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현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시현

@dtavyczzwcut

+ 팔로우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의 표지 이미지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문학동네 펴냄


도발레 G. 그는 40여 년 만에 아비샤이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스탠드업 코미디에 와서 자신을 ‘봐’ 달라고 부탁한다. 공연을 보고 네가 본 나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네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거리가 궁금한 순간. 오해와 이해와 외면과 설득과 재단과 질문과 절망과 환희와 침범과 유대와 거부와 이끌림과 어째서와 그래가 발아하는 곳. 나와 네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공존해야만 굴러가도록 설계된 생의 필연적인 연극성으로, 모든 영혼들이 ‘나’라는 존재의 정의를 찾기 위해 방황하는 생의 지옥 어디쯤.

생동하는 인간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의하는 일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한다. 과거의 어느 날, 하늘 언저리에 끼워두었던 퍼즐의 파란색 피스가 사실은 바다였는지도 모를텐데. 어쩌면 아비샤이를 곧게 바라보던 도발레의 파란 눈동자였는지도. ‘무엇’에 대한 정의는 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나의 방식, 나의 메타포의 한계에 따라 달라진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밖에 되지 못한다. 색색으로 가져다 붙이는 타인에 대한 정의는 나를 보여주거나, 혹은 정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결국.

그러나 입을 멈추지도 못한다. 주로 나를 위해, 아주 가끔은 ‘너를 위해—라는 착각’으로 살을 붙이고 또 붙인다. 말인지 무엇인지 모를 그것에 무작정 양심을 기대할 수도 없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코미디 중이니까. 한 여자와 이어진 얇은 줄로 그녀의 피와 살을 갉아먹으며 목숨을 연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양심을 인간의 본능으로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작점을 찾을 수 없는 검은 궤적이 그림자처럼 뒤꿈치에 매달려 따라다닌다. 지난 궤적들이 얽혀 저만치에 까만 호수가 있는 것 같이도 보인다. 내가 살아있다는, 살아있었다는 흔적이며 나의 심연이 살고 있는 고독이다. 좋든 싫든 그것은 ‘내 것’이며 여기에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저 검은 덩어리를 마주 볼 때면 나는 가끔 그것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진다. 또 어느 날은 요람처럼 편안해 그 안으로 침잠하고 싶어 진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침범되어서도 안되며,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영혼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

책장이 넘어갈수록, 우스개와 비례하게 촘촘해지는 한 인간이 가진 고독의 밀도에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심연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와 아가리를 찢는다. 누군가의 생이 온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존재를 타고 진동하는 너의 심연에 나의 심연이 공명하며 입천장을 간질이는 것. 그 울림에 목구멍이 뻐근해져 오는 것. ‘너의 인생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바라본다.’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그 외에 다른 수식이 덧붙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마는 것.

생은 틀림없는 비극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이 죽음의 징조이듯 죽음의 징조 또한 살아있음의 증거가 된다. 살아있는 한 어떤 일이든 벌어질 것이고, 그 일이 무엇이건 간에 어떤 의미이건 간에—불가해한 생의 잘은 편린쯤은 이해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희망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생의 비극 안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꽤 기쁘다. 도발레의 말을 빌려본다. “괜찮아, 나를 믿어. 어딘가에는 그런 문장이 말이 되는 우주도 있으니까.”

두 사람이 함께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쇼는 끝났지만 계속되는 생의 코미디에도 울지 않거나 울 수 없는 도발레를 대신해서. 그러면 그는 창 유리에 반사된 아비샤이의 영혼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영혼을 팔기 좋은 날씨야! 내 말이 맞아, 아니면 내 말이 맞아?”

글/ 이시현
brunch.co.kr/@bam12shi
instagram.com/bam12shi
————————————

"존경한다, 피카소, 대단하더구나, 내가 너라면 서둘러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내 말 들어, 어딘가에서 대접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기 없는 거란다, 알아듣겠니?(...) 정말이지 죽음이라는 개념 전체의 밑바닥에 깔린 아이디어가 그거 아니야?” p.44

