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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그날 오후에는 시립 수영장으로 가서 가볍게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냉방이 잘 된 커피숍에서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방으로 돌아와 텐 이얼즈 애프터의 오래된 레코드를 들으며 석 장의 셔츠를 다림질했다. 다림질을 마치고 바겐세일 때 산 값싼 화이트와인을 페리에와 섞어 마시고 비디오로 녹화해둔 축구 시합을 보았다. '나라면 저런 패스는 하지 않을 텐데' 하는 패스가 눈에 띄면 그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모르는 타인의 실수를 비판하는 것은 쉽고도 기분좋은 일이다.

"......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멀리서 보면, 그것은 유성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수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타버려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내가 아직 젊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어요.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즐거운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이상한 이야기.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니까 이제는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어요. 누구 한 사람도. 남편도, 아이도, 친구도......모두. 세상에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끔씩 내 몸이 반대쪽까지 훤히 비쳐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각자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치명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렸다 해도, 아무리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 해도, 또는 겉면에 한 장의 피부만 남긴 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버렸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묵묵히 삶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뻗어 정해진 양의 시간을 끌어모아 그대로 뒤로 보낼 수 있다. 일상적인 반복 작업으로서 -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솜씨 있게.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매우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2024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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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래빗홀 펴냄

읽었어요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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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난다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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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문

@yiseomoon

"아, 나 이분이 하시던 빵집 아는데."
매지가 탄식했다.
"깜빠뉴가 맛있는 집이었어. 안에 마른 과일이 콕콕 들어 있는. 다른 직원 없이 혼자 하셔서 힘들 것 같긴 했지만...... 가게를 옮기거나 잠시 쉬려고 닫은 줄 알았어. 돌아가신 줄은 몰랐네."
"회사에 속해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죽는구나. 뭐가 그 사람들을 몰아붙인 거지?"
규진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생계?"
매지가 약간 쏘아붙이듯이 대답했다.
"회사는 악독하지만, 어떨 때는 갑옷이기도 하잖아. 조직 밖의 사람들은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혼자 세상이랑 싸운다고."
그건 아마 매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었다. 매지는 공연을 하기 위해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입시무용학원에서 일해야 했다. 작업과 생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곁에서 보기에도 어려워 보였다. 한번은 발목을 다쳐서 강사 자리를 잃은 적도 있었는데, 후유증이 남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장기적인 문제가 되었더라면 큰일이었을 것이다.

"근데 이렇게까지 다 없앨 필요 있나? 혼자 살아도 필요한 물건이지 않아?"
지원이 물었다. 그 물음에 불안해진 네 사람이 동시에 이재를 쳐다보았다.
"사실은...... 내가 보여줄 게 있어."
이재는 친구들을 지하주차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곤 아주 작은 캠핑 카라반 앞에 섰다. 카라반은 아직 차에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거짓말, 하고 아영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했다.
"이걸 끌고 어디로 가게?"
"일단 좀 다녀보게."
친구들은 드디어 이재가 이혼의 충격을 드러내는구나 생각했다.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라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성린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지 않을까?"
경윤이 너무 염려를 담아 말하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야, 여자는 어디서나 위험해. 어떻게 살아도 항상 위험해."
성린이 이재 대신 대답했다.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창비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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