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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늘

신경숙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무난하면서 수평선을 걷는 듯한 느낌의 문장들

내 이야기 같아서 더 공감됐던 하나의 산문 에피소드
책을 읽던 그 시절들을 나는 모두 사랑한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문예창작과에 입학했으나 그건 꿈만 같았다. 희망이 이토록 꿈결같이 어렴풋하니 다른 모든 일이 다 그랬다. 여기 있으면 저기로 가고 싶고, 저기 있으면 여기가 그리웠다.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이건 아닌데, 싶었다. 이게 아닌데 난 왜 여기서 이 일을 하고 있나.

한동안 대학 생활에 적응을 못 해 나는 학교에 가야 하는 아침마다 머리가 무거웠다. 기어이는 한 달여를 강의를 빼먹고 용산의 외사촌언니가 다니는 동사무소 옆 음악다방에 앉아 그 언니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며 우울해했다. 외사촌이 너무 귀찮아해 그를 기다릴 수 없는 날은 괜히 거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귀가하곤 했다. 무엇도 위안이 되질 못했다. 학교에 가도 이게 아닌데 싶고, 외사촌과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녀도 이게 아닌데 싶고, 최루탄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어다니면서도 늘 이게 아니었다.

여름방학이었다. 정읍에 부모님이 살고 계시므로 그곳에서 여름을 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 가방에 몇 권 넣어간 소설들을 읽는 걸로 여름을 버텼다. 들쑥날쑥으로 하루에 한 편씩 두 편씩 읽어내다가 서정인의 <행기>를 읽고 <강>을 읽던 중이었다. 나는 <강>을 그대로 옮겨써보고 싶은 충동으로 만년필에 잉크를 채웠다. 그리고 노트를 폈다. 한 자 한 자 옮겨적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는군요."

버스 안. 창 쪽으로 앉은 사나이는 얼굴빛이 창백하다. 실팍한 검정 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있다. 긴 머리칼이 귀 뒤로 고개 위로 덩굴줄기처럼 달라붙었는데 가마 부근에서는 몇 낱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섰다.

"예, 진눈깨빈데요."

<강>을 시작으로 나는 그 여름을 내 노트에 선배들의 소설을 옮겨적는 일을 하며 지냈다. 최인훈의 <웃음소리>,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제하의 <태평양>,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이청준의 <눈길>, 윤흥길의 <장마>, 최창학의 <창>, 강호무의 <화류항사>……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더 세밀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들, 그 미학들.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다. 나는 이 길로 가리라.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준 독특한 체험이었다. 방학이 끝났을 때 필사를 한 노트는 몇 권이 되었고, 그 노트들을 마치 내가 쓴 작품인 양 가방에 넣고 서울에 돌아왔다.

나는 내 삶을 소설가로서 살아가리라 다짐했고, 습작 시절에 언제나 내가 그 여름방학 동안 내 노트에 옮겨적어본 작품들이 세상에 퍼뜨려놓고 있는 그 의미망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할 일을 찾았으므로 거기에만 매달린 덕에 나는 이른 나이에 등단을 했고 누가 뭐라건 꾸벅꾸벅 십 년을 걸어왔다.

왜 모든 일들은 지나가기만 하는가. 왜 붙들 수 없는가. 인생은 내게 대체 무엇을 주려는가. 주기는커녕 내가 감춰놓은 것까지 찾아내 갖고 가버릴 것 같은 저 흘러가는 시간의 위력 앞에서 괴로움만 강해질 때 나는 선배들의 작품을 필사하는 일로 보냈던 그 여름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게 반문해본다.

문학에 대한 외경심을 키워왔던 그 여름날들도 지나갔다고 할 것인가? 막연한 꿈을 구체적으로 끌어 당겨주었던 그날들을.

이제는 조금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시간은 되풀이되지 않지만 지나가는 일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들은 지나가며 생김새와 됨됨이를 새로 갖는다. 나에게 소설은 재생된 새 꼴들을 담아놓을 수 있는 공간이고 시간이다. 내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었건 간에 그 지나간 것들은 오늘 여기까지로 오는 길이었으며, 여기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시간 또한 십 년이나 이십 년 뒤 짐작도 못 하겠는 그 시간들로 가는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이제야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신경숙, <필사로 보냈던 여름방학>
2017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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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문장, 생각해볼 만한 문장들

-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 그러나 열려진 차창으로 들어와서 나의 밖으로 드러난 살갗을 사정없이 간질이고 불어가는 유월의 바람이 나를 반수면 상태로 끌어넣었기 때문에 나는 힘을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 무진에서는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과거의 경험에 의한 조건반사였었다.
-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로운 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 그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진에 가면 내게 새로운 용기라든가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도 아니었었다.
-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 그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 이따금 일선의 친구에게서 군사우편이 오기라도 하면 나 몰래 그것을 찢어 버리곤 하였었다.
- 내가 골방보다는 전선을 택하고 싶어해 가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른 아침 역 구내에서 본 미친 여자가 내 앞으로 끌어당겨 주었던 것이다.
- 기와지붕들도 양철지붕들도 초가지붕들도 유월 하순의 강렬한 햇볕을 받고 모두 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철공소에서 들리는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잠깐 버스로 달려들었다가 물러났다.
- 햇볕만이 눈부시게 그 광장 위에서 끓고 있었고 그 눈부신 햇볕 속에서, 정적 속에서 개 두 마리가 혀를 빼물고 교미를 하고 있었다.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맡아 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들은 점점 수근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함도 모른다는 듯이 그들은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인간 내면을 잘 표현함. 깨달음을 주는 문장, 돌이켜 생각해보게 하는 문장)

