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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린 김지영 씨는 동생이 특별 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원래 그랬으니까, 가끔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자신이 누나니까 양보하는 거고, 성별이 같은 언니와 물건을 공유하는 거라고
자발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했다.
어머니는 터울이 져서 그런지 누나들이 샘도 없고, 동생을 잘 돌봐 준다고 항상 칭찬했는데,
자꾸 칭찬을 받으니까 정말 샘을 낼 수도 없었다. (25-26p)
교사는 쭈그려 앉으면 속옷이 보일 수 있으니 치맛단을 잘 붙잡으라고 말했지만
여학생은 끝까지 치맛단을 추스르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빼꼼빼꼼 속옷이 보였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오자 선생님을 오리걸음을 중단시켰다.
역시 복장 불량으로 적발되어 나란히 교무실로 끌려가던 같은 반 아이가 왜 치맛단을 붙잡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 옷차림이 얼마나 불편한 건지 두 눈으로 확인하라고."
'82년생 김지영 씨'는 자주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굳이 얘기를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괜한 갈등을 빚고 싶지 않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살아온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읽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김지영 씨가 운이 나빴다고. 저런 일이 어떻게 한 사람한테 계속 일어날 수 있냐고. 작가는 통계와 자료로 답한다. 그 시대를 겪은 누군가는 끊임없이 겪었던 일이다. 그 누군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뭐 저 정도 일 가지고 그러냐고. 할머니와 어머니에 비하면 그녀가 겪은 일은 아무것도 아니며, 직접적으로 신체에 위해가 가해진 적도 없었으며, 그 누구도 인격적으로 김지영 씨를 욕한 적도 없었다. 심하게 가난하지도 않았고 가정환경이나 친구 관계, 부부 관계도 결코 나쁘지 않다. 바바리맨과 선생님들의 발언은 여학생이라면 한번은 겪었을 일이며, IMF를 조용히 지나간 가정이 어디 있냐고.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 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94p)
"제 옷차림이나 태도에 문제가 없었는지 돌아보고, 상사분의 적절치 못한 행동을
유발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겠습니다."
두 번째 면접자가 하!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큰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김지영 씨도 씁쓸했는데,
한편으로는 저런 대답이 높은 점수를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후회했고,
그런 자신이 한심했다.(102p)
그 말많고 시끄러운 이 책을 드디어, 단숨에 읽어가면서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궁금했다. 대체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메갈"이니 "페미충"이라는 비난을 쏟아붓는 이들 중에 이 책을 단 몇쪽이라도 읽은 적이 있는가. 그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었더라면(심지어 어려운 내용이 전혀 아닌데) 과연 본인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도 모를 따위의 논리를 세우지 않을텐데. 왜 많은 여성들이 이 책을 읽고 분노하는가. 심지어 '82년생'과 거리가 먼 이들까지 말이다.
처가살이가 시집살이보다 고되다는 등 요즘은 장서 갈등이 사회 문제라는 둥 하며,
장모를 모시고 사는 걸 보면 만난 적은 없지만 김은실 팀자의 남편은 좋은 사람일 거라고 했다.
김지영 씨는 17년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미용 일을 하러 나간 동안 잠깐식 막내를 봐주셨을 뿐
삼 남매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등의 돌봄 노동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른 집안일도 거의 안 하셨다. 어머니가 차린 밥을 드시고,
어머니가 빨아 놓은 옷을 입고, 어머니가 청소한 방에서 주무셨다.
하지만 아무도 어머니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111p)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에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히 주저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
사업가의 목표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고,
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겠다는 대표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효율과 합리만을 내세우는 게 과연 공정한 걸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는 결국 무엇이 남을까.
남은 이들은 행복할까.(123p)
그건,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겪었고, 그리고 조용히 넘어갔던 일들을 낱낱이 기록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건들은 아주 사소하다. 내가 초등학교 때도 출석번호의 앞번호는 남학생들이었고, 괴롭히는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을 좋아하는 거라고 했으며, 여고에 다니는 친구들은 선생들의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들을 농담으로 흘러넘겨야 했으며, 성폭행 당한 피해자의 옷차림 운운하는 기사를 끝도 없이 봐왔다.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갈때는 한여름에도 오싹했으며, 생김새, 화장, 옷차림 등등으로 지적받는 일은 지금도 종종 그렇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거의 두세쪽에 한번씩 울화가 치솟았는데 모든 등장인물을 "씨"로 언급하는 그 건조하고 사실적인 묘사들 때문에 더 그랬다. 나의, 내 주변의 이야기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세상은 넓고 변태는 많았다"라는 말로 치부할 일인가. 30%도 되지 않는 여성인력의 비율에 '여풍이 거세다'며 박수칠 일인가. 잠시잠깐 아이를 데리고 나온 이들에게 '맘충'이라며 손가락질 할것인가.
회사에서는 임신한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출근과 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출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김지영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와,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138p)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기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149p)
아버지가, 할머니가, 택시 운전사 아저씨가, 대학 선후배들이, 직장 동기가, 지나가던 회사원들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진 한마디들이 쌓이고 쌓인다. 인식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문제가 되냐며, 그렇게 살았고 생각하고 맞는 말과 행동을 한 것인데 말이다. 몰카가 회사에 붙자 남직원들은 그것을 돌려봤고 이후 여직원들은 심리상담을 받고 퇴사했다는 지점에서 죄없는 책을 찢어버리고 싶어졌다. 심지어 이야기 말미에 등장하는 이 책의 서술자는 상담가였는데, 그조차 와이프의 어려움은 잠시 이해하는 듯 하나 결국 똑같은, 본인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차별적인 결론에 이른다. (뭘 듣고 느낀거야)
같은 아이 엄마라서 그랬는지, 김지영 씨가 순진한 소리를 해서 그랬는지,
점원은 마음이 쓰이는 눈치였다.
아이 어린이집 보낸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이만한 일자리도 없다고,
일단 구인 광고는 떼어 놓을 테니 생각해보고 빨리 연락 달라고 했다.
김지영 씨가 남편과 상의해 보겠다고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점원이 말했다.
"나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에요."(160p)
그래도 누군가는 계속 싸운다. 옳지 않다면 말하고 바꾸는게 옳은 것이다. 분명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는데 눈감고 입막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바바리맨을 잡았던 친구들이, 차승연 선배가, 강은실 팀장이, 윤혜진 씨가, 강혜수 씨가 그리고 많은 김지영 씨가 끊임없이 싸운다.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고 두고본다면 우리는 계속 그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임을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세상에 남고 누군가는 세상을 바꿀 것이다. 누구의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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