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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걸까?
“나도 안 그려져 부영아, 난 그냥 과정이 재밌있어. 장면이 하나 있으면, 관객들은 쓱 보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그걸 쓸 때는 거기 들어갈 배경, 인물, 구도, 제스처, 대사 그런 걸 하나하나 상상하면서 다듬어가야 되거든. 빈칸을 메우듯이 친근하게 해나가는 그 과정이 난 좋아. 그러면서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게 너무 좋아.”
“그렇게 좋기만 하다 아무것도 안 되면? 배우 되는 재능 따로 있고, 연출에서 감독 되는 능력 따로 있다. 둘은 아주 다른 파트라고. 그렇게 근사하게 꿈만 꾸다 아무것도 안 되고 평생 아마추어로만 살아도 행복하겠냐? 한평생 난 연극 한다 그런 자부심만으로 버틸 수 있어?”
— 《사슴벌레식 문답》, 24p
정원이는 결과보다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연극을 선택했다. 무엇이 될지 불분명했지만, 그 과정을 사랑했고, 그 감정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래서 뭐가 될 건데?” 같은 질문이었다.
왜 사람들은 ‘좋아한다’로는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걸까? 왜 꼭 뭔가를 이뤄야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정말 살아갈 수 없는 걸까?
2. 반희씨와 울엄마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 《실버들 천만사》, 75p
반희는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살고 싶었던 인물이다. 더는 자신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결국 가족을 떠나기로 한다. 그 선택이 이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안에서 반희의 마지막 자존심과 생존 의지를 본다.
우리 엄마는 반희와는 달랐다. 이기적인 남편으로부터 우리 남매를 지키고자, 엄마는 끝까지 희생하는 쪽을 택했다. 그 모든 결정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성인이 되고 나서야 머리로는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혼한 이후에도 엄마는 매달 나를 보고 싶어 한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딸과의 데이트를 이제라도 하고 싶으신가 보다.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만나러 나가지만,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다. 이제 와서 평범한 모녀 역할을 하려는 엄마의 모습이, 솔직히 말해 때때로 역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차라리 엄마가 반희처럼 이기적이었더라면, 그땐 서운했겠지만 지금쯤은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일방적인 희생이 만든 끈은 나를 옭아매고, 되려 내 감정을 눌러왔다.
반희처럼 살았다면, 엄마도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도 채운이처럼, 지금쯤 엄마에게 더 솔직하게 고백하고, 더 정직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3. 걱정이라는 이름의 뒷담화
“이미 돌아가신 분이긴 하지만 그동안 마리아 이모님 사정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지, 이제라도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야 우리가 함께 기도할 일이 있으면 기도하고 함께 도울 일이 있다면 도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 《하늘 높이 아름답게》, 107p
죽은 마리아를 애도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기도라는 명분 아래 그녀의 삶을 들춰본다. 진심 어린 위로라기보다는, 삶을 마친 사람을 소재 삼아 이야깃거리로 삼는 분위기.
기도는 거들 뿐, 결국 마리아라는 한 사람의 복잡하고 고단했던 생애는 누군가의 궁금증으로 추락하고 만다.
같은 신자로서 부끄럽다. 하느님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위선적인 말들이 배려와 사랑이라는 옷을 입고 쏟아졌는지 돌아보게 된다.
대화 주제가 없어 시작된 가십은, 어느새 걱정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불쌍하다”는 말로 소비되는 누군가의 불행에는, 사실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
걱정이라는 말 아래 숨어버린 참견과 뒷말. 기도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소비하는 태도. 그 모든 것 앞에서, 과연 누구를 위한 말이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겠다.
4. 사소함이 끝이 되는 순간
"내가 왜 이혼했냐면 아무래도 휴지 때문인 거 같아서."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현수에게 휴지를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현수는 처음에는 그런가 하다가,
"아니 여자들은 원래 남자들보다 휴지를 많이 쓴다."고 대꾸했다.
그러자 남편은 현수가 남자들보다 많이 쓰는 정도가 아니라 여자들 평균보다 더 많이 쓰는 것 같다고 말했고, 현수는 절대 자신이 여자들 평균보다 많이 쓰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남편은 기가 막힌 얼굴로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 《무구》, 142p
현수는 이혼한 남편과 다시 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떠올릴 수 있는 건, 남편이 말했던 휴지 때문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이유뿐이었다.
그게 정말 이혼의 이유였을까? 아니다. 그 사소한 것이 이혼 사유가 될 만큼, 이미 관계는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감정이 식고, 대화가 줄고, 실망이 쌓이면, 어떤 사소한 일도 견딜 수 없는 불쾌함이 된다.
이 대목에서 예능 <핑계고>에 출연한 윤경호의 선배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취 시절, 함께 살던 메이트와 여러모로 안 맞았지만 참고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메이트가 밥풀이 묻은 숟가락으로 찌개를 퍼먹는 걸 보고, 화가 치밀어 밥상을 엎어버렸다고 했다.
상대는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윤경호의 선배 역시 그동안 쌓인 감정을 그 한 숟가락에 다 담아낸 셈이었다.
나도 그렇다. 신랑에게 서운했던 감정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뜻밖의 순간에 이상한 타이밍으로 터뜨려버린다. 신랑은 얼마나 어이없을까?
