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이나 써볼까
1. 소설가의 의인법
오한기의 소설 속 화자는 대부분 글을 쓰는 작가다. 그의 소설에서 작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의인법』, 89쪽)고 “문둔병에 걸린 포주만도 못한”(『의인법』, 89쪽) 직업으로 그려진다.
당신은 진짜 당나귀야. 마음만 먹으면 거북이도 될 수 있어. 하지만 소설 쓰기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사람이 될 순 없지. (『의인법』, 281쪽.)
「새해」에서 소설가를 남편으로 둔 아내의 대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당나귀와 거북이가 되는 것은 소설 속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소설을 쓰기 위해 일을 관둔 남편은 아내가 출근 준비를 하는데 침대에 누워 납치를 한다느니 엉뚱한 소리만 해댄다. 소설(만)을 쓰는 이상 사람이 될 수 없는 노릇이다. 서평가 금정연의 말처럼 오한기의 의인법이란 사회적으로 인간 이하의 존재인 나(화자)를 인간인 척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전적으로 무생물이나 동식물, 그리고 추상적 개념과 같은 인격이 없는 대상에다가 인격을 부여하여 표현하는 방법인 의인법의 개념은 오한기 소설의 힘인 상상력의 동력이기도하다.
의인법. 문학의 기초적인 수사법이지. (『의인법』, 290쪽)
「새해」에서 공룡은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화자에게 소설가이자 출판사 편집장인 사내가 한 말이다. 이후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납치에 대한 개념은 현실을 비집고 들어온다. 한상경이 한 손엔 자신의 시집, 한 손엔 갓난아이를 들고 등장하면서부터다. 한상경의 시를 쓰게 만든 건 그의 아들 피츠제럴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한상경이 지하철 화장실에서 ‘주웠다’고 한다. 이후 화자는 납치에 적당한 공간들을 생각하며 상상의 폭을 넓혀 갔고, 얼떨결에 아이를 맡게 돼 납치범의 기분을 만끽하며 소설을 쓰게 된다.
「유리」에서 등장하는 오갈 데 없는 시체를 묻어 연명하는 어린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화자가 쓰는 소설의 내용이다. 이를 상기하던 중 의문을 품는다.
시체를 묻어봤는가? (『의인법』, 118쪽)
백민석도 『내가 사랑한 캔디』에서 총잡이가 아닌 사람이 총잡이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었고, 존 파울즈도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에서 비슷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화자는 소설의 숙명을 곧바로 이야기한다. 이태준이 만들어낸 『장한몽』의 도시 빈민들처럼 공동묘지를 파헤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상상력을 통해 시체를 묻는 형제에 대한 소설쓰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의인법의 초점은 최근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사랑」에서 사람을 돼지로 만들어 사육하고 성적으로 착취하거나, 지난 달 출간 된 첫 장편소설 『홍학이 된 사나이』에서는 인간의 언어를 잃어가며 홍학의 말을 받아적는 남자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중이다.
2. 장르적 요소
최근 젊은작가들의 작품을 평할 때 ‘B급 장르 요소’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동료 작가인 이상우의 소설에서는 타락한 어떤 도시의 풍경과 혼란한 내면 묘사를 그릴 때 각종의 하위 장르들이 하나의 텍스트 내에서 종횡으로 절합하고 이종교배 된다. 이것은 소설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들며 마치 소설적인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소설을 쓰고자 하는 태도를 형상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오한기의 소설에서도 포르노 작가, 킬러, 영화배우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다른 젊은 작가들과 구별 되는 지점은 장르적 요소로 문학성을 지지하는 태도다.
「유리」에서 이유 없는 청부 살인을 하는 킬러를 우연히 만나지만 그러한 우연이 망상적 상상력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창밖에는 ‘자전거를 세워두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푯말이 우연에 기대 만든 알레고리의 나약함을 상징하듯 빽빽이 추차된 자동차 사이에 애처롭게 서 있었다. (『의인법』, 138쪽)
킬러과 조우하며 지내는 이야기는 작가의 소설 쓰기에 대한 과정으로 고쳐 읽어도 무관하다.
