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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무늬들’, 이병률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음도 늦추자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 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보아야 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한번 스친 손끝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나는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로 가로질러 날아가는 하나의 무의미예요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 새는 며칠째 무의미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 가지를 날라놓고 가지는 보란 듯 쌓여 무의미의 마음을 이루어요 내 바깥의 주인이 돼버린 당신이 다음 생에도 다시 새[鳥]로 태어난다는 언질을 받았거든 의미는 가까이 말아요 무의미를 밀봉한 주머니를 물어다 종소리를 만들어요 내가 듣지 못하게 아무 소리도 없는 종소리를
2
한 서점 직원이 한 시인을 사랑하였다
그에게 밥을 지어 곯은 배를 채워주고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살아지겠다 싶었다
바닷가 마을 그의 집을 찾아가 잠긴 문을 꿈처럼 가만히 두드리기도 하였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를 문장으로 문장으로 스치다가도 눈물이 나 그가 아니면 안되겠다 하였다
사랑하였다
무의미였다
- ‘고양이 감정의 쓸모’, 이병률
네가, 내 간을 뜯어가듯 조금이었음 한다
이빨의 기운을 믿어 나를 물어도 내 속은 후려치지 않았음 한다
삼라만상이 내 말을 믿었음 한다
잘못했으니 다 내 잘못이었으니, 산 늪에 몸을 들여 서러워지고 늪이 다 마르고 몸 갈라져도, 구더기 복받쳐나오는 내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은 채로 안 볼 터이니
한 장의 이파리처럼 뒤집히는 이 소요, 아주 가끔이었음 한다
- ‘탄식에게’, 이병률
마셔요
그는 마시지 않습니다
어서 마셔요
그는 마십니다
그러고는 옆으로 쓰러집니다
그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새벽 세시의 술집
그 어떤 물살도 와서 부딪치지 못하는 시간
그가 슬퍼 보여 나눈 술이 문제만은 아닐 텐데
단 한잔만으로 물약을 마신 듯 쓰러져 누운 그는
덤불 속의 새집 같았습니다
그럴 수 없는 일들이 그렇게 되고 마는 바닷가에서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단 한번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오늘밤이었다고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말 걸어왔습니다
밤 열두시를 알리는 종을 쳤다가
멈춰 있던 시계가 열한시를 가리킨 걸 보고 놀라
다시 열한 번의 종을 쳤으나
열두 번이 맞았노라고
그길로 성당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종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렸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쓰러진 그를 두고 나오는 길
기다렸던 것처럼 유난히 추운 밤이 오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 벼랑을 피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 ‘달에게 보내는 별들의 종소리’, 이병률
폐렴을 겨우 이기고 떠난 어느 멀고 먼 길
호숫가 오두막집에 신세를 지기로 한 하룻밤
그 밤을 웅크려 다시 앓습니다
한번 호되게 앓는 동안
내 몸의 주인이 바뀐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 물러진 몸은 또 지치기 쉬워
종일 옆에 같이 누워 있는 것이
바깥 소리인지 희미한 점들인지를 묻고도 싶었는데
나귀 몰고 장에 간 안주인 대신
바깥주인이 끓이는 닭고기스프 냄새에
금방이라도 자릴 털고 일어나
호숫가에 나가 얼굴을 씻고도 싶은데
명백해져야 하겠는데
해질 무렵 문 열리는 소리 들리고
오두막집 아이가 한아름 꺾어다 내미는 들꽃 다발에
섬뜩하리만치 뜨겁게 괜찮아지는
내 몸은 누구의 것인지
누구의 누구인지
저 바깥은 황혼이 울어대는 소리
짐승들이 길을 지우고 발 씻는 소리
내 몸의 주인인 저녁이 오고 있습니다
- ‘꽃들의 계곡’, 이병률
강도 풀리고 마음도 다 풀리면 나룻배에
나를 그대를 실어 먼 데까지 곤히 잠들며 가자고
배 닿는 곳에 산 하나 내려놓아
평평한 섬 만든 뒤에 실컷 울어나보자 했건만
태초에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
만물의 등짝에 일일이 그림자를 매달아놓았건만
세상 모든 혈관 뒤에서 질질 끌리는 그대는
내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 ‘약속의 후예들’, 이병률
칼갈이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번, 여자가 한번 칼 갈라고 외치는 소리는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
칼갈이 부부를 불러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를 내미는데
사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칼을 갈다 멈추는 남편 손께로 물을 끼얹어주며
행여 손이라도 베일세라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
서걱서걱 칼 가는 소리가 커피를 끓인다
칼을 갈고 나오는 부부에게 망설이던 커피를 권하자 아내가 하는 소리
이 사람은 검은 물이라고 안 먹어요
그 소리에 커피를 물리고 꿀물을 내놓으니
이 사람 검은 색밖에 몰라 그런다며,
태어나 한번도 다른 색깔을 본 적 없어 지긋지긋해한다며 남편 손에 꿀물을 쥐어준다
한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사내의 어둠이 갈아놓은 칼에 눈을 맞추다가 눈을 베인다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
불을 켜지 않았다
칼갈이 부부가 집에 다녀갔다
- ‘검은 물’, 이병률
추운 밤 사이 강물도 얼었나보다
강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 얼음 속을 들여다보니 고래 한 마리 얼어 있다
그도 죽으려 했나보다
고래 속으로 들어가 몸을 서로 녹여도 좋겠다
천근의 아기를 받아 씻기며 집을 차려도 좋겠다
그러면 물고기들은 와서 부딪치며 한사코 집 안으로 들어와 참견하려 할 것이다
집 안쪽에다 불을 지피려 안간힘을 쓰는 내 모습을 보고 허허 신(神)은 파도소리만큼 웃기도 할 것이다
문득 그 소리에 녹기 시작한 고래는 물을 흘리며 일삼아 흐느껴 울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자꾸자꾸 그의 허리 속으로 걸어들어가 한 천년쯤 아무 일도 없을 어두운 밤을 차려도 좋겠다
- ‘강변 여인숙’, 이병률
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의 주인이었던 어머니 아버지는
가게를 정리하시며
따로 나가 사는 아들을 위해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네신다
검은 봉지 속에는
칫솔 네 개
행주 네 장
때수건 한 장
구운 김 한 봉지
치르려 해도 값을 치를 수 없는 검은 봉지를 들고
흔들흔들 밤길을 걸었다
문 닫힌 가게 때문에 더 어두워진 거리는
이 빠진 자리처럼 검었다
검은 봉지가 무릎께를 스칠 때마다 검은 물이 스몄다
그늘이건 볕이건 허름하게나마 구멍 속에서 비벼진 시절이 가고
내 구멍가게의 주인공들에게서
마지막인 듯
터질 것처럼
구멍의 파편들이 가득 든 검은 봉지를 받았다
- ‘희망의 수고’, 이병률
3
kafahr님의 인생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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