"생일은 당신들도 알다시피 결산을 하는 날, 영혼을 탐색하는 날이야, 적어도 영혼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이야. 그런데 우리끼리 얘기지만, 현재 나의 상태에서, 나는 영혼을 유지할 자원이 없어.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영혼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정비해줄 것을 요구하잖아, 안 그래? 절대 끝나지를 않아! 매일, 하루 종일, 영혼을 끌고 들어와 손을 봐줘야 해. 내 말이 맞아, 아니면 내 말이 맞아?” p.54

“하지만 봐, 네타니아! 오십칠 년이라는 더럽게 긴 세월 동안 의리를 지키고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라고. 도발레가 된다는 실패한 기획을 추구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부지런하게 달려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봐! 아니, 누가 되는 건 둘째치고 그냥 살아 있자는 기획에!”(...)“그냥 살아 있자는 게 얼마나 놀라운 생각인지 이해할 수 있어? 그게 얼마나 전복적인 것인지?” p.63

"인생이란 이렇게 되고 마는 거야. 인간은 계획하고, 신은 그 인간을 좆같이 망쳐버리지.” p.64

나는 깊고 어두운 기만을 느낀다, 말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기만. p.72

나는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 어리둥절하다. 냅킨에 얼른 기록해 질서를 잡으려 한다. 내가 알던 소년. 여자가 알던 소년. 무대 위의 남자. p.81

"요아브 말이 절대적으로 옳아, 정치는 안 돼! 어차피 우리 애들이 크고 나서야 일어날 일이고, 따라서 걔네들 문제지. 게다가 누가 걔네들한테 우리가 싸질러놓은 걸 먹으며 여기 눌어붙어 있으라고 했나? 그러니 왜 지금 그것 때문에 짜증을 내겠어? 왜 싸우고 말다툼하고 내전을 벌이겠어? 왜 그런 생각을 해? 왜 생각 같은 걸 해? 생각하지 않는 것에 두 손 모아 박수를!” p.92

“내 말은, 있잖아,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뭘 얻느냐는 거야. 나를 볼 때 뭘 알게 되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볼 때? 내 말 알아듣겠어? (...) 내가 거리에서 걷다가 어떤 사람을 지나친다고 해보자고. 그 사람은 나를 본 적이 없어. 나를 전혀 몰라. 처음 보는 거지-쾅! 그 사람이 뭘 파악할까? 그의 마음에 나에 관해 뭐가 기록될까? 내가 제대로 설명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전에 널 본 적이 있는 걸.” 내가 지적했다.
“오래됐잖아.” 그가 즉시 말했다. “나는 내가 아니야, 너도 네가 아니고.” p.104

“그거,”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서 제어 불가능하게 그냥 흘러나오는 거 있잖아. 세상에서 오직 이 한 사람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그거.”
개성의 광채, 나는 생각했다. 내적인 빛. 아니면 내적인 어둠. 비밀, 진동처럼 전해지는 고유성.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말 너머,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그 사람에게서 잘못되고 뒤틀린 것 너머에 놓인 모든 것. p.105

“그래, 아버지는 물구나무로 걷지 말라고 말했고, 그래서 그렇게 했어. 하지만 그때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어.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구하지? 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아? 내가 어떻게 해야 이런 직립성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느냐는 거야. 어떻게 살아 있을까? 그게 당시 내 마음이 움직이던 방식이야. 나는 늘 그런 불안이 있었지......” p.131

유혹. 다른 사람의 지옥을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이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래전에 일어나서 자리를 떴거나, 심지어 야유를 보내 그를 무대에서 쫓아버렸을 것이다. p.134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게 나의 위엄인지 수치인지 오래전에 잊어버렸어.” p.217

"운전병 말이 옳았어. 나는 울고 있어야 했어, 그게 고아가 하는 일이니까, 안 그래? 아니면 반쪽짜리 고아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 내 몸은 그림자 같았어. 아무런 느낌이 없었지. 게다가,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진짜로 알기 전에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어. 그렇지 않아?” p.242
2018년 5월 23일
0

이시현님의 다른 게시물

이시현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시현

@dtavyczzwcut

  • 이시현님의 넛셸 게시물 이미지
'나'는 자궁 안에 여유도 없이 웅크려 따뜻한 양수 안을 헤엄치던 어린시절을 종종 추억한다. 어머니는 이제 더이상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며 '나'는 어머니를 사랑할 수 밖에 없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은 없다. 가끔 어머니와 함께 와인을 나눠 마시며 취하고 팟캐스트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어머니는 지루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가 죽음의 벽을 지날 때 마다 '나'의 무른 두개골을 뚫어 그의 열등한 유전자를 '나'의 뇌에 살포할까 걱정한다. 어머니는 아둔하고 따분하며 진부한 그 남자와 아버지의 살해를 모의 중이다. '나'는 늘 존재(to be)와 그 사이를 떠도는 바깥 세상의 온갖 것들을 상상하는데 시간을 보내며, 딱 한 번 탯줄을 목에 감긴 했지만 태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잊어본 날이 없다.

