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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이레 펴냄

읽었어요
이 책은 요즘 삶이 힘들어서 가슴 따뜻하고 잔잔한 소설이나 영화가 끌린다고 했더니 같은 연구실에 다니는 후배가 추천해줘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소설을 추천해 준 그 후배에게 감사한다. 가슴 한편이 따스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이야기였다.

10년 동안 혼자서 파출부 일을 하며 아들은 키워 온 여성 파출부(이 소설에서는 주인공들의 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으므로 그녀를 A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그녀의 어린 아들 루트, 그리고 A의 고용주인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 박사(과거 수학을 전공한 교수였던 박사는 30년 전 교통사고로 인해 머리를 다쳐 기억이 80분 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이렇게 세 사람이 타인에서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박사는 A의 어린 아들이 A가 출근해 있는 동안 혼자 집에 있는다는 것을 알고 아이는 늘 엄마의 곁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며 내일부터 당장 어린 아들을 함께 데리고 출근하라고 한다. 박사는 처음 A의 아들을 만나자 마자 평평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먼 곳까지 잘 왔다. 고맙다. 고마워.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 A는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박사와 자신의 어린 아들 루트 사이에 무언지 모를 따뜻한 연대감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박사는 괴짜 같은 인물이다. 세상 모든 곳에서 수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소수를 사랑하며 수학밖에 모르는 특이하지만 순수한 사람이다. 그런 박사가 어린 루트에게는 늘 진짜 할아버지처럼 시시콜콜한 일상을 물어보고 음식을 덜어주고 숙제를 알려준다. 루트는 그런 박사를 진심으로 의지하고 박사는 또한 어린 루트를 무시하지 않고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들으며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 A도 늘 홀로 키워왔던 루트에게 박사라는 의지할 수 있는 할아버지가 생겨서 기뻐한다. 셋은 평범하게 식탁에 앉아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고 함께 야구장을 가고 생일 파티를 한다. 그렇게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 되어 간다. 신기한 것은 박사에게 A와 루트는 80분이 지날 때마다 항상 낯선 사람이라는 것이다. 늘 80분마다 박사와 A, 그리고 루트는 같은 문답을 반복하며 박사는 또 다시 루트에게 루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A와 루트는 그런 문답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절대로 티내지 않는다. 그런 상대에 대한 서로의 배려가 80분마다 새롭게 만나는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읽으며 필자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지금도 많은 집의 식탁 위에는 대화 한마디가 없고 아이들은 부모님과 소통하려고 하지 않으며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한 대화와 소통, 이해, 배려의 부재가 가정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요즘 뉴스를 보면 가정 폭력, 존속 살해 등의 끔찍한 사건을 충분히 쉽게 접할 수 있다.) 가족이란 사전적 의미에서는 피가 이어진 부모와 아이들을 말하겠지만 과연 그 글 한 줄 속에 진정한 가족의 형태가 있을까. 진정한 가족이란 혈연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 이해하려는 노력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가족이기에 더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며 소통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필자도 많이 반성하고 있다. 오늘 어머니한테 전화라도 한 통 드려야겠다.)

길지 않은 소설인데도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 가장 감상을 쓰기가 힘들었다. 몇번을 썼다 지웠는지. 필자의 글 실력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다.(그것들을 모두 글로 옮기지 못하는 필자 스스로의 글 실력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꼭 이 소설을 읽어보시길. 가슴 따뜻한 이야기 속에서 가족의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인 별점 : 5개 (반드시 읽어보세요. 반드시!)
2018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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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필자는 고전 문학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물론 유명한 고전 몇 권 쯤은(돈키호테, 레미제라블, 구운몽 등) 읽어봤지만 사실 지금 시대의 소설을 읽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러다 오랜만에 고전 문학을 한 번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아볼까 하는 겉멋으로 집어든 게 바로 이 '데미안' 이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부터 아빠 미소를 지으며 읽게 될 줄이야.

