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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작가정신 펴냄

145. 서로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부분이 발견될 때면 논쟁을 하는 데도, 화해하는 데도 다소 시간이 걸렸다. 채이의 친구들과 형은의 친구들은 같은 자리에 함께할 수 없는 관계였다.

여성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관점이 다르고 진영이 달랐다. 몇 번인가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서로 소개하고 세미나 비슷한 것을 열어보려다 실패한 뒤로 채이와 형은은 오랜 적대를 쌓아온 두 국가의 수장들처럼 피로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말하곤 했다. 이건 우리 힘으로 안 되나 봐.

🌱어쩌면 안 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형은은 말했다. 서로 가려는 방향이 전혀 다른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닌데, 억지로 함께 가자면서 차이를 뭉개버리는 게 옳아? 우리는 자기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당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하자는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자꾸 머리를 눌러 짜부라뜨리려는 손이 있는데 어떻게 그 손을 잡아?

하지만 ✔️만나서 얘기하지 않으면 영원히 평행선이잖아, 채이는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말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걸까? 의제 하나에 쌍둥이처럼 집회가 두 개씩, 그것도 동시에 열리는 게 너는 바람직해 보여? 나는 부조리 해 보이는데. ✔️언제까지나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살면 어떻게 발전을 하지? 우리는 서로의 대립항이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잖아. 우리가 가진 공통점은 왜 중요하지 않아?

147. 형은의 다름이 채이를 화나게 하고 미움을 솟구치게 했다. 체온이, 함께한 시간이, 열이 내렸는지 보려고 서로의 이마를 짚어보던 밤의 기억이 있어서 그들은 가까스로 영원히 헤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들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어렵고 어색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보고, 이름을 말하고, 자기소개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나눠 갖기 시작할 수 있을까, 채이는 생각했다.

그들은 학점 걱정을 해야 했다. 생활비 걱정을 해야 했고,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어야 했고, 언제 다시 걸려올지 모르는 천의 협박 전화에 대비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내야 했다. 공부를 해야 했다. 🌿그들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세상에는 더 많았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종종 이런 대화를 나누며 아무런 보상도, 보상을 받고 싶다는 마음도 없이 아직 가보지 못한 어떤 시간과 장소들을 그려보았고 사람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들은 젊었고,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꿈이 그들에게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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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iju4k

250. 제 좌우명은 '위기를 기회로!'입니다.
부모님이 이혼 위기에 처해 계신데요, 그걸 이혼의 기회로 삼으시면 좋겠어요. 멸종위기종도 말이에요, 멸종의 기회를 잡아 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 저, 위기에 처한 거 아닙니다. 스탠드업 코미디 그만둘 기회입니다?

할머니가 치매예요. 근데 '치매'라고 하면 안 된대요. '어리석을 치'에 '어리석을 매'로, 부정적인 사회적 낙인을 야기한다고. 하여튼 저희 할머니는 치매예요. 치매 걸리기 전부터 치매였어요. 어리석고 어리석은 분이셨거든요. 저도 치매예요. 여러분도 다 치매고요.

잡종도 '잡종'이라고 하면 안 되고 '믹스견'이라고 해야 한대요. '잡종'의 어감이 좀 부정적이라나. 근데 잡종을 영어로 하면 '믹스 종'이잖아요. 이번에 본가 가서 엄마한테 잡채, 아니 믹스채 해 달라고 하려고요. 아, 이건 좀 유치했네요.

옆집 아저씨가 키우는 개가 믹스견인데 되게 예뻐요. 믹스가 잘 됐나봐요. 노래도 리믹스 버전이 월등히 좋을 때가 있잖아요. 믹스견은 참 신비로운 것 같아요. 그렇게 믹스가 되었다는 게. 왜냐하면 견종 간 차이가 어마어마하잖아요. 인종 간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죠. 도베르만과 시추의 차이를 보세요. 그렇게나 다른 존재들이 서로에게 끌렸다는 게 신비로워요. 걔네 눈에는 그렇게나 다르지 않은 걸 수도 있고요.

잘 붙어먹는 견종이 따로 있어요. 비글이랑 푸들, 말티즈랑 푸들 그리고 웰시코시랑 푸들. 그러니까 푸들이 안 그렇게 생겨 가지고 애가 색기가 좀 있나 봐요.

마음이 좀 불편해지는 조합도 있어요. 포메라니안이랑 시베리안 허스키. 이거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고 100프로 확신할 수 있어요? 견력형 성범죄일 가능성이 0은 아니라고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요. 사람은 잘 안 만나죠.

꽤 낙천적인 아이

원소윤 지음
민음사 펴냄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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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iju4k

170. "소리는 파동이라 사라지지 않는대."
🌱그는 그 앎에 의지하는 듯했다.

우리는 학교 운동장에 도착해 연두색 펜스에 등을 기댄 채 동이 틀 때까지 더 이야기했다. 그는 나와 계속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내가 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뭔지를 그가 이미 다 알고 있어서 나는 불안해졌다.

171. 사람이 저렇게나 많은데 나는 한 사람과 만났고 오래 이 야기했고 그럴 수 있어 기뻤다. 🌱동시에 두려웠다. 살아가는 데에 특별히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 되려 했는데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길 것 같았다.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긴 삶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런 고민을 하며 경기가 끝날 때까지 소리를 엿들었다.

꽤 낙천적인 아이

원소윤 지음
민음사 펴냄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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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iju4k

213. 만약 이 일을 그만두면 엄마는 이제 무슨 일을 하지?
로비를 거닐며 엄마의 걱정을 들어 주다 나는 속엣말을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되려나?"

엄마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꽤 낙천적인 아이

원소윤 지음
민음사 펴냄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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