아아, 나는 호두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나 자신을 무한한 왕국의 왕으로 여길 수 있네.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셰익스피어, [햄릿]

넛셸. 뇌를 닮은 호두껍질 속. 이야기는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있다.'는 태아의 사색으로 시작해 사색으로 끝난다. 구석구석 삶의 아포리즘이 가득이다. 하지만 껍질 속 '나'의 왕국에서는 사색만 가능하다. '내'가 반드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다. 사색의 왕국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 모든 것들을 경험하는 것.

'나'는 브루주아적 삶을 꿈꾸고 빈민이 되는 것을 걱정했지만 결국 악몽이라 여겼던 감옥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양막을 제 손으로 찢어 경험할 수 있는 [삶]으로 몸을 던진다. 작가는 삶에 대한 태아의 열망을 풀이하며 그것이 나에게도 본능이었음을 상기시키고 다시 돌아와 질문한다. 너는 '살아있는-태어나 있는' 거냐고.

불현듯 살펴보니 양 손에 호두가 한가득이다. 지레 걱정하고 겁을 먹는다. 태어나지 못한 생각들이 [삶]앞에 누워 으름장을 놓는다. 달아나지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손 마저 내밀 수도 없어 도무지 어쩌자는 건지 알 수 없는 사색의 왕국에서 퉁퉁하게 살 오른 절대왕 노릇이나 하고 있다. 옛날 옛적, 자신을 태양이라 여기던 왕의 웃을 수 없는 일화들과 그의 죽음에 울리던 환호를 떠올린다. 생각에 갇혔을 때 은근하게 다가와 얼굴을 핥는 독선과 고요한 종말의 풍경을 환기한다.
한밤중의 양치기에서 은퇴하고 장난감 가게에 이력서를 넣을까 싶다. 여름 밤이 문제인지 양이 문제인지 내가 문제인지 여하간 몰아넣기에 종일도 부족한 지경이다. 당분간 호두까기 인형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힘 조절은 필수다.

글/ 이시현
brunch.co.kr/@bam12shi
instagram.com/bam12shi

-----------------------------------------
우리는 언제나 현재 상태에 괴로워 한다ㅡ그것이 의식이라는 선물이 주는 고난이다. p.45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한계요 진실은 이것이다ㅡ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그때, 거기가 아니다. p.54

사랑이 식고 결혼이 무너지면, 그 첫 희생자는 정직한 기억이지. 과거에 대한 온당하고 공정한 회상. 그건 너무 불편하고, 현재를 지나치게 비난하니까. p.96

권태는 희열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고 인간은 기쁨의 해안에서 권태를 바라본다. p.104

죽은 자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p.135

하지만 나조차 안다. 사랑이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권력이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연인들은 갈망뿐 아니라 상처를 안고도 첫 키스에 이른다. 늘 이점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p.166

삶의 얼마나 많은 것이 일어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잊히는지 나는 이미 잘 안다. 대부분이 그렇다. 현재는 주목받지 못한 채 실감개의 실처럼 우리에게서 풀려나간다. 특별할 것 없는 생각들이 헝클어져 수북이 쌓이고, 존재의 기적은 오래도록 방치된다. p.219

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문학동네 펴냄

2018년 5월 23일
0
이시현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시현

@dtavyczzwcut

  • 이시현님의 내 남자 게시물 이미지
• 한 우산 속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둑어둑해진 가로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음은 얼굴을 올려다볼 때마다 무겁게 가라앉는데, 몸은 어깨와 어깨가 살짝 부딪치기만 해도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 기쁨은 지금 이 자리에서 생겨난 감정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서 떠 내려온 불길한 거품 같은 것이었다. p.9
——————————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사랑이 아닐까. 관념은 칼로 자르듯 잘리지 않는다. 우리는 교집합된 경계 앞에 이르러 고민한다고 여기지만 그 교집합이 세계의 전부일지 모른다. 모순과 오해가 난무하며 옳고 그름은 구분되지 않고 명징한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 모호한 세계.

