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C님의 프로필 이미지

PHC

@tgdq1le9cllk

+ 팔로우
골든 슬럼버 (온 세상이 추격하는 한 남자,ISAKA KOTARO COLLECTION)의 표지 이미지

골든 슬럼버

이사카 고타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재밌으나 마지막이 조금 아쉽


머릿속에 있던 마개가 쑥 뽑히고 아오야기와 함께한 기억들이 벌컥벌컥 흘러나온다. 히구치는 허둥지둥 마개를 찾는다. 그리고 와인으로 범벅이 된, 아니 기억으로 범벅이 된 손으로 마개를 막는다. 그대로 기억이 끊긴다. 이미 넘쳐흐른 기억의 단편은 동강난 장면으로 머릿속을 펄럭펄럭 날아다닌다. 마치 현상된 사진처럼, 흔들흔들 떨어지다 이따금식 뒤집힌다.


평화의 시대에는 누구나 정론을 뱉어낸다. 인권을 주장하고 정공법을 늘어놓는다. 그러다 폭풍이 일면 이성을 잃는다. 무엇이 옳은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소동에 휩싸인다. 다 그런 법이리라.


“여전하네, 모리타는.”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아.”


“난 본적 없는데, 히구치 결혼 상대. 성이 히구치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어.”
“듣고 싶어?”
“듣고 싶냐니?”
“너와 히구치 남편 비교.”
“아니, 듣기 싫어.”
“무승부던데.”


“우리도 너무 익숙해. 너무 오래 있다 보니 함께 있는 게 평범해지고, 상대방의 대수롭지 않은 부분까지 눈에 거슬리게 되고.”
“잠깐만.”
“어쩐지 항상, 그냥 둘이 붙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만.” 아오야기는 손에 든 판 초콜릿을 흔들었다.
“말이 엉망진창이야. 앞뒤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는 권태기 부부 같아, 벌써부터” 히구치가 웃는다.
“괴로워졌어.”


히구치와 헤어지자, 뻥 뚫린 구멍만 남았다. 가슴과 머리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났다.


전파가 통하지 않는 곳에 있는지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목소리가 들린다. 전파가 통하지 않는 곳이라니, 그게 어딘데, 하며 아오야기는 얼굴을 찌푸린다. 영원히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 곳으로 친구가 사라져버린 듯한 기분에 시달린다.


“도대체가.” 가즈는 아오야기와 모리타 앞에 앉자 설교를 시작했다. “12월에 접어들어서야 부랴부랴 크리스마스 때 외로우니까 미팅을 해서 여자 친구를 마련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안이하다고요. 너무 늦었어요.”


“여자 친구란 거, 사귈 때는 지겹도록 붙어 다니고 서로 모르는게 없으면서, 헤어지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사이가 되나 봐요.”
“그러게.” 아오야기는 그 말에 진심으로 동의했다.


“불꽃놀이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이 보는 거잖아. 내가 보고 있는 지금, 어쩌면 다른 곳에서 옛 친구가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유쾌하지 않아? 아마 말이지, 그런때는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같은 생각?” 아오야기는 무심코 반문했다.
“추억이란 건 대부분 비슷한 계기로 부활하는 거야. 내가 떠올리고 있으면 상대도 떠올리고 있지.”


“이미지란게 그런거 아닌가? 별다른 근거도 없이 사람은 이미지를 갖게되지. 세상은 이미지로 움직여. 맛은 똑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레스토랑이 번창하는 것은 이미지가 좋아졌기 때문이야. 서로 모시려고 아우성치던 배우의 일감이 떨어지는 건 이미지가 나빠졌기 때문이고. 총리를 암살한 남자인데도 큰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은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지.”


애인과 친구는 어떻게 다른가 하면 말이야. 예전에 히라노가 주장한 일이 있었다. “애인은 있지, 헤어지면 기본적으로는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없어.” 하고 그녀는 잘라 말했다.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절대 무리야. 뭐,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헤어진 옛 남자 친구의 인생은 자신의 인생과 무관해지지. 어디서 뭘 하든 상관없어. 안 그러면, 그 순간 함께 있는 애인이나 배우자한테 실례잖아.”


“그런데 참 신기하지. 사귈 때는 허구헌 날 연락하던 사이인데, 헤어지고 몇 년 지나면 전혀 관계도 없이, 영원히 접점도 없이 살아가니까. 신기하지.”
2018년 9월 9일
0

PHC님의 다른 게시물

PHC님의 프로필 이미지

PHC

@tgdq1le9cllk

올해 읽은 책 중에 제일 재밌었음
하루만에 다 읽음


지난번 생애 때, 즉 우리가 결혼하기 전이었다면 그는 직접 승무원을 불러주었을 것이다. 내가 사귀던 완벽한 신사는 어디로 갔을까? 모두 꾸며낸 것이었을까? 상냥함과 쾌활함의 외투로 진짜 자신을 감춘 채 나에게 잘 보이려 했던 걸까? 내 시선을 느낀 잭이 신문을 내려놓았다.
“당신 대체 누구야, 잭?” 내가 조용히 물었다.



