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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트

조예은 지음
북다 펴냄

고통을 옮긴다는 것. 그 기이한 능력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있었다. 저주인지 기적인지, 끝내 판단할 수 없었다.
조예은 작가의 첫 장편은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인적 드문 해변의 폐건물, 피 웅덩이 속 변사체, 한 사람이 흘렸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혈액의 양. 그리고 갑자기 발병한 것처럼 보이는 말기 피부암. 석연치 않은 모든 것들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란이라는 청년. 고통을 옮기는 능력을 가진, 아니 그 능력에 갇혀버린 존재.
형사 이창이 란을 쫓는 과정은 긴장감 있게 펼쳐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했던 건 란이 품고 있던 고통의 무게였다. 자신의 능력이 기적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고 절규하던 그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끊임없이 그를 괴롭혀 온 것들, 그가 천천히 치밀하게 준비해 온 복수, 그 모든 것이 비릿한 피 냄새와 뒤섞여 목을 조여왔다.
조예은 작가의 문장은 거칠었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각이 튀어나왔다. 끈적한 젤리의 촉감,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움직임, 불길하게 번지는 분위기. 그 모든 것이 뒤섞이며 나는 한 편의 영상을 보는 것처럼 빠져들었다. 고어하지만 희망찬, 무섭지만 애틋한. 그 모순된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란의 능력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고통을 옮긴다는 것, 누군가의 병을 대신 받아낸다는 것. 그것이 누군가에겐 기적처럼 보일지 몰라도 란에게는 평생을 짊어진 저주였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자의 복수가 이토록 처절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끈적하고 비릿한 감각이 한참 동안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조예은 월드의 시작이라는 이 소설은 거칠지만 강렬했다. 완성되지 않은 듯 보이면서도 완벽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 그런 이야기였다.
그 애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소설 속 누군가가 던진 그 질문이 자꾸만 되풀이되었다. 란은 어떻게 됐을까. 그가 짊어진 고통은 끝내 어디로 갔을까. 답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질문만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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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나무로 되살아났다. 남자친구의 오른손이 브로콜리가 되었다. 죽은 남자친구가 손톱에 빙의해 나타났다. 이렇게 나열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인데, 읽다 보니 전혀 황당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유리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는 환상과 현실이 밀착되어 있었다. 경계가 흐릿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기이한 사건 앞에서 그리 놀라지 않았다. 잠시 멈칫하다가도 금세 별일 아니라는 듯 대처했다. 식물로 되살아난 아버지에게 툴툴거리면서도 번번이 바람을 들어주는 유진처럼, 돌과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말하는 이구아나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는 강사처럼. 그들은 담담했고, 그 담담함이 나를 설득했다.
그런데 이 소설들이 단순히 유쾌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복합적인 맛이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단맛과 쓴맛이 뒤섞였고, 기이함 속에 따뜻함이 얼핏 스쳤다. 인물들이 경험하는 기묘한 현상들은 억눌리고 지연된 감정을 가시화한 것처럼 보였다. 마음속 힘듦을 숨긴 채 오래 살아가다가 견디다 못해 생겨나는 암덩어리처럼.
복싱 선수 원준의 오른손이 브로콜리가 된 이유는 밉지도 않은 사람을 억지로 미워하려 애썼기 때문이었다. 학교폭력을 당하던 과거에 괴롭힘이 아무 타격도 주지 않는다고 자신조차 속이며 버티던 순간, 돌과 말하는 능력이 생겼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두고 간 이구아나에게 “야, 우린 버림받았다, 그 쓰레기한테”라고 말하는 이의 푹 꺼진 눈두덩은 이구아나와 닮아 있었다. 억지로 삼킨 괴로움들이 결국 어느 날 아침 별안간 브로콜리가 되어버리는 것. 그런 식으로 마음의 매듭은 형체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 매듭을 풀어주는 건 우연에 가까운 관계들이었다. 혈연처럼 끈끈하지 않은, 헐거운 공동체. 같이 버림받은 이구아나, 할머니와 할아버지, 죽은 남자친구의 유령과 함께 찌개를 끓여 먹는 시간. 왜가리의 사냥을 함께 구경한 동네 주민 네 명. 그런 사람들과 보낸 시간이 맺힌 마음을 풀어냈다. 함께 밥을 먹고, 산 위에서 소리를 지르고, 별것도 아닌 일에 깔깔 웃는 것. 그런 게 필요했던 거였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살다 보면 꼭 있다는 걸, 이 소설들은 알고 있었다. 조금만 스쳐도 멍이 드는 우리 인간이 실패와 상처를 말끔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는 것도. 그래도 성공과 실패를 같은 무게로 여기는 왜가리를 부러워하며 함께 웃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그런 기묘한 평안함이 페이지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었다.
일상에 불쑥 침범하는 초자연적 사건들,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 억눌린 감정이 형체를 갖추는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이상하면서도 다정했다. 이유리 유니버스라는 이 세계는 물음표와 느낌표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묘하게도 편안함을 느꼈다. 누구에게나 이런 브로콜리 같은 게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은이)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59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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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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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한참을 귓속을 의식하게 되었다. 고막 남자친구라니. 실체도 없고 상처도 없는 연애라니. 이 기묘한 설정 앞에서 나는 계속 웃다가도 문득 서늘해지곤 했다.
권혜영 작가가 그려낸 지나의 세계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지독히 현실적이었다. 현실 남자 울렁증을 가진 여자가 ASMR 콘텐츠 속 목소리와 연애를 한다는 설정은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읽다 보면 묘하게 이해가 되었다. 일방적인 사랑. 상처받지 않는 안전한 거리. 그 안에서 누리는 평화로움.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 망상인지.
그런데 그 평화가 깨지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다즐링 행성의 왕자가 애시를 찾으러 왔다는 설정, 그리고 지나가 고막 남자친구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분투는 웃기면서도 애잔했다. 남자 염색체를 가진 신체의 일부를 구하라니. 손톱이든 타액이든 터럭이든. 남자 울렁증을 가진 여자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었다.
가람이라는 친구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더 복잡해졌다. 가람은 지나와 달랐다. 여전히 쌍방의 연애, 쌍방의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두 여자가 각기 다른 형태로 품고 있는 애정과 망상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랑이란 결국 저마다의 방식으로 망상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일방적으로, 누군가는 쌍방으로. 누군가는 안전하게, 누군가는 위태롭게.
권혜영 작가의 문장은 가볍게 읽히지만 결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애정이라는 이름의 망상과 망상이라는 이름의 애정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얻고 또 헤매는가. 비정상적으로 분비된 사랑의 호르몬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이토록 기묘하고도 절실할 수 있다는 것을.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나는 내 귓속을 다시 한번 의식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무언가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실체 없는 목소리, 상처 없는 사랑. 그것이 주는 위안과 공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달달함보다는 씁쓸함을 더 많이 느꼈다. 하지만 그 씁쓸함 끝에 남은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다채롭고 기이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해였다. 지금은 없는 달달함을 위하여. 그 문장이 한참 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애정망상