데미안의 처음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한다. 중상류층 집안의 독실한 크리스찬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싱클레어는 어느 날 집이 잘 살지 못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공립 학교 학생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 아이들이 서로 자신이 한 나쁜 짓거리를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데 그에 지고 싶지 않았던 싱클레어는 자신이 과수원에서 자루 가득 사과를 훔쳐냈다는 거짓말을 한다.(어릴 적에 한 나쁜 짓은 그 당시에는 마치 영웅적인 행동으로 또래에게 비춰지기 마련이 아니던가.) 그런데 공립학교 학생들 중 우두머리 격이던 프란츠 크로머가 그 과수원 주인 아주머니가 과일을 훔친 사람을 알려주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면서 싱클레어를 이르겠다고 하자 싱클레어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키고 가족들에게 알려질까봐 노심초사하며 자신이 대신 돈을 줄테니 제발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돈이 부족했던 싱클레어는 결국 자신이 한 거짓말에 묶여 크로머에게 돈이 부족하단 명목으로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싱클레어는 자신이 한 거짓말로 인해 이제 영원히 자신은 이전의 착한 부모님의 아들로 돌아갈 수 없다면서 괴로워한다.

귀엽지 않은가? 요즘 시대로 바꿔보면 거짓말을 친구에게 들켜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기 이전의 착한 부모님의 아들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고 후회하고 걱정하는 초등학생 이야기로 볼 수 있으니 말이다.(물론 괴롭히는 친구 녀석은 머리를 쥐어박아주고 싶다.) 거짓말 한 번에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착한 아들이 될 수 없다며 고뇌하는 어린 초등학생이라니. 읽으면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생각보다 재밌는 소설의 시작은 고전 문학에 대한 거리감을 좀 줄여주었고 빠르게 소설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전체적인 소설의 줄거리는 앞에서 말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똑같은 고뇌를 계속해나가며 성장하는 싱클레어의 이야기이다. 싱클레어는 점점 커가면서도 자신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악, 나쁜 면을 인지하고 계속해서 고민한다. 학교에서는 평화와 행복을 노래하는 선만이 올바르고 제대로 된 길이라고 가르치는데 자신 안에는 성에 대한 호기심, 질투, 나태, 반항심과 같은 악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자신은 영원히 선한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고민하는 싱클레어 앞에 어느날 나타난 데미안은 말한다. 선과 악은 원래 하나이고 뗄 수 없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악한 면을 받아들이고 선과 악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라고. 그러한 데미안의 이야기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압락사스라는 신이다. 소설 속에서 압락사스는 이렇게 묘사된다. "압락사스는 신이자 악마인 신이었다." 즉 인간 안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가 선을 대표하는 신을 섬긴다면 악을 대표하는 악마도 섬기거나 혹은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신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즘 시대에야 저러한 사상이 그리 새롭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소설이 나온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절대 선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대에 그 가치관을 뒤흔드는 메시지를 가진 소설이 바로 '데미안'이었기에 이 소설은 위대한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전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예술은 언제나 가장 위대한 것으로 추앙받거나 가장 더러운 것으로 핍박받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읽은 고전 문학은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고 흥미진진했다. 고전이 왜 고전이라 불리는지, 그것이 가지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한 번쯤 그 시대의 시대상을 생각하며 읽어본다면 '데미안'이 왜 아직도 젊은이들의 필독서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재미는 덤이다.)

주관적인 별점 : 4.8개 (재미 있는 고전 문학. 이 말로 충분할 듯 하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민음사 펴냄