어쨌든 잭은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가오는 걸 생각하면, 그가 퇴근하는 길에 자동차 사고에서 죽기를 절박하게 기도하게 된다.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 밀리가 우리와 살게 되는 6월 말 전에는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 후에는 너무 늦을 테니까.



“난 너에게 악감정 없어, 그레이스.” 잭이 걸어오며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태국에서 설명했듯이, 넌 내가 늘 꿈꾸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야. 내가 일종의 고마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 그러니 여기 생활이 가능한 한 유쾌했으면 좋겠어. 적어도 밀리가 오기 전까지는. 일단 밀리가 이사 오고 나면, 유감스럽지만 극도로 불쾌해지겠지. 물론 너뿐만 아니라 밀리도.



결국 모든 일이 끝난 후 나는 다시는 볼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내 방으로 돌아왔다. 잭이 그렇게 선뜻 쇼핑 동반을 허락했던 건, 이미 태국에서 겪었던 바와 같이, 나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었다가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멍하니 에스터를 쳐다본다. “그럼 왜?”
에스터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밀리의 방 색깔이 뭐였지, 그레이스?”
나는 잠시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빨간색.” 목소리가 갈라진다. “밀리의 방은 빨간색이었어.”
“그럴 거라 생각했어.” 에스터가 조용히 대꾸한다.






비하인드 도어 | B. A. 패리스, 이수영 저

비하인드 도어

B. A. 패리스 지음
arte(아르테) 펴냄

읽었어요
2018년 9월 15일
0
PHC님의 프로필 이미지

PHC

@tgdq1le9cllk

탈북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은 1인당 정착금 700만원, 주거지원금 1,300만 원이 다였다.


생활총화는 북한의 노예사회를 유지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자기 검열과 상호 검열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형을 만들어 낸다.


김정일이 남북 유엔 동시가입을 결정하면서 중소에 북미 수교를 보장하라고 요구한 것은 남북 교차승인 반대라는 김일성의 두 번째 원칙마저 뭉개버린 조치였다. 남북 교차승인이란 중소가 한국을, 미일이 북한을 교차해 승인한다는 뜻이다.


「남북 기본합의서」라고도 불리는 이 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후에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은 합의였지만 북한으로서는 남북 유엔 동시가입을 합리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1월 한국과 미국은 한 해 동안 중단했던 팀스피리트 훈련의 재개를 공식 발표했다. 북한은 이를 핑계로 이 해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다. 수십 년 동안 잠복해 있던 북핵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와 1차 북핵 위기가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위기가 4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한과 중국, 동구권 국가들은 소련 두브나(북한에서는 ‘류블리나’로 부른다) 합동원자핵연구소에 연구원을 보내 핵 발전 기술을 배웠다. 북한의 경우 1956년 물리학자 30여 명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주로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명목상 원자력 발전 기술을 배우러 간 이들은 당으로부터 ‘핵무기 개발을 염두에 두고 공부하라’는 지침을 받은 상태였다. 북한이 실질적으로 핵 개발을 개시한 순간이었다.


김일성은 중국 방문 직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비핵화 구호를 내세워 미국과 중국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전략이었다. 1980년 북한은 일본 사회당과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공동선언 형식으로 발표했다. 또한 1985년 ‘조선반도 비핵화 평화지대화’를 주장하고, 같은 해 12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했다.


김정일은 남북회담을 이용해 미국의 압력을 이완시키는 전술을 썼다. 북한이 고립과 위기에 빠질 때마다 어김없이 꺼내드는 카드가 남북회담이었다.


앞으로 북핵폐기의 최종단계는 결국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를 통한 검증인데 북한 내부의 정치범수용소와 김씨 가문만 사용하는 ‘특수지역’을 수없이 가지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죽어도 CVID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북한이 핵물질에 대한 의혹을 투명하게 해명하지 않자 한국과 미국은 1993년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 재개를 선언하고 북한이 핵 사찰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반발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일어난 것이다.