「더 웬즈데이」에 등장하는 칠레의 포르노 소설가 미구엘 페레는 현대 포르노의 대부로 등장한다. ‘포르노는 고환과 음문에 투영된 현실’ 이며 ‘하고싶은 말이 많아도 메타포가 과하면 안 된다’는 등의 명언을 남기기도 한다. 한상경이 성서처럼 들고 다니는 『하차장의 창녀들』은 당시 70년대 칠레 혁명기 쿠데타 군부에 대항하는 정부군의 투쟁을 창녀 하켈리네의 시점으로 그려낸 걸 보면 문학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화자의 포르노 속 조루로 설정된 남자들은 궁핍과 허무를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클린트이스트우드」에서 서부극의 종말은 문학의 종말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화자는 서부개척시대와 베트남전쟁, 자본주의와 냉전체제, 마르크스와 나치와 무솔리니까지 서부국은 당시 현실과 맥락이 닿아 있고 그 정신은 현재까지 유효하다고 목소리를 낸다. 화자가 그리워하는 건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즉 오한기의 장르적 요소는 소설에 대한 적대적 거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소설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의 흔적을 보여주는 매개체이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유리」는 메타소설이며,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 반성문, 각오, 소설을 쓰는 태도, 외부의 평가, 내가 평가한 내 소설, 소설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고민으로 5년 동안 썼다고 밝힌 바 있다.
3. 상호텍스트/파라텍스트
내가『매시노프』에서 배운 거라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실을 접목시키거나 허구를 만들어내 현실 속에 배치하면 효과가 그만이라는 게 전부다. 쓸데없는 것을 강조하면 더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것도 체득했다. 상징과 알레고리에 대한 신뢰를 점차 잃어갔지만 말이다. (『의인법』, 116쪽.)
한상경의 말에 따르면 진실과 허구, 역사와 전망이 얽힌 햄버거의 세계는 온갖 메타포를 간직한 보물창고였다.(『의인법』, 154쪽.)
오한기는 강박적으로 대치되는 무언가를 이으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볼라뇨 작품들의 영향일 것이다. 과거 오한기의 작품을 본 이들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했다. 정지돈은 오한기 소설에 대한 위로로 반사실주의가 닮았다는 나보코프를 추천했다.
서점은 거대한 파라솔로 뒤덮인 것처럼 어두침침했다. 여기엔 수많은 책들이 있다. 책들은 W의 아버지처럼 때리지 않는다. 브록스 일당처럼 괴롭히거나 “같이 할래?”라는 달콤한 말로 기만하지도 않는다. 책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처럼 우리에게 속삭인다. 파라솔 그늘 밑에서도 넌 혼자가 아니라고. (『의인법』, 31쪽.)
등단작 「파라솔이 접힌 오후」에 등장하는 서점에 대한 묘사는 마치 오한기가 소설을 쓴 첫 순간, 퇴고과정, 작가가 된 후, 앞으로 쓸 소설이 탄생하는 자리를 형상화 시킨 것 같았다. 수많은 책들은 소설에 많은 개입을 한다. 조현, 정지돈, 이갑수 등의 작가들도 시도하는 문화적, 역사적 기성품에서 슬쩍 가져와 이를 새롭게 조합하는 지식조합형 소설군으로도 분류될 수 있다. 오한기는 자신의 전작들, 소설속의 소설들 또한 거침없이 배치시킨다. 『의인법』을 읽고 나면 유기적으로 연결된 소설들이 많아 ‘아코디언’이라는 사물처럼 상상하기도 했다.