사람 사이의 끝은 대개, 사소한 것에서 터진다. 진심을 숨기기 위해 사소함을 핑계로 내세우기도 하고, 사소함조차 넘지 못할 만큼 마음이 멀어져 있기도 하다. 두 경우 모두,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휴지 때문이라는 말은 더 슬프다.
5.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언니,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네, 내가 길을 놓쳤는가봐."
"아니 얘 신애야, 네가 제정신이니,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자주 만났는데 무슨 길을 놓쳐."
"그러게, 내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라도 길을 물어봐서 그리로 갈 테니 거기 있어 언니."
열두시가 되도록 신애가 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자 신숙은 모르겠다며 그만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 《깜빡이》, 158p
신숙은 여동생 신애가 길을 못 찾아 헤매고 있는데도, 걱정은커녕 두 딸들과 점심을 맛있게 먹고 한가롭게 디저트를 즐긴다. 결국 그렇게 욕하던 제부에게 전화를 걸어, 길 잃은 신애를 찾으러 가라고 한다. 겉으론 동생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실은 남보다 못한 태도다.
두 딸도 유쾌하지 않다. 엄마인 신숙의 성화에 못 이겨 코로나 시국에 억지로 엄마를 만났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잔소리뿐이다. 그들이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는, 엄마를 집에 보내고 난 뒤 느긋이 담배를 피우는 그 짧은 시간이다.
가끔 가족이라는 연 때문에 끊지도 못하고 억지로 이어가는 관계들이 있다. 나 역시 그렇다. 필요할 때만 찾는 아빠가 야속하지만, 결국 딸이기에 아빠를 돕는다. 그럼에도 좋은 소리 하나 듣지 못한다. 정말 아빠만 아니면, 인연을 끊고 싶을 정도로.
그래도 내게도 해방구는 있다. 신랑에게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그 시간. 나한텐 위로지만, 어쩌면 신랑에겐 의무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런 사람 하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만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만나야 할 때가 있다. 상처를 주고받아도 쉽게 끊지 못하는 건, 결국 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미 멀어졌는데도, 그 끈을 놓지 못한다. 피상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것, 그것이 가족이다.
6.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오숙처럼 무섭게 돌변할 기회라도 있었으려만, 오익은 한없이 억울했고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199p
오숙은 오빠 뒷바라지하느라 대학도 못 갔고, 결혼한 뒤에도 여전히 엄마에게 가장 많은 용돈을 드리던 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왜 자신만 그렇게 살아야 했냐며 따지다가, 결국 의절을 선언한다.
그 순간, 어머니가 느낀 감정은 미안함이 아니라 ‘이제 용돈을 못 받는다’는 억울함이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은 고스란히 아들 오익에게 흘러간다.
놀라운 건, 오익 역시 억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은 오숙처럼 분노할 수도, 의절할 수도 없는 위치라는 이유였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그 경계는 흐려지고 억울함만이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그런데 그 억울함 속에서 유일하게 사과를 받지 못한 사람은 오숙이다.
최근 유퀴즈에서 본 청주여자교도소 교도관의 이야기가 겹쳐졌다. 재판을 받는 수감자가 너무 힘들다며 화를 낼 때, 교도관은 “진짜 고통받는 건 피해자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억울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억울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언제나 평등하지 않다. 결국 아무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누구도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없는 아이러니한 세상만 남았다.
7. 경서와 수박
나는 경서를 존중하지도 예의를 지키지도 않았다. 그러니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비열하고 무심한 인간이라는 걸 명민한 그가 읽어낼까봐. 내가 집요하게 수박을 원할 때 경서는 수박을 사주는 대신 등을 돌리고 모른 척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박을 사준 데 대한 내 감사의 눈길을 그렇게 한사코 피했던 건 어쩌면 잘못 엮인 노끈처럼 나와 엮이는 것이 그도 무섭고 불안해서였을 것이다.
— 《기억의 왈츠》, 236p
주인공 ‘나’는 얼마 전, 동생 부부와 교외의 숲속 식당에 다녀온 후부터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청춘 시절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중에서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는 한 사람, 경서를 기억한다. 조용하고 명민했던 경서는 ‘나’를 좋아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선을 지켰다.
‘나’는 경서의 마음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했고, 그 관심을 은근히 이용했다.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응어리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술자리가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술에 취해 수박이 먹고 싶다며 집요하게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철이 아닌 수박은 비싸고 맛도 없다며 웃어넘겼지만, 경서는 말없이 조용히 수박을 사서 건넨다.
별것 아닌 장면이지만, 나는 그 대목을 곱씹었다.
특히 '그날의 장면은 선명하게 남았지만, 정작 수박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한 사람의 마음을 받아놓고도 아무 책임도 감정도 남기지 않은 ‘나’의 무심함을 증명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남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 역시 누군가의 호의를 받으면서도 마음을 받아줄 생각은 전혀 없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주기 싫었고, 그렇다고 남에게 가는 건 더 싫어서, 곁에만 두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면서도, 그땐 그러고 싶었다.
《기억의 왈츠》는 단지 오래된 기억을 꺼내는 이야기라기보다, 그 기억을 통해 스스로의 비겁함과 어긋난 감정을 마주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날의 수박처럼,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던 누군가의 마음이 어느 날 문득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짧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깊이는 세월을 지나도 쉽게 흐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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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이님의 인생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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