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인 환대란 가능한가.
내 집의 대문을 활짝 열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한다면,그 이방인이 남자든 여자든 영국인이든 중국인이든 그 누구든 간에, 난 더 이상 그 집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가?
주인 아닌 상태에서의 손님맞이란 불가능하다.
우선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근 상태여야만, 누군가를 맞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환대(hospitalite) 하기 위해선 우선 적대(hostilite) 해야 하는가.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 묵고 갈 수 있냐고 묻는다.
그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나는 그에게 질문해야 하는가.
그가 어디서 왔으며 몇 살이며 직업은 무엇이며 어디로 향하는지를 질문해야 하는가.
혹은 철저히 침묵한 채 그를 이방인인 채로 맞이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옳은 환대인가.
환대란 그를 들이는 것인가 혹은 나를 내주는 것인가.
(그것이 가능하다면)나를 모조리 내버리는 그리스도적 환대와 질문하고 선별하여 검증된 이방인을 맞이하는 조건부적 환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서서히 우리는 집을 잃어간다.
메신저, 통화, 이메일 등의 사적 통신은 더 이상 비밀리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감청되고 또 유출된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내밀한 일상을 sns에 업로드하며 고도로 조작된 자신의 내면으로 타인을 초대한다. (그 타인 역시 원본과는 전혀 다른 누군가이다.)
이방인은 말한다. 보인다. 들린다.
그러나 모든 정보는 왜곡된 것으로, 어디선가 말해졌고 이미 들려진 것들 뿐이다.
일종의 메아리처럼 존재는 저곳에서 내 안으로, 다시 이곳으로 정처없이 떠돌며 어느 순간엔 묻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
환대란 이제 그 의미 자체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맞이함 없이 우린 타인의 안으로, 타인은 내 안으로 너무 쉽게 드나든다.
한 세기 전에는 이것이 로맨틱한 연결망처럼 보였을진 몰라도 지금은 그저 피로한 불법침입의 연속, 질문해야 함과 대답해야 함의 의무 속에서 바스라져가는 존재의 실타래일 뿐이다.
그럼에도 묻는다면, 묻는 것을 고민한다면.
고향을 떠나 헤매는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라 묻는다면.
영원한 이방인인 당신을 적대->초대하기 위해 당신의 안녕을 묻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물어도 된다면.
아직 내 집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환대는 집주인의 권리가 아니다.
환대는 집주인으로 있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내가 나로 있기 위해 당신에게 물어야 한다.
물음으로써 내 집은 점점 공고해진다.
물음은 적대로부터 비롯되어 집과 문을 만들고 그제서야 비로소 당신을 맞이하고 환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묻는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환대에 대하여
자크 데리다 외 1명 지음
필로소픽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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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내가 죽은 곳에서 살고 싶어.
나를 전부 토해내고 싶어.
그저 투명하게 있고 싶어.
어떠한 질서도, 규칙도, 말도, 행동도, 시선도 그저 나를 관통할 수 있게.
그러니 나를 꿰뚫어주세요.
나를 짓밟아주세요.
나를 삼키고 다시 토해내주세요.
나를 산산조각내주세요.
한바탕 구역질이 끝나고 난 뒤, 바닥에 흩뿌려진 위스키 병의 유리조각들처럼 내가 투명해질 수 있게.'
지독한 존재론적 거식증이 남긴 것은 투명하디 투명한 유리조각.
자칫 아름다워 보일 수 있지만 착각해선 안된다.
그 유리조각들이 집요하게 동맥으로 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일 테니까.
실존의 자가면역질환은 결국 내 위장에 꽉 들어찬 오물을 소화함으로써 치유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점점 불투명해져야 한다.
그렇지만 불투명해질수록 아무것도 반사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투영하지 못해.
다시 내 안의 것들을 게워내고 싶은 욕망이 치민다.
사르트르가 말한 구토감이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반복되는 존재의 되새김질 속에서, 우리의 반사율은 끊임없이 변해간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삶의 아름다움 아닐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이상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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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앞에 놓인 작은 액자.
그 속에 태권도복을 입은 소년의 사진을 본다.
해맑게 웃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꽉 쥐어보는, 한때 나였던 그 소년이 낯설다.
나는 이제 저렇게 맑게 웃을 수 없다.
그 사이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많은 행복을 누렸으며 많은 후회를 했고 많은 사랑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그 소년을 모르지만 그것이 딱히 슬프진 않다.
내 안에는 그저 지금의 나만이 존재한다.
지금 혹은 과거의 행동이, 사회 현상이, 욕망이, 슬픔이, 사랑이 내 미래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면 난 그 압박감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만 존재한다.
10년 뒤엔 내가 모르는 왠 아저씨가 여기 있겠지.
그 아저씨도 후회하지 않기를.
세월이 앗아간 수많은 소년들을 떠올리며 옅은 웃음 지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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