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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나를 본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지음
들녘 펴냄
겨울날 아침 지구가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그대는 느낄 수 있다.
숨어 있던 공기의 물결이
집의 벽들을 철썩 강타한다.
지구는 움직임에 둘러싸인 고요의 텐트.
이동하는 새떼들 속엔 비밀의 조타장치가 숨어 있다.
겨울의 우울 바깥로
숨겨진 악기들의
트레몰로가 솟아오른다. 마치 그대가
무수한 곤충 날개 소리를
머리 위로 들으면서, 여름날
키 큰 라임나무 아래 서 있는 것 같다.
- ‘크게 파도치는 뱃머리에 평화가’, Tomas Tranströmer
때때로 내 삶은 어둠 속에 눈을 떴다.
마치 내가 투명인간처럼 서 있는 동안
군중들이 어떤 기적을 향하여 맹목과 불안 속에
길거리를 밀고 나가는 듯한 느낌.
어린아이가 제 심장의 무거운 박동소리에
귀 기울리며 두려움 속에 잠이 들듯.
천천히 천천히, 이윽고 아침이 광선을 자물쇠 속으로 집어넣어
어둠의 문이 열릴 때까지.
- ‘키리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Tomas Tranströmer
절망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고통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독수리가 제 비행을 멈춘다.
열망의 빛이 흘러나오고,
유령들까지 한 잔 들이켠다.
빙하시대 스튜디오의 붉은 짐승들,
우리 그림들이 대낮의 빛을 바라본다.
만물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수백씩 무리지어 햇빛 속으로 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
발밑엔 무한의 벌판.
나무들 사이로 물이 번쩍인다.
호수는 땅 속으로 통하는 창(窓).
- ‘미완(未完)의 천국’, Tomas Tranströmer
그토록 오래 나를 따라왔던 길거리,
그린란드의 여름이 눈 웅덩이에서 빛나는 길거리를 건널 때,
얼음바람이 내 눈을 치고
두세 개의 태양이 눈물의 만화경(萬華鏡) 속에 춤춘다.
내 주변으로 길거리의 온 힘이 몰려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힘.
차량들 아래 땅 속 깊은 곳,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숲이 조용히 천 년을 기다린다.
거리가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시력은 너무 빈약하여 태양도
검은 공간의 회색 공일 뿐.
그러나 일순 내가 빛난다! 거리가 나를 본다.
- ‘건널목’, Tomas Tranströmer
암울한 몇 개월 동안, 내 삶은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만 불타올랐다.
개똥벌레가 점화되고 꺼지고, 점화되고 꺼지듯이. 밤의 어둠 속
올리브나무 숲 속에서 눈여겨보면
개똥벌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다.
암울한 몇 개월 동안, 영혼은 움츠러들고 망가진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육신은 당신을 향한 직선 통로를 택하였다.
밤하늘들이 울부짖었다.
우리는 우주의 젖을 훔쳐먹고 연명하였다.
- ‘불꽃 메모’, Tomas Tranströmer
봄이 버림받아 누워 있다.
검보랏빛 도랑이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내 옆에서 기어간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몇 송이 노란 꽃.
나는 검은 케이스 속의
바이올린처럼
내 그림자 속에 담겨 운반된다.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인다.
전당포 안의
은그릇처럼.
- ‘사월과 침묵’, Tomas Tranströ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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