적 진화가 빨라진다고 한다. 이것도 오픈소스에서 볼 수 있다. 자신 이전에 코드를 수정한 사람뿐만 아니라, 이 프로젝트가 처음 생성될 때 부터의 모든 변경 사항을 다 볼 수 있다. 이전 세대의 입과 행동을 타고 내려와 알게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정말 과거 코드에 가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2008년부터 시작된 오픈소스라면 내가 22년 전에 코드를 수정한 사람의 기록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다(중간 전달자 없이). 모든 히스토리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문화적 진화를 가속화한다.

오픈소스는 내가 아는 한 가장 WEIRD 하게 느껴진다. 통계를 알지 못하지만 전 세계 오픈소스 활동 분포를 조사한다면, 아마 WEIRD 심리가 강한 사회가 더 활동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처음 오픈소스를 시작한 LINUX의 아버지 리누스 토발즈도 북유럽 사람이었다. 결국 오픈소스 문화라는 씨앗도 WEIRD 라는 토양이 있었기에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위어드

조지프 헨릭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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