<키가 크고 살결이 창백한 나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얘기를 곧잘 했었다>
→ <조의 얼굴이 옛날보다 윤택해지고 살결도 많이 하얘진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 옛날 언젠가 역시 이 다리를 밤중에 건너면서 나는 저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나무들을 저주했었다.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나무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좀 높은 콧날과 두꺼운 입술이 병약하다는 인상을 버리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 곧 입술을 태울 듯이 타들어 가는 담배꽁초를 입에 물고 눈으로 들어오는 그 담배 연기 때문에 눈물을 따끔거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 우리는 별로 거품이 일지 않는 맥주를 마셨다.
- 박만이 억지로 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과 다른, 좀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狂女)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 밤이 깊지 않았는데도 거리는 적막했다.
- 과연 한길의 저 끝이, 불빛이 드문드문 박혀 있는 먼 주택자의 검은 풍경들이 점점 풀어져 가고 있었다.
- 냇물은 하얀 모습으로 뻗어 있었고 그 하얀 모습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 껍질을 한꺼번에 맞부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 청각의 이미지가 시각의 이미지로 바뀌어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의 감각속에서 일어나곤 했었던 것이다.

나 ‘윤희중’의 속마음
「천천히 생각해 보자. 그 말을 그 여자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나는 문득 그 여자를 껴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 아니, 내 심장에 남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단 무진을 떠나기만 하면 내 심장 위에서 지워져 버리리라.」

- 나는 우울한 유령들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벽에 걸린 하얀 옷들을 흘겨보고 있었다.
- 모든 사물이 모든 사고가 그 싸이렌에 흡수되어 갔다.
- 비가 나를 굉장한 효자로 만들어 주었다.
- 햇볕에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가지를 합성하여 수면제를 만들 수 있다면…… 그러나 사실 그 수면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게 아닐까.
- 어떤 사람을 잘 안 다는 것 ㅡ 잘 아는 체 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 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인간 내면을 잘 표현함. 깨달음을 주는 문장, 돌이켜 생각해보게 하는 문장)
- 자랑스러워 하는 듯한 몸짓을 보일 때는 그가 가엾게 생각되었다.

조의 대사
「야, 이 약아빠진 놈아, 넌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 놓고 기껏 내가 어디서 굴러온 줄도 모르는 말라빠진 음악 선생이나 차지하고 있으면 맘이 시원하겠다는 거냐? / 내가 고시에 패스하자마자 중매쟁이가 막 들어오는데 …… 그런데 그게 모두 형편없는 것들이거든. 도대체 여자들이 성기(性器) 하나 밑천으로 해서 시집가 보겠다는 배짱들이 괘씸하단 말야 / 요 영리한 게 결혼하기 전 까지는 절대로 안 된 다는 거야(하인숙의 서울로 가고 싶은 욕망. 그러니까, 주인공 ‘나’에게는 몸을 주지만 그녀는 처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까지 안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너와 잘 생각이 없다던가, 아니면 너는 나를 서울로 보내줄 수 없다는 의미? 잘모르겠음.)」

- 나는 그 여자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다.
- 우리는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괴롭게 웃었다.
- 우리가 잡고 있는 손바닥과 손바닥의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 여자는 울상을 지으며 내 손을 뿌리쳤다.
- 아침의 백사장을 거니는 산보에서 느끼는 시간의 지루함과 낮잠에서 깨어나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느끼는 허전함과 깊은 밤에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서 쿵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밤 바다의 그 애처러운 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의 안타까움,
- 내가 들어 있던 방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윤희중이 머물던 곳을 하인숙과 함께인 윤희중 그렇게 둘에게 제공해 주었다.)
-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 그녀는 처녀는 아니었다.(하인숙은 처녀가 아니었다. 성기를 밑천으로 해서 시집을 가 보겠다는 여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 파도가 거품을 숨겨 가지고 와서 우리가 앉아 있는 바위 밑에 그것을 뿜어 놓았다.
-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하인숙에게 사랑한다는 말)
- 우리가 바닷가에서 읍내로 돌아온 것은 저녁의 어둠이 밀려든 뒤였다.
-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아내는 남편이 바람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인물
나 : 곧 제약회사의 전무이사가 될 예정, 33살. 4년 전 무진을 떠남.
박 : 학교 후배, 과거 문학소년으로 지금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희 : ‘나’의 과거 동거녀. 하지만 그녀는 나를 떠났다.
조 : 세무서장이 된 친구, 자수성가. 나와 반대, 나는 돈 많은 과부를 만남.
하선생(하인숙) : 대학 나온 여자에 대한 부심이 있는 것 같았고, 대학 대학 거리는 점에서, 성악 전공한 음악선생이다.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있는지, 서울로 가고만 싶어한다. 서울로 가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것 같다. 무진을 떠나고 싶어한다. 처녀는 아니었다.

나의 첫 필사노트

김승옥 지음
새봄출판사 펴냄

2017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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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생길만한 학원을 상상으로 한
윤고은 작가 그녀의 상상력과 문장들은 본 받고싶다

1인용 식탁

윤고은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7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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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에 남는 단편 제목...
흡혈귀, 엘리베이터에 낀 그남자는 어땋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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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이 좋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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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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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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