2018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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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개인적으로 김영하 작가님을 알쓸신잡에서 보고 알게 된 후 그 분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이 소설은 최근에 영화로도 나와서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번 주말에 시간이 나서 집어들고는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짤막한 문단들이 툭툭 떨어져 내리는 듯한 소설이라 호흡이 짧고 문장이 명료해 금방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지만 담겨있는 의미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인 김병수는 잡히지 않은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45살이 되던 해 사고를 당해 뇌에 손상이 가면서 살인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신이 죽인 여자의 딸 은희를 자신의 딸처럼 여기며 그저 평범한 수의사로 살아간다. 그러다 70세가 되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된 주인공의 동네에서 갑작스럽게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동네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나던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박주태의 눈을 보고 김병수는 그가 연쇄살인을 저지른 범인임을 직감한다. 그 이후 김병수의 주변에 부자연스럽게 계속 출몰하던 박주태. 설상가상으로 김병수의 딸 은희가 자신이 만나고 있는 남자라며 박주태를 김병수에게 소개시킨다. 김병수는 박주태가 자신의 딸 은희를 다음 타겟으로 삼았다고 생각하며 은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박주태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려고 하지만 알츠하이머의 벽에 가로막혀 번번히 실패하며 불안감만이 계속해서 커져간다. 은희를 지키기 위해 25년만에 다시 살인을 저지르려는 과거의 연쇄살인마 김병수와 은희를 노리는 현재의 연쇄살인마 박주태 간의 대결이 주된 내용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사실 마지막 부분에서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김영하 작가님의 손이 꽤 매웠다. 어느 정도의 반전이 있을 거라는 상상은 했지만 그걸 뛰어넘는 결말을 접하고는 멍해 있다가 처음부터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비로소 놓친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단순한 두 연쇄살인범의 대결이 아니라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자세한 해석에 대해서는 더 다루지 않겠다. 이미 많은 해석들이 나와있고 책의 뒷부분에 권희철 문학평론가님이 써주신 해설만 보아도 충분히 자세하고 세심하게 설명이 되어있다.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책 속에 계속해서 인용되는 반야심경의 한 부분인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라는 부분을 집중해서 읽어보기를 바란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김영하 작가님의 글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김영하 작가님을 알게 된 게 비교적 최근이라 '살인자의 기억법'과 '오직 두 사람' 이라는 소설집, 이렇게 두 권 밖에 못 읽긴 했지만 이 두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두 소설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방식에서 묘한 공통점을 느꼈는데 이야기의 문단 사이사이에 의도적 공백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 사이사이에 비어있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나 연결이 약간 부족한 느낌이 있는데 그 부분이 이야기 전개에 있어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공백임에도 글이 써있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느낌? '살인자의 기억법'의 경우 주인공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만큼 문단 사이사이 이야기의 도약이 큰 이유가 설명이 되지만 필자의 경우 '오직 두 사람'에서도 비슷한 문단간의 이야기의 갑작스런 도약이 느껴졌다. 그렇게 이야기 사이사이에 설명되지 않은 공백이 있음에도 그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문맥상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읽힌다는 것은 김영하 작가님의 뛰어난 문장력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글로 쓰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마치 글을 읽고 있는 것처럼 독자를 자연스럽게 이해시킬 수 있다니. 소설을 쓰고 싶지만 매번 부족한 문장력과 서사력에 무릎을 꿇고 마는 필자에게는 그저 부럽기만 할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 다시 한 번 김영하 작가님의 생각의 그릇과 뛰어난 문장력, 이야기 전개 능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생각보다 더 깊고 중요한 철학적 물음을 담고 있는 소설이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소설 자체가 흡입력이 있고 술술 읽힌다.(사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철학적 의미 같은 것을 모르고 읽더라도 상관없지 않나 생각한다. 소설을 잘 읽고 잘못 읽는 게 어디 있겠는가. 독자 한명한명마다 감상이 다르고 해석이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다. 철학적 해석이 궁금하면 그냥 해설 찾아보는게 빠르다. 이 책은 책 뒤에도 친절히 실려있고 말이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두 연쇄살인범의 흥미진진한 대결을 감상한다고 생각하고 읽어보길 권한다. 읽어볼만한 가치는 충분히 차고 넘치는 소설이니.

주관적인 별점 : 4.8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을 들으면서 읽었는데 묘하게 잘 어울린다. 성악가들의 합창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움과 두 개의 악, 연쇄살인범들의 대결이 어우러지면서 기묘하게 소름이 돋는다고 해야하나.)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펴냄

읽었어요
2018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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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마 필자에게는 영원히 느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영역일 것이다. 감정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또는 짐승만도 못하게도 만드는 부분인데,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드는 굉장한 일이 아몬드처럼 생긴 조그마한 편도체 하나로 조절된다는게 참 아이러니하다. 이 소설은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한 소년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소년의 시선에서 담담하게 풀어냈다. 희미한 감정의 끝자락을 아등바등 움켜쥐려고 하는 그의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의외로 찬란해서 더 슬펐다.

