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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나를 본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시선집, 2011 노벨문학상 수상)의 표지 이미지

기억이 나를 본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지음
들녘 펴냄

겨울날 아침 지구가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그대는 느낄 수 있다.
숨어 있던 공기의 물결이
집의 벽들을 철썩 강타한다.

지구는 움직임에 둘러싸인 고요의 텐트.
이동하는 새떼들 속엔 비밀의 조타장치가 숨어 있다.
겨울의 우울 바깥로
숨겨진 악기들의

트레몰로가 솟아오른다. 마치 그대가
무수한 곤충 날개 소리를
머리 위로 들으면서, 여름날
키 큰 라임나무 아래 서 있는 것 같다.

- ‘크게 파도치는 뱃머리에 평화가’, Tomas Tranströmer

때때로 내 삶은 어둠 속에 눈을 떴다.
마치 내가 투명인간처럼 서 있는 동안
군중들이 어떤 기적을 향하여 맹목과 불안 속에
길거리를 밀고 나가는 듯한 느낌.

어린아이가 제 심장의 무거운 박동소리에
귀 기울리며 두려움 속에 잠이 들듯.
천천히 천천히, 이윽고 아침이 광선을 자물쇠 속으로 집어넣어
어둠의 문이 열릴 때까지.

- ‘키리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Tomas Tranströmer

절망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고통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독수리가 제 비행을 멈춘다.

열망의 빛이 흘러나오고,
유령들까지 한 잔 들이켠다.

빙하시대 스튜디오의 붉은 짐승들,
우리 그림들이 대낮의 빛을 바라본다.

만물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수백씩 무리지어 햇빛 속으로 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

발밑엔 무한의 벌판.

나무들 사이로 물이 번쩍인다.

호수는 땅 속으로 통하는 창(窓).

- ‘미완(未完)의 천국’, Tomas Tranströmer

그토록 오래 나를 따라왔던 길거리,
그린란드의 여름이 눈 웅덩이에서 빛나는 길거리를 건널 때,
얼음바람이 내 눈을 치고
두세 개의 태양이 눈물의 만화경(萬華鏡) 속에 춤춘다.

내 주변으로 길거리의 온 힘이 몰려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힘.
차량들 아래 땅 속 깊은 곳,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숲이 조용히 천 년을 기다린다.

거리가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시력은 너무 빈약하여 태양도
검은 공간의 회색 공일 뿐.
그러나 일순 내가 빛난다! 거리가 나를 본다.

- ‘건널목’, Tomas Tranströmer

암울한 몇 개월 동안, 내 삶은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만 불타올랐다.
개똥벌레가 점화되고 꺼지고, 점화되고 꺼지듯이. 밤의 어둠 속
올리브나무 숲 속에서 눈여겨보면
개똥벌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다.

암울한 몇 개월 동안, 영혼은 움츠러들고 망가진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육신은 당신을 향한 직선 통로를 택하였다.
밤하늘들이 울부짖었다.
우리는 우주의 젖을 훔쳐먹고 연명하였다.

- ‘불꽃 메모’, Tomas Tranströmer

봄이 버림받아 누워 있다.
검보랏빛 도랑이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내 옆에서 기어간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몇 송이 노란 꽃.

나는 검은 케이스 속의
바이올린처럼
내 그림자 속에 담겨 운반된다.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인다.
전당포 안의
은그릇처럼.

- ‘사월과 침묵’, Tomas Tranströmer
2019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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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1 Corinthians 13


말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만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느꼈다.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p. 28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지음
열린책들 펴냄

읽고있어요
2023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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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이렇게 은밀한 일을 벌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갑자기 죽어 버리면 그런 비밀이 전부 까발려져 마치 살아있던 것 자체가 커다란 음모였던 양 보이게 되는 걸까. - ‘음모’ - p. 171

인내상자

미야베 미유키 지음
북스피어 펴냄

2023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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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소소한 논쟁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 - p. 71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약속과 의무라는 규약 너머의 행동이 필요하다. 이것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폭력과 파괴, 선택과 충돌이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극복할 수 있을까. - p. 115

…스크롤!

정지돈 (지은이) 지음
민음사 펴냄

2023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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