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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회색빛 도시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학생과 직장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느라 ‘바쁜 사람들’이 현대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굳어져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방금 개인적 호기심에 구글에 ‘현대인’을 검색해 기사들의 제목을 살펴보았는데, 하나 같이 현대인들의 ‘바쁨’이라는 특성과 관련된 제목들이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인지, 우리와 ‘여유’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의식주’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줄여 일컫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삶에서 의식주란 ‘꼭 필요한’ 요소이기 보다 오히려 기호에 따라 ‘선택해서 취하는’ 요소로 변질되어버린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 하고, 식사를 몇 끼씩 건너뛰더라도 직장 생활, 학교 과제, 자격증 시험 준비 등, 돈을 버는 일, 그리고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취업 등에 성공해내기 위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극한의 상태까지 밀어붙이며 살아간다. 그래서 충분한 수면과 건강한 식사를 매일 챙기고, 예쁜 옷과 악세사리로 자신을 꾸미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쓸 데 없는 사치스러운 여유를 부리는 사람으로 여기며 이 바쁜 사회에서 도태될까 불안해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보화 작가의 <계절의 맛>이라는 책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누군가는 바빠서 요리는커녕 글자조차 읽을 시간이 없는 ‘나’에게는 필요 없는 책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작가가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는 신경을 쓰면서 정작 자기 자신만은 챙기지 못 하는 현대인들이 잠시 멈춰서 꼭 자신의 마음에 새기고 지나가야할만한 것이기 때문에, 바쁜 현대인들의 짧은 곁눈질로 무시당할지언정 이 책의 추천글을 써 보려 한다.
<계절의 맛>이라는 제목 옆에는 ‘고요하고 성실하게 일상을 깨우는 음식 이야기’라는 소개의 문구가 적혀 있다. 요리에 관련된 책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계절의 맛’이라는 제목과, 음식이 ‘고요하고’ ‘성실하게’ 일상을 깨운다는 소개가 표지를 넘기기 전부터 우리의 흥미를 끈다. 이 책은 다른 요리책들과 어떤 점이 다를까? 질문에 대한 답은 작가가 직접 쓴 프롤로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급류에 휩쓸리듯 매일을 살아내다 보면 가끔 돌아볼 때를 잊은 적도 있다. 나를 살필 여력도 좀처럼 나지 않아 어쩐지 웅덩이에 푹 빠져 고인 채로 그대로 있던 날도 있었다. 이런 날은 퇴근 길에 시장으로 향한다. 좌판 위 푸성귀나 과일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내가 서 있는 계절을 실감할 수 있다. 그 길로 제철 식재료를 사 들고 와 혼자 먹을 밥을 마음으로 짓는다.. 예쁜 그릇에 담아 상차림도 단정히 한다. 텔레비전을 켜는 대신 먹고 있는 음식에 시선을 두고 맛에 집중해 한 끼를 챙기고 나면 희한하게 마음이 한풀 가라앉는다.
내 삶은 내가 원해서 하는 일들보다 주변이 나에게 시키는 일들로 가득 채워진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지만, 이런 수동적인 나날들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조차 세상의 편에서 내 자신을 학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언제나 불같이 화를 내며 맞설 수는 없을지언정, 적어도 나를 지켜낼 수는 있어야 한다. 인지하지 못 하는 새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버릴 것이고, 끝에는 결과로 무거운 허무함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해버린 신체만이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이 시간에 머무른다는 것. 아무리 잠시일지라도. 그것은 나의 현 상태를 돌아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며, 꼭 필요한 수순이다. 이 책은 바로 그것을 목표로 한다. 지금 이 시간에 잠시 머무르며, 나를 돌아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계절에 맞는 식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줄 것을 제시한다.
'계절마다 식탁에 오르는 음식을 우물거리고 있으면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그냥 식재료가 아닌, '제철' 식재료는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할 수 있게 하며, 동시에 그 흐름 속에 머무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혼자 잠시 멈춰 과거의 추억을 즐기는 작은 사치를 부릴 기회를 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각각의 요리와 관련된 작가의 계절별 추억을 엿보게 된다. 작가는 각각의 요리법을 전하는 것에 더불어 그 요리와 관련된 자신의 추억 속 이야기를 하나씩 꺼낸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읽으며 경험해보지 못 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따뜻함을 느껴보기도 하고, 잊어버리고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는 단순히 먹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신적 행위에도 영향을 미침을 작가는 잘 알고 있다. 매일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먹지도 못 하고 지나치지만, 요리를 하고 식탁에 앉아서 깔끔히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을 포기함으로서 우리는 나를 돌아보고 다독여줄 여유마저 쉽게 잃고 만다. 스스로에게 건강한 요리를 한 끼 해 먹이는 것은 어찌보면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그런 작은 일들로부터 나를 대접한다는, 아주 크고 위대해 보이는 일이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어찌보면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 표지에 쓰인 소개글이 조금 더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아주 평범하고 고요한 행위이다. 그러나, 그 매일매일의 성실함은 일상에 대해 무뎌져버린 우리의 감각을 빠르게 깨워줄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바쁘다고 그저 무시하고 지나기에는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깊고 강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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