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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내 부모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보잘것없는 나의 성이 있다. 혼자서 세상을 떠돌고, 그 만남에 관한 글을 쓰고, 방과 후 산책단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온통 여행으로 가득한 삶.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이제 무릎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나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닦으며 잔을 들었다. 싸울 거야, 이 무기력한 날들과 살아낼 거야. 엄마의 몫까지. 벌어진 상처 위로 눈물을 쏟으면서도 나는 앞으로 나가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p.134)
아침에 공원에 앉은 나를 누군가가 봤다면, 불안정한 상태라 생각하며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집을 두고 출근 한 시간 전 볕도 좋고 꽃도 좋은 공원에 앉아 『일단 떠나는 수밖에』를 펼쳐 들었다. 에세이 맛집 수오서재에, 김남희라니. 내가 감히 이 책을 방구석에서 읽을 수 없지. 마치 소풍을 하러 가듯 커피 한 잔, 책 한 권을 달랑달랑 들고 나섰던 나는 결국 화장기 하나 없는 말간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가야 했다. 울고 우느라 기미도 몇 개쯤 얻었을지 모르겠다. 언제나 안전한 것을 추구하는 내가, 어쩌면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서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다정함에 다가서는 삶을 배우고, 느끼고,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꼭꼭 씹어 내 방식으로 소화해본다.
『일단 떠나는 수밖에』를 내 식대로 정리하자면 “돌아갈 곳을 향하기에 여행”이라고 남겨두고 싶다. 유독 이번 책을 읽는 내내 그 마음이 들더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순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이들 사이에서 남겨진 문장들이지만 그녀는 그 시간들을 돌아, '지금'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너 장의 페이지만 남았을 때 문득, 어쩌면 여행이라는 자체가 돌아갈 곳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단어임을 깨닫고, 매일매일의 내게 돌아올 곳이 되어주는 가족이, 집이, 나의 공간, 또 하루를 어떻게든 보낸 나 자신이 사무치게 감사해졌다. 꼭 타인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에게 “이번에는 이런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어.”라며 오늘의 나를 정의하는 것. 때론 유치하고 때론 오글거리며, 때론 다소 모질지라도 매일매일의 “나”를 정리하는 것. 그것이 여행이 아닐까.
어떤 페이지를 읽으면서는 “나”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성소들 안에서 “너는 이대로도 괜찮다고, 최선을 다해 여기까지 오지 않았냐고 위로해주는 것 같은(p.162)” 느낌을 받았다는 그녀에게는 그 여행이, 그 걸음들이 퀘렌시아였을까. 이 작은 식탁에 앉아 가만히 책을 읽고 글씨를 쓰는 순간을 “가장 나답다”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삶은 너무 리듬이 없는 것일까.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다면 누군가 “네 삶이 재미없어 보여”라고 한대도 “오, 그래?”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남은 몰라도, 나는 가장 나다운 것이 무언인지 알아주어야지. 그녀 말대로 나도 뜨거운 삶이었음을, 뜨거운 삶임을 잊지 말아야지.
책을 덮고 난 지금도 가만히 여러 문장을 곱씹어본다. 어쩌면 원래 알았을지 모르지만, 깜깜한 밤이 되서야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붙여온 수많은 핑계, 변명들 아래의 숱한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봤다. 시간이 없어서, 워킹맘은 바빠서, 아직 아이가 어려서. 사실 그 핑계들의 대부분은 다른 선택지가 늘 존재했지만, 내가 답을 모르거나 애써 모른척했던 것이 더 많다. 늘 조급하고, 서툴고 여유 없는 내게 그녀의 문장은 꽤 밀도 높은 응원이 되었다. 날개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어 지금 당장 날아오지는 못해도, 적어도 녹슬지 않도록- 제자리에서라도 날갯짓해야지.
'안 한 일'을 '못한 일'로 덮어버리지는 말아야지. “세상은 성공, 완성 같은 단어로 이뤄진 게 아니라 실패, 미숙함, 불완전함 이런 단어로 구성되어 돌아가는(p.294)” 것이라고 조금 더 믿어봐야지.
“지구는 언제까지 내 여행을 허락해줄까? 산은, 바다는, 강은, 사막은 언제까지 내 걸음을 받아들여 줄까(p.262)”라는 그녀의 질문에 내가 산이나 받아 대신 “오래오래”라고 말해주고 싶어진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섬세하고도 편안한 문장들을 오래오래 읽을 수 있지 않겠나. 어떤 사람은 빙하를 보고 에어컨 온도를 높이고, 어떤 사람은 온난화의 심각성을 뉴스로 읽으며 에어컨 온도를 높인다. 그녀는 전자, 나는 후자에 가깝겠지만 서로의 실천은 모두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감히 나는 그녀에게 그 여행을 계속해달라고 남겨둔다. 그러면 그 문장들로 함께 실천하고 고민할 나같은 사람들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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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엄마곰님의 인생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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