이른 겨울부터 파도가 겹겹이 얼어 얼음의 땅이 펼쳐지는 훗카이도 몸베스. 유빙이 부딫치고 갈라지며 천둥처럼 울리고, 하얗게 얼어가며 멀어지는 해안선에 어디까지가 뭍이고 바다인지 알 수 없어지는 북쪽마을. 때마다 경계가 사라지는 곳에서 해일로 가족을 모두 잃은 하나와 그녀의 양아버지 준고의 사랑이, 모든 것이 시작된다.

끝에서부터 15년 전을 향해 더듬어가는 소설의 여정은 사랑의 환상이 피어나던 과거를 회고하는 이별 후의 어느 날과 닮아있다. 가슴 뻐근한 통증 뒤에 찾아오는 덧없음의 미학은 터부시되는 하나와 준고의 사랑이 보통의 사랑과 다름없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래야만 하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에게 저마다의 사랑이, 저마다의 시절이 있다. 사랑이 넘실거리는 이곳에서 하나와 준고처럼 모두가 ‘내 사람’의 실마리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가족에게서 채울 수 없었던 둘의 오랜 갈증은 서로를 구원자로 만드는 비극을 낳고 만다.

깊은 결핍은 언제나 뿌연 시야를 동반한다. 사소한 것에 온갖 의미가 깃들고 발톱을 세워야 할 타이밍에 맥없이 끌려가며 절박함과 비례하는 상실의 불안은 상대를 뿌리까지 옭아맨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지나치게 투영하는 행위는 사랑을 가장한 폭력이 되어 ‘함께’의 가치도 ‘혼자’의 가치도 퇴색시킨다.

나의 삶은 오로지 나만이 구원할 수 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타인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심연에 잠긴 당신에게 내미는 손의 위로가, 무너질 듯 위태로울 때 스러져 안기고 싶은 품의 위로가 구원이 아니면 달리 무엇일까. 생을 송두리째 구원하고 구원받고자 했다 한들 시절의 특권으로 남아있는 사랑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혼까지 녹아들어 그대로 한사람이 되고 싶다던 하나의 간절함을 나는, 사랑 이외의 다른것으로는 볼 수 없었다.

둘만의 세계에 고착된 그들의 시절을 들여다보며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을 떠올린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지은 두 사람의 세계. 한 사람이 사라지자 언어의 독방에 갇혀버린 남은 사람. 준고라는 모국어를 잃은 하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웠을까. 어느 날 북쪽 마을로 훌쩍 떠나 뭍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을 얼음 위를 걷고 있는 중년의 하나를 상상해 본다. 나락같은 이 이야기가, 경계없이 사랑하던 시절을 향한 그녀의 그리움이 적어낸 길고 긴 회상이기를 바라면서.

글/ 이시현

————————————————

밤에만 남모르게 어른이 되는 아이 같은 기분이었다. 어른이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나는 준고의 딸이며 엄마이며, 피로 가득한 주머니였다. p.441

준고가 이 아이의 무언가를 계속 빼앗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태는 없지만 소중한 어떤 것. 혼 같은 것을. 빼앗기며 자라, 커다란 공동이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다시 빼앗아, 살아남는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른이지만, 성숙하지 않고 썩어 갈 뿐이다. p.347

만약 지금 죽는다면 여기서 시간이 멈춘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지금 죽으면, 차갑고 외로운 뼈가 되어서도, 그 후에 북쪽 땅과는 거리가 먼, 한없이 먼 메마른 땅에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이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시 태어나도, 다시 태어나도. 몇 번이든, 몇번이든 나는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었다. p.283

“그럼, 매일 뭘 하면서 지내죠?”
“......매일, 후회.” p.137

그리고 나는, 앞으로 누구에게서 뭘 빼앗으며 살아가면 좋을까. p.75

#내남자 #사쿠라바가즈키 #나오키상수상작
#사랑 #경계 #결핍 #구원

내 남자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재인 펴냄

2018년 5월 9일
0

이시현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