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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 지음
문학동네 펴냄
읽었어요
📚 "당신이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아오?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나 아오? 당신은 알고 있소? 알고 있느냐고? 내가 당신에게 묻고 있잖소."
이 순간 고관은 발을 구르며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무서워할 만큼 버럭 언성을 높였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완전히 넋이 나가 비틀거렸고, 온몸이 떨려 더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 그는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는 채로 실려 나갔다. 기대 이상의 효과에 만족한 고관은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사람의 감각조차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에 완전히 도취되어 친구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아보려고 슬쩍 곁눈질했다. 고관은 친구가 어쩔 줄 모르고 심지어 공포마저 느끼는 모습을 다소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57~58쪽)
☕️ 오스카 와일드는 희곡 『윈드미어 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에서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또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다.” 이 문장은 인간 욕망의 아이러니와 인생의 복잡한 진실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오늘자 중앙SUNDAY)
여기 원하는 것을 얻었다가 뺏긴 사람이 있다.
말단 공무원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각종 문서를 종이에 정서하는 일 외에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 그런 그가 어쩌다 값비싼 고급 외투를 맞춰 입게 된 후로 그를 멸시하던 사람들이 그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저녁 식사에까지 초대한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그런 생활을 마음껏 즐기기도 전에, 초대받았던 그 저녁 식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도들에게 외투를 강탈당하고 만다. 다음날 경찰과 고관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요구가 좌절되자 분노에 차올라 열병으로 죽고 만다. 그리고 며칠 후 유령으로 다시 고관앞에 나타난다.고관의 권위에 눌려 아무 말도 못했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유령이 되어서야 고관에게 큰소리를 친다. 같은 지역의 경관들도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큰소리 치면서도 유령을 마주치면 벌벌 떨었다.
#소시민 #작은사람
이 단순한 줄거리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고급 외투를 먼저 원한 것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수선공의 말에 넘어가서 비싼 값을 치르고 맞춘 외투다. 예정에 없었으나 그렇게 맞추게 된 외투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에게 전부가 되어 버렸고, 외투를 잃어버리자 그의 목숨도 다했다. 마치 운명의 장난에 휘둘린 것 같다. 이 작은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져야 할까,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
#상실감
모든 재산을 탈탈 털어 외투를 샀기에, 그에게는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도 더한 분노가 남았다. 요즘으로 치면 영끌 뒤에 산 아파트 값이 추락하는 것? 빚내서 산 주식 값이 폭락하는 것? 모든 것을 걸고 치른 시험에서 불합격되는 것? 경기에 나가려고 열심히 훈련했는데 부상을 입는 것? 끝도 없이 많은 상황들이 떠오른다. 경쟁이 심한 사회일수록 성공을 위해 더 많은 것을 걸어야 하는데, 그 끝이 좋지 못하다면, 상실감 뒤에 오는 것은 아마도 좌절 혹은 분노. 좌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우울증이, 분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폭력으로 양상이 변한다. 어쩌면 기성 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약함
혹은, 고작 외투 하나 잃었다고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구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비판할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성실히 직장에 다니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는 정도의 상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상실을 겪어보지 않은 이에게 최초의 상실은 분명 크다. 하지만 세상살이라는 것이 상실과 회복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고 멀리 보면 그저 인생의 중간에 한번씩 찾아오는 태풍일 뿐인 것을 지나온 사람은 안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지나치게 나약했던 것은 아닐까.
#권위 #권력
권위를 이용해 으스대는 경관과 고관의 모습이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특히 친구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고 일부러 방문객을 문밖에서 기다리게 만든다거나, 크게 겁을 준다거나 하는 모습이 그렇다.
계층이 있는 곳에서는 여지없이 보이는 모습이다. 가부장으로 군림하려는 집안의 맏어른, 회식 때 폭탄주를 말아주며 먹으라고 강요하는 상사,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무조건 시키는대로 하라는 윗사람들. 그들은 그 '자리' 빼고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인데 그렇게 위세를 떤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아무 것인 양 위세를 떠는 그 모습이 어쩌면 더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외투
이 책의 삽화를 맡은 노에미 비야무사 일러스트레이터는 속표지에 '내 최고의 외투, 어머니께'라고 헌정사를 썼다.
그렇게 보면 '외투'는 모진 풍파를 막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짧으면서도 다양하게 생각할거리를 주는 책이었다. 러시아 문학의 정수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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