어떤 리뷰에서는 그의 소설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의인화되는 대신 ‘오한기화’ 될까봐 두렵다고 했다. 서평가 금정연의 표현대로 ‘오한기 월드’의 시즌1이 『의인법』이고 「사랑」이 일종의 스핀 오프라면 『홍학이 된 사나이』는 이 개별의 것들에 대한 통섭 혹은 완성이 아닐까. 그의 진한 문학적 세계에 발을 담그게 된 독자라면 장편의 제목을 『‘문학’이 된 사나이=오한기』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 ) 소설이나 써볼까’의 괄호는 오한기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읽었어요
2
두 세계를 배회하는 목소리
1. 이름과 존재
표제작이기도 한「훌」에서 친구 ‘훌’과 동료 ‘훌’이 등장한다.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화자는 이름은 같지만 철저하게 대비되는 두 존재 사이를 배회한다. 혼란을 가중시킬 것 같은 관계와 이름의 설정이지만 구도는 매우 단순하다. ‘친구 훌’은 철저히 개인적인 사람이다. 노동절로 설정된 휴일에는 ‘세제의 향기와 커피 냄새, 도시의 봄바람, 밀폐되지 않은 자유로운 공간, 적당한 오월의 안개…이런 한가운데서 잠들고 싶어’(P.60.) 한다. 반면, ‘동료 훌’은 선동과 연속극을 싫어하고, 권투 경기를 관람하러 가며, 남들이 기피하는 사람인 몽고 여자와 어울려 다니고 게으름을 용납하지 못하며 특히 휴일에 집에 박혀 있는 것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대비되는 두 존재처럼 화자가 집작하는 (고장난)텔레비전에서는 두 개의 채널만 나온다. 통신강좌와 연속극이 나오는 채널이다. 하지만 화자가 원하는 <미인에게 청혼하다>라는 연속극 대신, <보리스 고두노프>라는 연극이 방영된다. 휴일을 함께 보내기로 한 친구 ‘훌’에게 화자는 밖에 나가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친구 ‘훌’이 잠든 사이 화자는 음식 재료를 장만하기 위해 광장을 가로지르게 되고, 그곳에서 직장 동료인 (중국여자로 알고 있던)몽고여자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음 날 화자는 ‘동료 훌’로부터 ‘과격한 행동주의자’(p.91.)라며 광장에 나간 것이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화자는 ‘친구 훌’을 위해 식료품을 사러 나가는 길에 광장을 지나쳤을 뿐이고, 그 사이 ‘친구 훌’은 떠났다. 결국 화자는 어느 ‘훌’의 세계에도 스며들지 못한 채 지친 몸을 이끌고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배회하는 자의 이미지는 ‘싫증이 나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앉은 자리를 옮기듯이 그 도시를 떠나는’(p.103.) 화자가 등장하는「양곤에서 온 편지」에도 등장한다. 시 낭송과 좋아하는 책과 편지를 꺼내 읽다가 빛을 향해 걸어 나왔을 때 화자가 도착한 곳은 ‘극장의 무대’이다. 관객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된 듯 하지만 화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잠든 남자일까? ‘책을 읽는 것처럼’(p.121.) 그 남자를 바라보는 사람일까? ‘1994년 노동절’에 감옥에 간 사람일까? 골방에서 편지를 쓰고 책을 읽던 화자가 ‘무대’위에서 만난 세계는 ‘광장’의 세계와도 닮아있다. 각기 다른 모든 존재는 하나의 ‘나’일수도 있을 것이다.
「마짠 방향으로」에서는 ‘빈 건물이 더 많은 정도로 공동의 지역’에 위치한 곳에 거주하게 된 화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렀던 ‘개별적 존재’들의 흔적을 추적한다. ‘펜으로 글을 쓰는’ 마지막 거주자, ‘늘 여행을 하고 외로움을 타는’ 젊은 사람, ‘혼자 파티를 열고 즐기는’ 이웃, 동성 커플까지. 제목에 언급된 ‘마짠’이라는 곳은 ‘사회주의적 통일성과 효율성을 자랑하는 똑같은 모양’(p.144.)의 건물들이 ‘일정하게 같은 높이로 지어진’채 공실이 즐비한 도시이다. 그런 거리를 걸을 때 ‘이름’에 대해 인식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나는 말이지. 언제나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왜냐하면 너무 흔한 이름이어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었거든(…) 거리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어. 그래서 뒤돌아보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야.(p.152.)
이름은 존재의 개별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소설에서 계속 언급되는 노래 속 가사에는 ‘동성애자 소녀’라는 소수성을 가진 존재들이 ‘거리’를 향해 걸어 나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존재들을 쳐다본다. 배수아의 소설에 등장하는 ‘소수성’을 획득하고 있는 ‘개별자’가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계와 단절되어 있지 않고 ‘광장’, ‘무대’, ‘거리’등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구태의연한 인습을 거부하기 위해서 머리를 자른 거야.”(p.69.)
