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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굴의 눈

조선희 지음
네오픽션 펴냄

미래의 일은 모르고 있는 것이 정상이다. 닥치면 극복해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부굴의 눈>이라는 유능한 수단이 생기고 나서부터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사는 벅찬 삶을 택했다. 모두가 선택하기에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해른은 그 선택을 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를 보는 순간 그 미래가 결정된다. 미래를 모르는 것이 답답하다고 임의로 선택해버리는 것은 다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여전히 부굴과 같은 인공지능에게 자신의 문제를 상담하고 미래를 봐달라고 한다. 그들에게 위로를 구하고 충고를 듣는다. 누군가 한 소리 하려 하면 당신은 말한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내 인생이야. 당신의 인생은 과연 당신의 의지만으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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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에 나는 결혼을 했다. 여름 휴가 때 혼자서 여행을 하다가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시골길을 거닐고 있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퍼부어, 비를 피하려고 뛰어든 곳에, 때마침 그녀와 그녀의 여자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세사람은 모두 흠뻑 젖어 있었고, 그런 허물없는 분위기에서 비가 그칠 때까지 이런저런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가까워졌다. 만일 그곳에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때 내가 우산을 가지고 있었더라면(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호텔에서 나올 때 우산을 가지고 갈까 말까 하고 꽤 망설였으니까) 나는 그녀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녀와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도 교과서 회사에 근무하면서, 밤이 되면 홀로 아파트 방 벽에 기대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사람은 참으로 한정된 가능성 속에서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녀와 함께했던 선명한 기억은 내게 잠들지 못하는 밤을 안겨다 주었다. 한밤중 두세 시에 눈을 뜨곤 그대로 잠들지 못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침대에서 나와 부엌으로 가서 위스키를 잔에 따라 마셨다. 창밖으로 어두운 묘지와 그 아래로 난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술잔을 손에 들고 나는 그런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밤중과 새벽을 잇는 그 시간은 길고 어두웠다. 울 수 있다면 편안해질 텐데 하는 생각을 할 때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울어야 좋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누구를 위해서 울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타인을 위해서 울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나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이었고, 나 자신을 위해 울기에는 너무 나이 들어 있었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은이), 임홍빈 (옮긴이) 지음
문학사상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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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에는 시립 수영장으로 가서 가볍게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냉방이 잘 된 커피숍에서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방으로 돌아와 텐 이얼즈 애프터의 오래된 레코드를 들으며 석 장의 셔츠를 다림질했다. 다림질을 마치고 바겐세일 때 산 값싼 화이트와인을 페리에와 섞어 마시고 비디오로 녹화해둔 축구 시합을 보았다. '나라면 저런 패스는 하지 않을 텐데' 하는 패스가 눈에 띄면 그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모르는 타인의 실수를 비판하는 것은 쉽고도 기분좋은 일이다.

"......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멀리서 보면, 그것은 유성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수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타버려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내가 아직 젊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어요.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즐거운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이상한 이야기.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니까 이제는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어요. 누구 한 사람도. 남편도, 아이도, 친구도......모두. 세상에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끔씩 내 몸이 반대쪽까지 훤히 비쳐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각자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치명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렸다 해도, 아무리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 해도, 또는 겉면에 한 장의 피부만 남긴 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버렸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묵묵히 삶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뻗어 정해진 양의 시간을 끌어모아 그대로 뒤로 보낼 수 있다. 일상적인 반복 작업으로서 -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솜씨 있게.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매우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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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분명히 오늘보다 더 괴로울 것이다. 모레는 내일보다 더 괴롭다. 살면 살수록 괴로움만 더해갈 것이다. 힘들면 도망가도 된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럼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 걸까. 도망갈 곳이 없어서 힘든 거 아닐까?

어른들은 다 안다는 듯 거만하게 허울 좋은 말만 한다.
밝아오지 않는 밤은 없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준다, 힘들면 도망쳐도 된다. 밝고 긍정적인 노래를 부르듯 현실과 동떨어진 말을 의기양양한 얼굴로 한다. 아무것도 몰라서다. 남 일이니까 그러는 것이다. 밝아오지 않는 밤은 있고, 감당할 수 없는 일도 있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곳이 없다. 오래 살았으면서도 그런 것도 모르는 건 자기밖에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마사키 도시카 지음
모로 펴냄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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