읽으면서 저번에 리뷰 했었던 소설인 '노르웨이의 숲'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의 편도체가 작아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감정 표현 불능증에 걸린 주인공 선윤재. 그의 어머니는 윤재가 언젠가는 정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어떻게든 감정 하나하나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지만 윤재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다.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에게 눈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잘 해준다 해도 눈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시킬 수 없듯이. 감정을 직접 느낄 수 없는 윤재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 묻지마 살인에 의해 윤재의 할머니는 죽고 어머니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 윤재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빈 자리를 느끼고 실감하면서도 슬픔이라는 감정만은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비정상일까? 필자에게는 오히려 그런 윤재의 모습이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그 누구보다도 정상적이다. 반면 그의 학교 친구들은 윤재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그를 따돌린다.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주제의식이 이 소설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윤재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하는 곤이. 곤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어버려 미아가 되었다가 나중에 어머니가 병으로 죽을 때가 되어서야 친아버지인 윤교수가 행방을 찾고 곤이를 데려온다. 그러나 이미 세상에 상처받은 곤이는 마음을 걸어 잠그고 폭력과 반항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였고 자신에게 반응조차 하지 않는 윤재와는 악연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윤재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오히려 동질감을 느끼며 마음을 연다. 필자의 생각에 감수성이 풍부하고 순수한 아이였던 곤이가 부모가 없는 세상에서 홀로 버티기 위해서는 그렇게 마음의 문을 잠그고 센 척을 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었을까. 자신의 진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곤이에게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는 마치 동족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곤이가 윤재가 감정을 느끼게 해주겠다는 이유로 윤재의 눈 앞에서 살아있는 나비의 날개를 뜯고 바늘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윤재와 달리 오히려 곤이는 마치 자신의 날개가 뜯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한다. 곤이의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는 순수하고 마음 여린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윤재와 자신의 진짜 감정을 깊숙히 숨기고 겉으로는 거짓 감정만을 내보이는 곤이. 이 얼마나 위태롭고 아름다운 대비인지. 그 둘이 진정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은 언제 터질지 몰라 걱정스러우면서도 자연스레 필자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게 만들었다.

이 소설에서 아쉬웠던 점을 꼽자면 윤재의 첫사랑인 도라의 이야기와 소설의 결말이다. 도라는 윤재의 첫사랑으로 윤재가 처음으로 감정다운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존재이다. 그러나 도라는 중요한 인물임에도 소설 속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윤재가 처음으로 감정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잡게 해 준 인물의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소설의 결말 또한 꼭 이렇게 끝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윤재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결핍이 사라지지 않고 끝났으면 더 좋은 결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치 윤재가 가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부분"인 감정의 결핍이 "정상적"으로 "고쳐"져서 모두가 행복하게 정상적으로 살았답니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하나. 이미 윤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주는 많은 사람들(엄마, 곤이, 도라, 심박사 등등)이 있고 그들에게 윤재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결핍은 비정상적인 점이 아니라 그저 윤재의 하나의 특징일 뿐이다. 남들과 다른 점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에 대해서 돌아보게 만드는 주제의식이 이 소설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윤재의 감정 표현 불능증이 고쳐지면서 윤재가 세상이 생각하는 정상의 기준에 들어가며 끝나는 결말이 오히려 주제의식을 흐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더라도 그런 윤재를 이해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운 점은 있지만 충분히 재미있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교훈(?)도 있다. 그냥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한 소년이 겪는 아프면서도 빛나는 성장기를 목격한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소설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관적인 별점 : 4개(읽어볼만한 가치는 충분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아몬드

손원평 지음
창비 펴냄

읽었어요
2018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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