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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문상훈 지음
위너스북 펴냄

날이 밝은 낮 시간에 읽으면 문상훈의 감성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것만 같아 잠들기 전 새벽 시간에만 책을 폈다.
낮에 모아 밤에 펼쳐냈다는 그의 글은 철저하고 지독한 자기검열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느낄법한 평범한 감정들을 여러 번 썼다 지운 단어들로 엮은 글을 읽으며,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나 쓰지 못하는 책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장에 닥치는 대로 적었는데, 완독 후 강렬하게 느낀 감정들을 3가지로 정리해보겠다.
첫 번째는 학창시절의 향수이다. 학창시절 새벽까지 라디오를 들었던 때가 생각이 났는데, 그 시절이 소중한 이유는 그때를 자양분으로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문상훈의 글을 읽으며 15년 전의 내가 떠올라 애틋한 감정이 들었다.
두 번째는 실망. 회사에서 나는 작은 실수라도 할까 봐 조바심을 내며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혹여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잠들기 전까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찾고, 더 나아가 찌질하게 곱씹으며 자신을 질책하는데, 문상훈은 스스로 실망할 때 더 나은 내가 되는 기회라고 따뜻하게 말해줬다.
마지막은 짝사랑이다. 고백하지 못하고 끝난 짝사랑이 용기내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후회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사랑의 가장 본질은 어쩌면 짝사랑이 아니었을까. 짝사랑의 완성은 고백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얗게 소실될 때라고 말해주어 다시 보니 나의 짝사랑은 완성형이었나보다.

✏️
P.32
밤에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다짐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것처럼 적겠다. 오늘의 기분과 생각 중에 가장 후진 것들을 모아 이곳에 남길 것이다. 이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내 감정의 림프선 쓰레기통이다.

P.43
<내 모든 결핍들에게> 나는 내 나쁜 모습들이 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좋은 모습도 너 덕분이었어. 내가 아무리 너를 미워해봤자 밀어낼 수 없는 작은 방에 같이 지내는 기분이야. 그래서 이제 받아들여 보려고. 이제는 안 미워하겠다고 할 수는 없지만 노력해볼게. 적어도 너를 인정할게.

P.45
밤을 즐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일을 축내서 오늘의 아쉬움을 희석하는 사람들. 밤에 하는 생각들은 대체로 농도가 짙다.

P.46
일어날 땐 움푹 깊어지는 동해바다처럼 번뜩 눈이 떠지고 잠드는 시간에는 서서히 잠겨 드는 서해바다처럼 오래오래 차근차근 잠들면 좋을 텐데 나는 자꾸 반대로 하게 된다. 아침은 뭉그적거리며 두세 시간이 지나도 잠에서 허우적대고, 밤에는 발을 헛디뎌 첨벙하고 폭 빠져 마취한 것처럼 잠이 든다.

P.54
6년 남짓한 교복 시절을 자양분으로 평생을 먹고산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더 알아가고 싶은 호기심과 잘하고 싶은 욕심은 십 대 때 듣던 라디오와 친구들의 웃는 얼굴에서 찾았다.

P.56
어릴 때는 아직 간지러워서 못 쓰고, 그 또래가 되면 괜히 싱거워서 안 쓰고, 시간이 지나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못 쓰는 단어. 청춘.

P.57
능숙하고 잘하면 왠지 청춘에서 멀어진 것 같아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능청스러운 모습이 아저씨 같아 나는 계속 부끄럽고 싶다. 어릴 때는 미숙함과 아쉬움을 감추려고만 했는데, 이제는 늘 부족하고, 미숙하고, 또 아쉽고 싶다.

P.58
커가면서 알게 된다는 세상 물정과 현실, 한계를 되도록 모르고 싶다.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분간하지 못해서 바보같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말이 겸손의 너스레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믿어서 실패할 때의 데미지가 작았으면 좋겠다. 성공이 어색하고 실패가 익숙하면 좋겠다. 시도해온 일들보다 도전해볼 다음 기회가 훨씬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살다가 내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때가 왔을 때 그 이유를 싱겁게 나이나 세월에서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는 것을 인생의 패배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도전할 힘도 용기도 없는 것을 굴복으로는 더더욱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P.64
실망은 그 사람에 대한 업 앤 다운 게임에 불과하다. 나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업 다운으로 영점을 향해 가는 것뿐인데, 나는 상대가 외치는 다운이 무서워 내 숫자를 바꿔갔다. 나를 너무 좋게만 보는 것은 나쁘게만 보는 것만큼 안 좋다는 것을 몰랐다.

P.66 💕
누군가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을 때 내가 먼저 해야하는 것은 기대에 못 미친 나도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잘 나온 사진만 내 얼굴이 아니듯이 기대에 부응한 나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실수했을 때의 나를 부정하면 앞으로 실망할 일만 있다. 상대방을 실망시켰을 때 더 자신을 객관적으로 내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야만 그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할 수 있다.

P.92 💕
내가 기억하는 내 평생 동안 행복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추앙하다 보니 행복에 대해서 어렴풋한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 행복한지를 되도록 떠올려보지 않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내가 지금 집중을 하고 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 집중이 끝난 순간인 것처럼, 행복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맹목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 타인의 행복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의 행복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다.

P.114
이를테면 자기혐오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싫어하는 것도 나여서, 내가 봐도 별로인 내가 감히 누군가를 싫어할 자격이 있나 생각합니다.

