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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나는 『총, 균, 쇠』를 읽다가 알타우알파가 스페인인들에게 포로가 되는 장면에서 멈춰 섰다.

그들이 스페인인들을 적이 아니라 친선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들은 그 상황을 위험으로 인식하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 만남의 끝이 파멸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보다 수천 년은 앞선 외계 문명을 만난다면 우리는 과연 알타우알파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그들을 적보다 먼저 ‘문명’으로, ‘지성’으로, ‘우월한 존재’로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알타우알파처럼,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신뢰하고, 먼저 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곧 선일 것”이라는 믿음.

하지만 『총, 균, 쇠』가 보여준 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술, 면역, 생산력, 정보가 불균등하게 축적된 두 문명이 만났을 때,

그 만남은 교류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이미 끝이 정해진 충돌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피할 수 없어진다.

과거에 알타우알파가 멸망한 것이 필연이었다면,
미래의 인류 역시 같은 구조 앞에서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알타우알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더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고, 더 빠른 통신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알타우알파보다도 훨씬 더 ‘문명에 대한 환상’을 강하게 믿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알타우알파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외계인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잔인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과거에 잔인한 문명의 얼굴을 충분히 보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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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잡기

마크 헤이머 (지은이), 황유원 (옮긴이) 지음
카라칼 펴냄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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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도 나서 한동안 마음이 고요했다.
슬프고, 안타깝고, 따뜻했다.
편집자였던 미쉬카 할머니가 실어증에 걸려 요양병원에서 보내는 날들, 아우슈비츠에서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기억, 그리고 손녀처럼 아꼈던 이웃집 소녀 마리, 언어치료사 제롬과의 이야기.

그 모든 것이 덤덤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이어진다.
이 책을 읽으며 느꼈다.
‘말’이 사라져도 마음은 남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은, 기억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을.

책 속의 미쉬카 할머니는 떠나가지만, 그녀가 남긴 고마운 마음은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나의 마음을 오래 흔들었다.

이 이야기가 특히 마음을 아프게 했던 건, 그녀가 겪은 일이 머나먼 이야기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들, 그리고 언젠가의 나에게도 이런 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마운 마음』은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결국은 사랑이 남는다는 믿음의 이야기였다.

조용히 책을 덮고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고마운 마음

델핀 드 비강 지음
레모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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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페 디엠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지음
민음사 펴냄

읽었어요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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