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로우
주인공 케이스는 황망한 치바 거리에서 자기 파괴적인 삶을 자처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아홉 개의 칼날을 가진 크롬 표창을 동경하며 육체로부터의 해방과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영적 체험만을 갈망할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AI가 구현한 가상현실과 딥러닝 인격의 공동묘지 속에서 그는 견딜 수 없는 혐오와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왜? 뉴로맨서는 그가 그토록 바라던 파라다이스다.
도망치거나 파괴할 것 없이 그곳에서 순수한 소녀 린다 리와 데이터 인격으로써 평생 살아가면 될 것이었다.
허나 이 자기모순이야말로 지독하게 인간적인 것이다.
죽음을 동경하면서도 결코 자살하진 않겠다는 모순.
육체를 경멸하면서도 섹스와 약물의 쾌락에 중독된 그에게 0과 1로 분해되어 하드드라이브와 RAM에 저장되는 것은 자살과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증오하는 것이 뭐냐는 AI 질문에 끝도 없는 자기혐오와 자살 충동으로 침전한 케이스는 다시 처음으로, 더럽고 암울한 치바 거리로 회귀한다.
그토록 갖고 싶었고 끝내 손에 넣었지만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죽음의 별, 크롬 날개의 표창은 자살 충동 그 자체가 삶의 동력이 되어버린 미래도시에서의 삶을 은유한다.
작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작전에 참여하는 동기가 뚜렷하지 않다.
케이스는 몸에 독극물이 있다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명목일 뿐이다. 그는 죽음을 기다려왔던 인물이다.
몰리는 고용되었다는 것 외엔 알 수 없으며 아미티지는 인격을 거세당하고 AI의 명령에 철저히 봉사한다.
마치 AI, 그리고 기술의 발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자아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놀라울 만큼 시의적이다.
AI의 발전이 가져올 막대한 부작용과 불확실성은 묵살당한 채 그것들은 증식하듯, 성장을 계속한다.
그 속에서 우리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케이스처럼, 자살충동을 삶의 동력삼아 살아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뉴로맨서 속에서 시간과 현실 감각을 마취당한 채 살아가진 않겠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윤리관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작중 등장하는 술집 차츠보의 바텐더 '레츠'의 볼품없는 육체가 하나의 기념비적인 상징처럼 묘사되듯, 기술의 환영에 저항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인간다운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윌리엄 깁슨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사이버 사후세계, 뉴로맨서의 품을 거부하고 허무의 공동으로 뛰어들 준비가, 당신들은 되었는가?
0
김사언님의 인생책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