김일성이 죽기 전에 카터와 회담한 성과는 있었다. 이 해 10월 제네바에서 「조미 기본합의문」이 채택된다. 이른바 「제네바 핵합의」이다. 북한은 핵 개발을 포기하고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 경제적 보상과 안전 보장을 약속하며, 북미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와 남북대화를 계속 추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제네바 핵합의는 북한의 시간 끌기용 기만극이었다. 제네바로 협상을 떠나는 강석주에게 김정일이 내린 지침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시간을 벌어라’였다. 애초부터 김정일은 합의를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고 시간만 벌자는 전략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내린 지시와 이에 대한 집행 결과를 각 부서별로 정리하고 기록해 둔다. 이것이 방침집행등록대장인데 검열이 실시될 때마다 가장 먼저 들여다보는 문건이다. 김정일이 지시를 내린 순간부터 이를 포치(관계 부서에 전달)하고 집행대책을 어떻게 토의했으며 시간별로 어떻게 집행했는가가 담겨 있다. 조금이라도 작성을 지연시켰다가는 감당할 길이 없어 매일 1시간 간격으로 빠짐없이 기록한다.


외교관으로 선발되기 위해서는 본인의 친켠(친가) 6촌, 외켠(외가) 4촌, 처켠(처가) 4촌까지 북한의 핵심 계층에 속해 있어야 한다. 친척 중에 형사범이나 출당철직과 같은 정치적 과오를 범한 사람이 있어서도 안 된다. 혼자만 북한 체제에 충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일가친척 수십 명이 사상적으로 흠결이 없어야 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 분위기도 북한에 불리했다. 공화당 후보가 이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공화당은 이미 ‘제네바 합의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었다.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면 북미 관계가 더욱 악화될 것이 명백했다. 핵실험까지 아직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북한으로서는 숨고르기가 필요했다.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대화 제의를 잘 이용하면 몇 년간은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반적으로 대사의 해외근무 연한은 4~5년이고 대사 이하 외교관들은 3~4년 정도다. 이러한 관례에 맞지 않게 오래 근무하는 외교관들은 정찰총국과 같은 특수기관 일꾼들 아니면 북한노동당 ‘3층 서기실’이 부여한 특수과업을 수행하는 이들이다. 3층 서기실이란 청와대 비서실 같은 실세 기관이다.


1990년대 초부터 위기에 몰렸던 북한은 6·15남북공동선언의 채택으로 채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다시 활력을 찾았다. 2018년 1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 리선권 대표는 “6·15시대의 모든 것이 귀중하고 그립다”고 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북한 사회에서 6·15시대의 의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총화’는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용어 가운데 하나로 ‘진행 중인 사업이나 생활에 대해 그 결과를 분석하고 결속 지으며 앞으로의 사업과 생활에 도움이 될 경험과 교훈을 찾는 것’이라는 뜻이다.


프랑스가 북한 고위층을 마음대로 드나들게 한 데는 무언가 반대급부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프랑스에 북한 관련 고급정보가 엄청나게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프랑스가 북한의 핵 개발 야욕을 간파하고, 아직까지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믿는다.


스웨덴은 한반도에 3개 대표부를 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이다. 서울과 평양, 판문점에 대표부가 있다.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관은 북한과 외교관계가 없는 미국의 이권대표부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울과 평양은 그렇다 치더라도 판문점에 무슨 스웨덴 대표부가 있을까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판문점 정전협정 중립국 감독위원회에 스웨덴 대표가 엄연히 존재한다.

한반도와 특수한 관계에 있다고 자부하는 스웨덴은 항상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중재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9·19 공동성명 후 2차 북핵 위기는 가라앉는 듯했다. 이 성명 역시 김정일의 이중플레이와 시간 끌기의 성과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직도 한국 일각에서는 9·19 공동성명의 파탄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합의를 지키지 않고 압박해 북한이 핵 개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것이 북한의 핵 개발이다. 성명이나 합의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의미다.


6자회담은 6차 2단계 회의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름만 남았지 실익은 없었던 유명무실한 회담이었다.


영국의 대북정책은 ‘비판적 관여’로 표현된다. 대화와 인적 교류를 통해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요컨대 ‘영국식 햇볕정책’이다. 2005년 영국이 이 정책을 채택하기까지 북한대표부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2차 북핵 위기로 미국이 군사적인 압박과 대화를 병행하고 있을 때 영국 주재 북한대표부는 끊임없이 영국 정부를 설득해 ‘비판적 관여’ 정책을 이끌어냈다.


김정은이 이렇듯 공포정치에 매달리기 시작한 이유는 그가 지닌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그 상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김정은은 후계자 확정 이후에도 자신의 생년과 학력, 생모 등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항은 오히려 한국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학 시절 여권 등을 근거로 1984년생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스위스 베른의 공립중학교 등에서 공부했으며 생모는 고영희 또는 고용희로 밝혀졌다.


자신의 생모가 김정일의 공식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김정은은 심리적 불안감까지 느끼는 듯하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간부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는 자격지심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은에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정일의 본처인 김영숙과, 첩이나 다름없는 고영희를 동시에 기억하는 간부들이 많기 때문이다.


