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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를 읽을 땐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서술 방식 탓에 당황스러움이 컸다. 배수아의 번역만 익숙했지 그가 직접 써내려 간 책은 처음이었기에. 의식의 흐름은 나 또한 현대 문학에서 좋아하는 기법이고, 덕분에 즐거이 읽을 수 있었다.
단편적인 면들의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후반부에서 그 파편들이 어떤 사건—누군가의 일대기—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중반부를 읽다보면 초반부에서 알 수 없었던 맥락들이 이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나름의 소소한 추리를 하는 재미도 있었다.
시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문체나 어딘가 개별적으로 보이는 짧은 문장들이 한 축에 속해있다는 점에서도. 무엇보다 내용이 너무 좋았고.
나는 잠재적인 현실을 산다
미래는 선취하는 불안
”그러니까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써도 되나요?“…왜냐하면 사실 아닌 것은 사실에서 나오는 법이므로, 그러니 쓰는 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MJ는 편지에 썼다. 편지는 일기와 달리 MJ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는 떠나기 위해서 작성되기 때문이다.
그의 편지. 첫장부터 책의 말미까지 허투루 쓰이지 않았던. 시나 소설과는 다른 형식의 글.
지켜보는 것은 사랑하는 것.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지켜보고, —혹은 보지 않음으로써—시야에 존재하게 두는 것. 속삭임으로 남는 것. 우묵히 팬 땅에 머무르는 것.
안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중요하지 않았다(257p).
수많은 가능성이 잠재하는 그의 이야기에서 앎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따라가는 것, 그 속삭임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원하는 대로 그의 이미지를 그려내도 괜찮고 시답잖은 의미 부여를 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여행(258p)’이 될지니.
배수아의 동어 반복은 기껍다. 몇 번이고 되뇌일 수 있는, 그를 좇게 하는… 그런 단어들. 생활 속에서 접하면 배수아가 떠오를 것만 같은. 언제든 그의 세계에 고일 법한. 그가 의도한 바에 따라 내 일상을 해석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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