애인과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광장을 가로질러 가던 ‘훌’은 시위 중인 직장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여성 시위 참가자 중 한명은 머리를 짧게 자른 것이 인습을 거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반면 노동절을 집에서 보내기로 한 화자 ‘훌’과 친구 ‘훌’은 티비가 고장 나서 드라마를 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자기만의 취향을 늘어놓지만 다수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즐겨보는 것이다. 보통 소수성을 가진, 개별자로 존중받고 싶은 존재들이 인습을 거부한다는 편견이 깨지는 장면이다. 통념적으로 다수를 상징하는 ‘광장’의 세계에 있는 ‘훌’과 개인의 시간을 ‘방’의 세계에서 즐기는 ‘훌’ 그리고 그 두 세계를 배회하는 ‘훌’은 이름만으로 구분되지 않고, 사회적 통념으로도 완벽하게 수렴되지 않는 존재들인 것이다.
2. 타인
「회색 時」에서는 ‘수미’, 「시취」에서는 ‘P’라는 과거의 인연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재회하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개인의 역사 중에서 타인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타인은 과연 실재적인 것의 이름인가’(p.34.) 라는 사유를 하는 화자는 현재 채식주의자와 살면서 과거에 몰입하던 여자 ‘수미’와 재회한다. 비행기 격추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수미는 시간이 지난 뒤 화자 앞에 나타난다. 하지만 화자는 ‘나는 왜 수미에게 집중했던가’ 자신을 의아해 하고, ‘나는 바로 나 자신이 타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에 이른다.
「시취」에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그는 ‘P는 젊은 시절의 그가 미숙하게 판단한 것보다는 우둔한 여성이어서,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접어든, 오직 시취의 시간을’(p.253.) 이라고 하며 P가 뿌리고 나온 천박한 향수를 경멸한다. 이미 P의 편지에서 ‘고독하다’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부터 상대를 부정한다. 하지만 그는 어느샌가 쓸쓸하다는 감정을 토로하게 되는데, 그것은 과잉되거나 부조리하거나 철면피한 것일 뿐이라고 자책한다. 그는 과거 결혼에서 ‘공동의 공간에서 친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 상태에 대해 숨이 막힌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두 작품 속 과거의 인연들은 고유한 내밀함을 가지고 있던 존재에서 변질되어 있다. 그것은 과거와 다른 가치판단을 갖게 된 주체에 의해서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거나 왜곡된 대상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는 소녀란, 단지 나이가 어린 여자를 말하는 일반적인 명사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존재만이 획득할 수 있는 고귀한 육체와 정신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p.243.)
화자가 매혹되는 인물은 일반적 명사의 의미 속에 갇힌 상태가 아니다. 시간이 지난 후 그 대상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더라도 ‘매혹 됐던 순간’은 계속 기억 속에서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현재의 시간 속에 놓여 타인을 매개로 과거 나의 시선과 시간과 가치의 의미 변화들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그것을 타인의 가능성이라고 하자. 화자의 의미부여를 통해 특별한 존재가 되는 타인을 모습을 통해 화자도 존재증명을 하는 셈이다.
3. 세계
배수아의 소설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가치 안에 수렴되지 않는 개별자로 느껴지는 인물들은 거리로 나가기도 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사실과 다르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과거의 시간들이 왜곡되기도 한다. 하지만 도시를 ‘배회’하는 인물의 감각이 차갑지만은 않다. 배회 중에 성사되는 ‘만남’은 비록 실패했다는 회의적인 감정이 들게도 하지만, 개별자의 심정을 토로하게 만들고 귀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독하지만 무력함에서 빠져나와 운동성까지 느껴지는 인물들의 온도는 작가 배수아의 사람,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느껴졌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일관성, 사회적 통념, 질서를 파괴시킨다. 공간의 경계(양곤에서 온 편지), 시간의 일관성(회색 시), 이름, 호명의 일관성(훌), 인물까지 해체(마짠 방향으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개인은 타인 세계와 분리된 시공간에 있더라도 TV, 연극, 편지, 무대, 책 등의 매체를 통해 연결되기도 한다. 타인과 세계와 마주치면서 끊임없이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의미로 결정지을 수 있는가’라는 충돌 앞에서 개별자의 존재 가치가 생성되는 것이다.
“나이나 다른 조건은 상관없고 서로 마음이 통하고 진정으로 따뜻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 친구를 만난다면 함께 살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오래오래 말입니다.”(p.159.)
배수아의 인물과 소설의 세계는 ‘조건’없이 ‘마음’이 통하는 친구(타인)를 찾기 위해 서성이고, 기다리고, 나아가고, 배회하는 중이다.
읽었어요
1
샐
저도 지금 호퍼의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들 읽고 있어요!
2018년 7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