장수길을 족친 보위사령부는 장수길과 리룡하, 장성택이 무슨 정변 음모라도 꾸민 것처럼 확대해석해 김정은에게 보고했다. 장성택에게 쌓였던 김정은의 분노가 결국 폭발했다. 장성택이 보위사령부보다 먼저 김정은을 찾아가 차근차근 설명했다면 ‘장성택 일당 숙청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부하들의 과잉충성과, 간부 조직의 보고 체계를 몰랐던 김정은의 흥분이 숙청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2014년부터였던 것 같다. 유엔에서도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북한 입장에서는 핵문제보다 김정은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인권 문제가 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북한 인권 문제가 부각될 때마다 ‘핵 위기를 고조시켜 인권에 쏠린 여론을 핵문제로 옮겨가게 해야 한다’던 김정일의 지시가 생각나면서 나는 김정은도 인권 문제를 핵 위기로 덮어버릴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는 김정일이 오판했다. 전두환 대통령만 제거하면 친북정권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을 일으킨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러나 한국은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제거된다고 해서 급변하는 체제가 아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을 때 북한이 자기모순에 빠진 것도 통일전략전술의 논리를 맹종해서다.


6·25전쟁은 수백 만 명의 동족살상이라는 비극만 남긴 채 끝났지만 전쟁 후에도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들의 이상과 열정을 이용해 1960년대 말까지 당내에서 모든 파벌을 숙청하고 유일한 지도체제를 수립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복지체계를 세웠다.


5·25교시 후 북한 주민은 핵심계층과 동요계층, 적대계급 잔여분자로 나눠지게 되었다. 핵심계층에 들어가지 못한 주민은 신분상승이 불가능했다. 능력이 모자라도 핵심계층에만 속하면 자동적인 신분상승이 가능했다. 조선시대처럼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갈라지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북한은 봉건사회도 모자라 노예사회로 퇴행했다. 나는 그 시기를 김일성이 죽은 1994년 이후로 본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내세운 선군정치는 군사독재를 넘어 노예사회와 같은 체계를 수립했다. 사람의 목숨이 노예주인 김정일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좌우되었다. 김정일은 프룬제아카데미 사건, 카잔 유학생 사건, 독일유학생 사건, 심화조 사건 등을 일으켜 무자비한 처형과 숙청을 남발하고 마지막에는 부하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유럽에 북한 화폐를 대량으로 매각해 인플레이션이 극에 달했을 때도, 화폐개혁으로 북한 역사상 최초로 주민들이 반기를 들었을 때도 김정일은 책임을 회피하고 부하의 목숨을 앗아갔다.


북한은 공산주의와 성리학 개념이 결합된 특수한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다. 성리학의 기본은 정통성과 명분이다. 모든 것이 막무가내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 북한도 정통성과 명분을 중시한다. 북한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 있는 유교 의식이 김정일에게 후계자로서의 정통성과 명분을 달아준 것이다.


김정은은 권력 획득 과정에서 카리스마를 창출하지 못한 것에 더해 태생적인 콤플렉스가 있다. 스스로 백두혈통임을 내세우지만 김일성의 인정을 받지 못한, 갑자기 튀어나온 이상한 백두혈통이다. 더구나 김정은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최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간부들과 북한 주민들이 ‘나를 인정해 줄까’ 하는 불안과 초조를 느낄 수밖에 없다.


북한에는 헌법보다 높은 법이 있다. 김씨 3대의 ‘말씀’,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의 10대원칙’, ‘조선노동당규약’과 같은 수령과 당의 정책 등이 그것이다. 당의 정책은 주체사상 또는 김일성·김정일 주의만을 믿어야 한다고 규정돼 있으므로 북한에서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행위다.


독일이 통일된 것은 동독 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서독 TV를 시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의 사례를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 동독 주민들과는 달리 북한 주민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3권 분립, 인권 등에 대한 초보적인 개념조차 없다. 충격적이지 않으면서 북한 주민의 의식에 부드럽게 다가갈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과 국제사회의 다양한 모습, 특히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의 원리를 북한 주민의 정서와 경험에 맞게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3층 서기실의 암호 | 태영호 저

3층 서기실의 암호

태영호 지음
기파랑(기파랑에크리) 펴냄

2018년 9월 14일
0
PHC님의 프로필 이미지

PHC

@tgdq1le9cllk

요즘 정당과 기업 등이 생색을 내며 내세우는 ‘청년’마케팅은 역설적으로 청년세대의 위기를 반영한 일종의 트랜드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가 청년세대의 위기를 불러왔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앞다투어 ‘청년’을 내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명견만리

KBS '명견만리' 제작진 지음
인플루엔셜(주) 펴냄

2018년 8월 19일
0

PHC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