권혜영 지음
북다 펴냄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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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의 노란빛이 눈앞에서 자꾸만 번졌다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이렇게도 깊이 파고드는 것이었나. 아니,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 남겨놓은 것들이 이토록 무거운 것이었나.
2002년 여름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앞에 나를 세워두었다. 열아홉 해언의 죽음과, 그 곁에 남겨진 동생 다언의 17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그 문장 앞에서 나는 한동안 숨을 고르지 못했다.
권여선 작가의 문장은 서늘했다.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미스터리로 시작된 이 소설이 결국 삶과 죽음, 애도와 용서,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예상할 수 없는 깊이로 나를 끌어당겼다.
레몬의 노란빛이 상징하는 것들을 생각했다. 다시 오지 않을 좋았던 시절, 따뜻했던 어느 순간의 계란프라이, 그리고 죽음 직전 해언이 입고 있었던 원피스의 색. 그 모든 것이 겹쳐지며 복수와 애도 사이 어딘가에서 다언이 찾아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삶이 이어진다는 것.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웃고, 먹고, 이야기하며 생생하게 숨 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단 하나의 진실. 나는 그 문장들을 품고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애도하는 법을 배웠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받아들일 수 없어도,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그 속에서 찾아지는 의미들이 있다는 것을.
책을 덮고 나서도 레몬의 노란빛은 한동안 내 곁에 머물렀다. 아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삶 한가운데, 그 빛이 조금은 따뜻하게 번지고 있었다.

레몬

권여선 지음
창비 펴냄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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