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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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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아니 에르노 지음
1984Books 펴냄

컴퓨터 앞에 놓인 작은 액자.
그 속에 태권도복을 입은 소년의 사진을 본다.
해맑게 웃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꽉 쥐어보는, 한때 나였던 그 소년이 낯설다.
나는 이제 저렇게 맑게 웃을 수 없다.
그 사이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많은 행복을 누렸으며 많은 후회를 했고 많은 사랑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그 소년을 모르지만 그것이 딱히 슬프진 않다.
내 안에는 그저 지금의 나만이 존재한다.

지금 혹은 과거의 행동이, 사회 현상이, 욕망이, 슬픔이, 사랑이 내 미래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면 난 그 압박감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만 존재한다.
10년 뒤엔 내가 모르는 왠 아저씨가 여기 있겠지.
그 아저씨도 후회하지 않기를.
세월이 앗아간 수많은 소년들을 떠올리며 옅은 웃음 지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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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블루

@cosmoboy

삶이란 어째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지.
그러니깐 살고 싶걸랑 낚싯대든 미끼든 자존심이든 뭐든 간에 내던지고 뭍으로 되돌아오면 된다.
허나 그것은 불가하다.
우리를 어부로써 존재하게 해주는 것을 버리는 행위, 자의식의 자살, 그것은 생물학적 죽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죽기 위해 사는 사람들, 살기 위해 죽는 사람들.
그 누가 이 모순에 대해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수 있으랴.

나는 오늘도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본다.
모두 같은 바다를 향하지만 우린 결코 만날 수 없다.
그것이 때때로 나를 너무 슬프게 한다.
노와 낚싯대 따위 집어던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상처와 고통을 삼키며 미끼를 던지는 이유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까, 비대해진 자의식 때문일까.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손을 놓으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곤 뭍으로 돌아와 가족들, 친구들과 서로가 경험한 바다에 대해 도란도란 수다를 나눈다.
지금은 그저 그게 내가 바다로 향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말하고나니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민음사 펴냄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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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블루

@cosmoboy

너무 지쳐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의 창가에 머리를 기대어 초 단위로 바뀌어가는 풍경을 보았다.
고무줄처럼 가로로 늘어나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사람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유령들.
순간 버스에서 뛰어내려 유령이 된 그들을 붙잡고 나를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럼 정말 나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 중 한 명은 진한 연두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확실치 않다.
티셔츠 색 또한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왠지 그 사람의 안위를 바랐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잔상이기에.
잔상이 겹치고 겹치다보면 나 또한 그 일부가 될지 모르니 그들의 안위란 결국 나 자신의 안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스쳐가는 모든 유령들의 안위를 바란다.
어렴풋한 기억을 곱씹어 그들을 마음속에 소환해 본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나 또한 완성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문학동네 펴냄

15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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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블루

@cosmoboy

주인공 케이스는 황망한 치바 거리에서 자기 파괴적인 삶을 자처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아홉 개의 칼날을 가진 크롬 표창을 동경하며 육체로부터의 해방과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영적 체험만을 갈망할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AI가 구현한 가상현실과 딥러닝 인격의 공동묘지 속에서 그는 견딜 수 없는 혐오와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왜? 뉴로맨서는 그가 그토록 바라던 파라다이스다.
도망치거나 파괴할 것 없이 그곳에서 순수한 소녀 린다 리와 데이터 인격으로써 평생 살아가면 될 것이었다.
허나 이 자기모순이야말로 지독하게 인간적인 것이다.
죽음을 동경하면서도 결코 자살하진 않겠다는 모순.
육체를 경멸하면서도 섹스와 약물의 쾌락에 중독된 그에게 0과 1로 분해되어 하드드라이브와 RAM에 저장되는 것은 자살과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증오하는 것이 뭐냐는 AI 질문에 끝도 없는 자기혐오와 자살 충동으로 침전한 케이스는 다시 처음으로, 더럽고 암울한 치바 거리로 회귀한다.
그토록 갖고 싶었고 끝내 손에 넣었지만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죽음의 별, 크롬 날개의 표창은 자살 충동 그 자체가 삶의 동력이 되어버린 미래도시에서의 삶을 은유한다.

작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작전에 참여하는 동기가 뚜렷하지 않다.
케이스는 몸에 독극물이 있다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명목일 뿐이다. 그는 죽음을 기다려왔던 인물이다.
몰리는 고용되었다는 것 외엔 알 수 없으며 아미티지는 인격을 거세당하고 AI의 명령에 철저히 봉사한다.
마치 AI, 그리고 기술의 발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자아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놀라울 만큼 시의적이다.
AI의 발전이 가져올 막대한 부작용과 불확실성은 묵살당한 채 그것들은 증식하듯, 성장을 계속한다.
그 속에서 우리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케이스처럼, 자살충동을 삶의 동력삼아 살아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뉴로맨서 속에서 시간과 현실 감각을 마취당한 채 살아가진 않겠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윤리관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작중 등장하는 술집 차츠보의 바텐더 '레츠'의 볼품없는 육체가 하나의 기념비적인 상징처럼 묘사되듯, 기술의 환영에 저항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인간다운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윌리엄 깁슨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사이버 사후세계, 뉴로맨서의 품을 거부하고 허무의 공동으로 뛰어들 준비가, 당신들은 되었는가?

뉴로맨서

윌리엄 깁슨 지음
황금가지 펴냄

15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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