P.115
언젠가 맑고 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명조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P.123
겪은 만큼만 보고 본 만큼만 느끼고 느낀 만큼만 정직하게 담아야 하는데 자꾸 힘이 들어간다. 그 괴리를 줄이려면 말을 천천히 하고 글을 조심히 적거나 말고 글만큼 내 마음의 무게를 자주 재봐야 한다. 때마다 다짐하지만 또 때마다 반성한다.

P.127
사랑 중 제일은 짝사랑이 아닐까 한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면 사랑 중 제일은 단연 짝사랑이라고 믿는다. 손을 잡지 않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소유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짝사랑을 해본 사람을 사랑한다.

P.128 💕
사랑의 완성이 무엇일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도 짝사랑의 완성은 고백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라면 너무 상투적이고 백년해로라면 너무 싱겁다. 짝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란 마음을 전달하는 때가 아니라 내 안에서 하얗게 소실될 때가 아닐까 한다. 대가를 바라고 호의를 베푸는 것을 함부로 사랑이라고 하지 않듯이 대답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짝사랑의 완성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마음을 주는 법을 알아야 받을 수 있다.

P.130
너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더 잘 살기로 다짐할 때 우리는 마주 보는 것보다 더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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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혀누님의 천 개의 파랑 게시물 이미지
정상은 무엇이고 과연 비정상인건 무엇인가.
장애없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면 정상인거고,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인가. 사람들은 내가 처하지 않은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의 처우나 문제에 관심 가지는 사람도 약자일 뿐이다. 나조차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 읽는동안 약간의 죄책감을 가졌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인간, 장애인, 동물,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따뜻한 시각에서 써내려간다. 내가 로봇이었다면? 이라는 상상을 종종하게 됐는데 결론은 인간이 누리는 모든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이어졌다. 인간이 다채로운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고 이를 표현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 책을 읽는동안 아주 사소한 것에도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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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3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 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P.159
복희는 묻고서 멍청한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진화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다. 심지어 상아의 탈락은 오로지 인간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것이 좋은 진화일 리가.

P.209
투데이는 달리고 나면 지친다. 콜리는 에너지를 얻는 수단이 외부에 있지만 모든 생명은 에너지 동력원이 몸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면 생명은 쉬어야 한다. 에너지를 회복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잠을 자는 것이나 식사를 하는 것이다.

P.220
보경이 은혜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이 사소한 불편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은혜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이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지은이) 지음
허블 펴냄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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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혀누님의 혼모노 게시물 이미지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민음사tv에 박정민 배우가 나오는 편을 보는데, 저 한줄평을 말하는 순간 책에 대한 굉장한 궁금증이 일었다.

호불호가 나뉘는 책이라고 하던데 결론을 먼저 말하면 재밌다!

‘잘 읽혀야 한다’가 성해나 작가의 첫번째 쓰기 원칙이라던데, 읽히는 면에서, 즉 속도감과 몰입도에 있어서는 한편의 영상을 보는 것 같았기에 대단히 잘 써진 책이라고 생각했다.

또, 이야기는 대부분 대치되거나 상대가 있는 이야기인데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혼란스럽다. 나는 누구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가고 이해가 가는가 계속 마음을 따라가려고 의식하면서 읽었다. 그러나 등장인물 누구 하나 이상하다고 할 수 없고, 틀리다고 할 수 없어서 스스로 난 누구의 편에 서야하나 고민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굉장히 애매한 순간에 끝이 난다.(이게 호불호의 원인일수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게 굉장히 찝찝하다.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헷갈리는데 이 와중에 진행중인 이야기가 끝이 나버리니까. 뒷 이야기를 내놔! 라고 하고 싶지만 이게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뒷 이야기는 독자들의 가치관에 따라 바뀌어 버릴 수 있게.

추가로 모르는 단어들이 많이 나와서 간만에 사전도 찾아가면 책을 읽었는데 작가의 어휘력이 굉장히 좋다고 느꼈다.

“가짜는 타인의 시선으로 살고, 진짜는 자신의 기준으로 산다”

✏️
P.136
나이 들어 야심까지 크면 사람들도 그걸 알아채고 달아나. 좋은 운도 다 황이 되는 법이다.
늙어갈수록 본심은 숨겨야 약이 된다, 그래야 추하지 않다.

P.335💕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느 마침표가 성해나의 작품에서만큼은 완결을 위한 기능으로 쓰이지 않는다. 독자는 한동안 이야기가 지나간 자리에 우두커니 머무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여운이 남는다거나, 감상에 젖게 만든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마지막 문장 끝에 찍힌 마침표가 결말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독자를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들이 마련한 이 거울은, 마침표 형태 그대로 구의 생김새를 하고 있어 독자인 우리 앞을 정면으로 비추다가도 그 거울을 뒤로한 채 자리를 뜨려는 우리의 등 돌린 모습까지 내내 비추려든다. 소설이 나 자신도 볼 수 없는 뒷모습까지 비춘단 말인가, 우리가 어떤 다음으로 향하는지 내내 지켜본단 건가.

혼모노

성해나 지음
창비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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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누

@banduck2

미스테리한 이야기가 궁금해서 자야할 시간이 훨씬 넘었음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만큼 몰입감 있게 후루룩 한번에 읽었는데, 내용이랄건 딱히 없고 한편의 미스테리 영화를 본 것 마냥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안절부절하며 재미있게 봤다.
단순 지식을 얻기보다는 그냥 재미로만 읽을 수 있는 책. 상상력을 발휘하느라 머리속이 바쁘게 그림으로 그려지는 책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런게 소설을 읽는 이유인 것 같다.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조예은 지음
안전가옥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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